116화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백작 부인 이 목소리를 높였다.
“여자들은 집에서 안살림을 살펴야 해요. 그렇지 않나요?”
자신의 말에 동조해 달라는 것처럼 로렌 백작 부인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움찔거리던 귀부인들이 분분히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이엘리가 웃는 얼굴 그대로 백작 부인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여전히 오만불손 하시네요, 로렌 백작 부인.”
백작 부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뭐지? 내가 원했던 건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당연히 내 편을 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연녹색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갑다. 백작 부인이 더듬거렸다.
“저, 저는 그게 아니오라……”
“여성이 취미를 즐기지 말고 안살림만 살펴야 한다고, 누가 그렇게 정해 뒀나요?”
이엘리는 입가를 우아하게 휜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 시선이 백작 부인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제국 내 법전에 그런 규정이 정해져 있나요?”
“그런 것은 아니고……”
“여성이 취미 생활을 즐기면 처벌 받기라도 하나요?”
비록 나긋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쪽엔 새파랗게 날이 서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잇는다.
“어째서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거죠?”
“여, 여자와 남자의 일은 엄연히 다르니까요! 그러니까……”
“세상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엘리는 굉장히 놀랐다는 것처럼 두 눈을 휘둥그렇게 치떴다. 이후 냉정하게 질문을 던진다.
“불공정한 것이 있다면 당연히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 가요?”
“……!”
정말로 의아하다는 질문에 백작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백작 부인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게다가 제가 무리한 것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그저 취미 생활을 하는 것뿐인데.”
봄날 새싹처럼 연연한 연녹색 시선은 온기 한 점 없이 백작 부인을 응시했다. 그녀가 물었다.
“이 사소한 것까지 남자들에게 허락을 받고, 남들의 눈치를 보며 해 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지금 상황은 좋지 못하다. 백작 부인은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자신의 말에 동조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이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 이는 귀부인들이 많아진다.
“그러게요.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취미 생활일 뿐인데.”
“백작 부인께서 너무 꽉 막힌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닐까요?”
“굳이 이런 부분까지 남자들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를 졸라멜 필요는 없잖아요?”
소곤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두 사람의 귀에 들리기에는 충분했다. 이엘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백작 부인. 부인 같은 분들이 계 시기에 사회가 더 발전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안 하시나요?”
“무, 무슨 이런 사소한 문제로 사회의 발전까지 논하시나요?”
“사소하니까 더욱 중요한 거죠.”
그녀의 목소리는 비단처럼 부드러워 오히려 서늘했다. 백작 부인은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무릇 무언가를 바꾸려면, 사소한 것부터 바뀌어야 하는 거랍니다.”
“……”
백작 부인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어깨를 으쓱인 이엘리는 주변을 한 바퀴 크게 둘러본다.
“어쨌거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전 저희가 취미 생활을 즐겼으면 하고 바라요.”
이건 진심이었다. 어째서 고작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까지 남자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이엘리는 예전부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그녀가 말을 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이 살롱의 시간이 참석하신 분들께 편안하셨으면 좋겠어요.”
이엘리의 목소리는 여유로웠지만, 다른 귀부인들은 여유라고는 한 톨 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언가를 창작하고 싶다면 그러셔도 되고, 감상을 원하신다면 그러셔도 돼요.”
귀부인들은 이엘리의 말에 무섭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시선을 느긋하게 마주봤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 여러 예술가들을 초빙할 생각이랍니다. 아, 또 한…"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그녀는 살짝 눈매를 치켜떴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여성 예술가들이 있다면 그들을 전력으로 지원할 생각이기도 해요.”
이엘리의 말이 조금 의외이긴 했나 보다.
결혼이나 집안을 위한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한 여성들은 보통이 사회에서 배척 받는게 흔했으니까.
이엘리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혹시 재능이 있음에도 빛을 보지 못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지 제게 말씀해 주세요.”
귀부인들의 시선이 반짝였다. 이엘리는 제게 쏟아지는 질문을 받으며 백작 부인을 곁눈질했다.
'어쨌든 살롱의 첫날은 효과적인 것 같네.’
패배감에 짙게 물들어 어깨를 떠는 백작 부인의 모습은 꽤나 볼만했다.
이엘리는 작은 악마처럼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이엘리가 연 살롱의 첫날은 성황리에 끝났다.
손님들을 배웅한 이엘리는 지친 얼굴로 비틀비틀 방 안에 들어갔다. 화장조차 지우지 않고 이불 위에 풀 썩 눕자, 자카리가 다정하게 물었다.
“오늘 어땠어?”
“뭐, 괜찮긴 했는데……”
이불에 파묻힌 채 눈동자만을 굴리던 이엘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작게 칭얼거렸다.
“으, 너무 힘들어……”
“피곤하겠네.”
“응.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어.”
이엘리는 눈매를 가늘게 떴다. 침 대로 걸어온 자카리가 그녀의 곁에 주저앉았다.
이엘리는 그 자리에 누운 그대로 눈동자만을 데굴데굴 굴렸다.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참, 자카리. 네가 아까 나 에스코트해 줬잖아.”
“그랬지. 그런데 그게 왜?”
“로렌 백작 부인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분해 하더라고.”
일그러진 얼굴을 떠올리던 이엘리는 쿡쿡 소리를 내어 웃었다.
분해서 어쩔 줄 모르던 백작 부인의 얼굴은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 도 좋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 구겨진 표정이 얼마나 고소하던지.”
“그랬어?”
“응. 역시 난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닌가 봐.”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짓궂은 얼굴을 했다.
자카리는 손을 뻗어 이엘리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긴 손가락이 머리를 스치는 감촉이 기분 좋아, 그녀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거 말고는 다른 일은 없었어?”
“글쎄, 그냥 공작 부부의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인다…… 뭐 그런 말?”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약간 노곤해 보인다.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자카리가 허리를 숙였다.
금세 가까워지는 제 남편의 아름다운 얼굴에,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왜 그렇게 봐?”
“이엔.”
자카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장난기 속에 애써 감추고 있는 욕망이 넘실거린다.
“난 공작 부부는 낮과 밤, 둘 다 사이가 좋다고 말하고 싶어.”
“뭐?”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라도, 사이좋은 부부가 해야 할 일 은……”
자카리는 말꼬리를 흐렸고, 이엘리는 그런 제 남편을 힐끔 곁눈질로 응시했다.
자카리는 느릿한 동작으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뒤섞인 호흡이 떨어지자, 그는 살 짝 초조한 낯을 했다.
“그러니까 난……”
“정말, 내가 못 살아.”
잠시 그를 노려보던 이엘리는 결국 까르르 웃어 버렸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엘리의 살롱이 오픈한 이래로, 제국에서 아샤꽃은 ‘공작 부인의 꽃’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아샤 차가 그렇게 향기롭다면서요?”
“저도 한 번쯤 살롱에 초대받고 싶네요."
“하지만 언제 북부까지 내려가 보겠어요.”
어찌나 그 소문이 짜하게 퍼졌는지, 공작 부인의 살롱은 타 지역의 귀부인들마저 한 번쯤 방문하고 싶은 명소가 되었다.
공작 부인은 자신의 살롱에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에는 꽤 관대했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오랜만에 만난 황녀와 황후는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친밀한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이었 지만, 황후가 황가의 사람이 된 후 로 오히려 얼굴 보기가 어려워졌다. 황제의 견제 때문이었다.
“이게 그 유명한 아샤 차와 아샤잼인가요?”
“맞아요. 맛이 어떠신가요?”
“무척 맛있네요. 예전부터 느꼈지 만, 공작 부인은 여러모로 수완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소수의 사람만을 들이는 황녀의 살롱에서 친밀한 귀부인에게 아샤 차와 잼을 제공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황녀와 공작 부인의 친분이 상당하 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돌려 표현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공작가로 아샤 차와 잼을 상품화하는 건 어떤가 하는 제안이 들어갔다던데요.”
황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따끈한 차가 식도를 타고 뱃속을 따스하게 데웠다.
“들었어요. 하지만 공작 부인은 그 제안은 거절했다더군요.”
“어째서일까요? 상업적으로 꽤 가능성이 있어 보였는데요.”
“사실 공작가는 더 이상의 부는 필 요 없으니까요. 황가와 비견할 만큼 부유한걸요.”
황녀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선택한 거겠죠. 이 차로 가질 수 있는 상징성을요.”
“상징성?”
“아샤꽃이 요새 어떻게 불리는지 아시잖아요. ‘공작 부인의 꽃’이라고 들 하죠.”
“‘공작 부인의 꽃’이라……”
연한 분홍색 찻물 안쪽으로 꽃잎이 살랑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황후가 쓰게 웃었다.
자신은 황금으로 만든 새장 안에 갇혀 있는 기분인데, 공작 부인은 훨훨 날고 있었다. 황후가 말했다.
“저도 공작 부인의 결혼식에 참석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괜히 미안 해지네요.”
“아니예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공작 부부도 이해하고 있을 거예요.”
황녀가 손을 저었다. 황후는 가만히 찻물을 내려다보았다. 찻물에 초췌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왜 하필이면 제가 황후라는 막중 한 직책을 얻게 된 걸까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황후의 얼굴은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황녀는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 폐하."
“아시잖아요. 저는 원래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예요.”
손을 든 황후가 얼굴을 폭 덮었다. 신음처럼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사실 전 결혼 따위, 그다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론도 후작 영애였던 시절, 그녀는 그녀를 아껴 주는 아버지 아래에서 드물게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또한 그녀는 외동딸이었고, 작위를 이어야 할 몸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결혼 상대를 고르는 일에 자유로웠다.
하지만 느닷없이 황제의 청혼을 받는 순간 그녀의 삶은 산산조각 났다.
“……”
황후의 관은 그녀를 전혀 행복하게 해 주지 못했다.
황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를 무어라고 위로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황녀는 손을 뻗다 말고 손을 늘어뜨렸다. 마음이 아려 왔다.
사실 이엘리의 예상대로, 귀부인들은 예술품을 감상하면서 대화만 나 누는 데에는 이미 진력이 나 있었다.
그런 살롱은 제도에서부터 내려온 유행이었는데, 백작 부인이 북부에 그 유행을 들여온 이후로는 대부분의 살롱이 그런 유행을 따르고 있었으니 이제 슬슬 지겨워질 만도 했다.
“공작 부인의 살롱에서는 그저 감상이 아니라, 직접 무언가를 창작해도 괜찮대요.”
“그런 건 남자들이 해야 할 일 아닌가요?”
“공작 부인께서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시지 않는다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