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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115/196)

115화

“저, 이엔. 싸운다니, 그게 무슨 말 이야?”

자카리가 조금 당황하여 이엘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에게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쳤다.

“어머, 몰라?”

“월?”

“이런건 귀부인들의 싸움이야.”

그녀가 두 눈을 빛내며 주먹을 불 끈 쥐었다.

이엘리를 바라보던 자카리가 피식 미소 지었다.

“그래, 이왕 싸울 거면 승리하고 와.”

“당연하지. 나만 믿어.”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이엘리는 몸을 돌렸다. 자카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결혼식 때는 귀빈들을 제한하여 받아들였으므로, 이번에는 일부러 북부의 귀부인들은 빠짐없이 초대했다.

이엘리가 발송했던 초대장에 불참 의사를 표했던 귀부인은 단 한 사람 도 없었다.

“꽤 사람들이 많을 것 같네.”

“그러게.”

자카리는 이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전투적인 동작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 있어?”

“레이디의 드레스와 장신구는, 기 사의 갑옷이랑 검 같은 느낌이라고.”

“그런 거야?”

“그런 거야. 오늘 치장의 목적은 ‘안 꾸민 것 같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을 쓴 거’라고.”

단호하게 말한 이엘리는 몸을 빙글 돌렸다. 양 허리에 손을 얹은 그녀가 남편에게 선언했다.

“나 오늘 어때?”

“엄청 예뻐.”

자카리의 단호한 대답에 이엘리는 씩 웃었다.

아까 메리가 심혈을 기울여 꾸며 준 보람이 있었다. 그녀는 거울을 곁눈질했다.

연한 화장임에도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생기발랄하다.

“그렇다면 다녀올게.”

“이엔, 가기 전에 잠깐만.”

자카리가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감아 쥐었다.

이엘리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는 고개를 가볍게 숙인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그녀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가 사르르 눈매를 접으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별저까지 에스코트해 주고 싶은데, 안 돼?”

“어, 음……”

이엘리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이상하게 뺨이 달아오른다. 약간 더듬 거리면서 그녀가 말했다.

“조, 조금 유난 떤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면 어때.”

자카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 손을 뻗은 자카리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실까요, 레이디?”

그녀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돌리며 손 위에 제 손을 포겠다.

“……좋아요, 신사님.”

애써 새침한 얼굴을 한 그녀가 앞 서 걸었다. 그는 웃음을 삼키며 이엘리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이엘리의 살롱으로 이용하기 위해, 공작성의 별저를 통으로 개방했다. 물론 공작성의 규모에 비해서는 작은 건물이긴 했지만, 보통의 살롱이 응접실 정도만 개방되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미리 별저에 입장한 손님들은 아샤꽃차와 다과를 대접받으며 휴식을 취했다.

“이 차, 황녀 전하께서도 호평하셨 다지요?”

“그러게요. 사실 저도 굉장히 궁금 했답니다.”

귀부인들의 호기심을 가장 자극했 던 건, 공작 부부의 결혼식 때 처음 선보였던 아샤꽃 차와 잼이었다.

맛도 있는 데다가 그 모양새가 무척 어여뻤기에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꽃잎이 활짝 피어 나다니…… 어떻게 만든 걸까요?”

“맛도 훌륭하네요.”

초대받은 귀부인들은 소곤소곤 대 화를 나누었다.

조그만 대화 사이로 웃음이 간간이 섞인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로렌 백작 부인도 참석하셨다죠?”

“하지만 로렌 백작가문은, 지난번 공작 부부의 결혼식에는 초대받지 못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렇게 이야기하던 귀부인들이 흘끗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 끝에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로렌 백작 부 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귀부인들의 입술 위로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비웃음이었다.

“저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거절 했을 텐데……”

“그래도 어떻게 빠지겠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공작 부인의 살롱인걸요.”

제국 유일의 공작 부인이자 북부의 안주인.

공작 부인의 살롱에 출입하지 않는 다는 건, 북부에서의 사교 활동은 아예 포기한다는 뜻과도 가까웠다. 아마 그래서 억지로 참석한 것일 터다.

“그래도 북부에서 사교 활동자체를 하지 않으실 수는 없을 테니, 일 부러 오신 거겠죠?”

“뭐, 그렇기는 할 테지만요. 그래도 조금…… 뻔뻔하기는 하네요.”

“그러게요. 공작 부인은 물론이고, 공작 각하와도 꽤 좋지 못한 일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섞인 비웃음 들을 로렌 백작 부인은 예민하게 눈치 챘다.

백작 부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먹 위로 뼈들이 새하얗게 도드라진다. 귀부인들은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백작 영애는 결국 내려오지 않으셨나 보네요?”

“그야 백작 영애께서는 매번 제도 에 계시곤 하잖아요.”

“백작 영애께서도 명색에 북부의 귀족이신데, 어째 제도에 훨씬 더 오래 계시는 것 같아요?”

로렌 백작 부인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귀부인들은 한참을 더 떠들어 댄 이후에야 화제를 바꾸었다.

차와 다과가 맛있다는 둥, 별저의 모습이 우아하다는 둥, 호의적인 대 화가 이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로렌 백작 부인만이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초조한 얼굴이었다.

북부의 가장 이름 높은 살롱은 본디 제 것이다. 나중에 제 딸도 그 살롱을 통해 사교 활동을 시키리라, 그리 생각했는데.

‘이대로라면 우리 살롱보다, 공작 부인의 살롱이 더 유명해지겠어.’

백작 부인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오랫동안 북부 사교계의 중심에서 활동해 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이엘리가 새로이 열고 있는 지금의 살롱은 흠 하나 잡을 곳 없이 완벽 한 모습이었다.

‘살롱의 꾸밈새도, 다과와 차도, 편안한 분위기까지…… 모두 완벽해.’

완벽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더욱 분했다.

백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콱 앙다물었다.

눈과 코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아샤차라니. 바로 그때, 매끄러운 목소리 가 들렸다.

“다들 편안한 시간 보내고 계신가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이엘리였다. 귀부인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 부인을 맞이하려 함이다.

하지만 지금 이엘리의 곁에는 우아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오늘 제 아내를 잘 부탁드립니다, 귀부인들.”

그는 바로 헤센바이츠 공작이었다. 평소 가신들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꽤나 다정한 목소리였다.

“어머나.”

귀부인들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귀부인들은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며 허리를 숙였다.

“공작 각하, 그리고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제가 조금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엘리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림 같은 조합이었다.

아샤꽃처럼 아름다운 레이디와, 겨울을 형상화한 것처럼 칼 같은 인상의 미남이라니.

이엘리의 손을 놓아주며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제 아내가 여는 살롱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평소 과묵한 공작이 드물게 먼저 말을 거는 모습이라니, 놀랍다. 사람들은 귀를 종긋 세웠다.

“이번 살롱은 아마 귀부인들께도 상당히 신선하게 느껴지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한 자카리는 싱긋 미소 지었다.

빙해처럼 차가운 새파란 눈동자는, 그의 아내가 곁에 있을 때만은 봄 하늘처럼 부드럽게 풀어진다.

자카리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좋은 시간 보내셨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정중하게 목례했다.

공작의 목례에 귀부인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자카리의 행동은 아직 끝 지 않았다.

이엘리의 뺨에 짧게 키스한 그가 씩 눈웃음을 쳤다.

“이따 봐, 이엔.”

“응, 알았어.”

이 정도 키스는 이제 익숙하다는 것처럼, 여상한 얼굴이 된 이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귀부인들은 은밀히 시선을 교환했다. 공작 부부의 금슬이 좋다는 소 문은 확실히 사실이 맞았다.

“공작 각하께서 직접 공작 부인을 에스코트해 주시다니……”

“얼마나 두 분의 사이가 좋으시면 저럴까요?”

“그러게 말이예요.”

귀부인들은 눈을 굴렸다. 자카리는 그대로 살롱을 빠져나갔고, 귀부인 들과 이엘리만이 남았다.

“다들 앉으세요.”

이엘리는 나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귀부인들이 자리에  착석했다.

오늘의 공작 부인은 무척 아름다웠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아한 선의 드레스는 가느다란 체구를 부각시킨 다.

“다과와 차는 입맛에 맞으셨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엘리는 입을 열었다.

귀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엘리의 말에 답했다.

“무척 맛있었답니다.”

“맞아요, 다과와 차의 조합이 굉장히 훌륭하더라고요.”

“게다가 꽃잎이 물에서 활짝 피어나는 모습이 아름다워요.”

그래, 그래야지. 이엘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연녹색 눈동자가 매끄럽게 움직여 로렌 백작 부인을 향했다.

애써 표정 관리를하고 있긴 하지만, 속이 뒤집어진 그 모양새가 훤히 보인다.

“비록 모자라지만 귀부인들께서 이렇게 좋아해 주시니, 전 정말 기뻐 요.”

“아닙니다, 모자라다니요.”

“이렇게 큰 규모의 살롱은 지금껏 접해 본 적도 없어요.”

귀부인들의 말에 로렌 백작 부인은 어깨를 움찔했다.

이엘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달콤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차로 입술을 축인 이엘리는 나긋하게 속삭였다.

“다들 마음에 드신다니 정말 다행 이예요.”

“그러고 보니, 오늘 살롱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그때 로렌 백작 부인이 도전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살롱의 가치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수준, 그리고 살롱에서 행하는갖가지 행사들로 결정된다.

백작 부인이 두 눈을 싸늘하게 빛 냈다.

‘저 남부 계집은 아직 살롱을 열어 본 경험이 적어. 그러니까……”

어떻게든 빈틈만 보이면 이엘리를 깎아내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유롭게 웃을 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그것을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싸해진 분위기 위로 낭랑한 목소리 가 얹혔다.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귀부인들께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귀부인들에게 물었다.

“다들 취미 생활은 있으신가요?”

“취미 생활이요?”

“네. 그림을 그린다 든지, 글을 쓴다 든지, 노래를 부른다 든지……”

예상치 못한 발언에 귀부인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이엘리는 여전히 상냥한 표정이었다.

“혹은 그게 아니라도 괜찮아요. 그저 좋아하는 일이 있는지 물어보는 거예요.”

취미 생활. 그 말에 귀부인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물론 그들도 자수라든지 그림 같은 건 배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취미’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취미 생활은 보통 남자들이 하는 일 아닌가요?”

기가 차다는 얼굴로 백작 부인이 되물었다.

그랬다. 여성들은 안살림을 잘 맡아서 처리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였다.

여성이 자신의 취미나 생활에 집중 하는 건 주제넘은 일이라고 여겨진다.

“공작 각하께서 공작 부인께 여러 권한을 주신 것은 알지만…… 그래 도 취미 생활이라니요.”

이엘리는 말없이 로렌 백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보며, 백작 부인은 이엘리가 할 말이 없어 저러는 거라고 멋대로 착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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