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196)

113화

“그리고 자카리.”

희디흰 눈보라. 그리고 그보다 더 새하얀 은발.

뒷모습으로 남은 소년의 등 뒤로 붉은 핏줄기가 흩날린다.

새파란 눈동자 안에 담긴 감정이 그저 광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네가 어떤 존재라 해도 괜찮아.”

눈과 얼음으로 쌓아 올린, 오로지 자카리만이 홀로 남아 있었던 외로운 세계.

새파란 눈동자에 담긴 광기는 아마 그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절망이었을 터다. 그녀가 속삭였다.

“왜냐하면 난 끝까지 네 곁에 남아 있을 테니까.”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공작 부인이 자카리를 포기했던 때.

자카리가 세상 모든 것에 버림받아 외로운 눈동자를 하고 있던 바로 그 때.

세상이 따스하다는 것을 알려 줬더라면.

“……”

한숨을 쉰 이엘리는 천을 내리고 방을 빠져나갔다.

자카리의 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한 달 후, 초상화 방에 걸게 될 두 사람의 초상화가 완성되었다.

새로운 공작 부부의 초상화가 공작성에 걸린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들이 북부의 실질적인 주인임을 말하는 것이다.

“내 초상화가 여기에 걸리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자카리는 쓰게 웃었다. 이엘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 당연히 걸렸어 야 하는 거니까.”

“이엔.”

“오히려 너무 늦게 걸린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대답한 이엘리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머뭇거리던 자카리가 그 손을 꼭 맞잡았다.

온기가 전해져 온다. 이엘리가 그의 곁에 있다.

그 사실에 자카리는 가슴 깊이 안도감을 느꼈다.

14. 어느 오만함의 대가

늦봄도 천천히 흘러가고 이제 초여름이었다.

북부는 날씨가 서늘한 편이었기에 아직까지는 그리 덥지 않았다.

하지만 뺨을 스치는 바람은 이미 미지근해진지 오래였고, 머리 위로 내리찍는 햇빛 또한 점차 그 열기를 더해 갔다.

그리고 그 여름, 이엘리는 짧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살롱이 라.’

지금껏 북부 사교계의 중심은 로렌 백작 부인의 살롱이었다.

백작 부인은 황가의 신뢰와 헤센바이츠 공작의 외숙모라는 지위를 믿고 마음껏 귀부인들 사이에서 군림 해 왔다.

원래대로라면 북부의 안주인이 되어야 할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이 자리를 비운 지 오래이기에 더욱 그랬었다.

‘솔직히 난 살롱 자체에 별로 관심 이 없긴 하지만.’

하지만 이제 그녀는 제국 유일의 공작 부인이자 자카리의 아내였다.

그녀가 관심이 있건 관심이 없건 간에, 살롱은 귀부인들의 자존심이자 사교의 장이다.

또한 보통 그 지역에서 신분이 가 장 높은 귀부인은 레이디들이 지속적인 사교생활을 이룰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내곤했다.

‘귀부인의 의무이자 권리, 라.’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 로렌 백작 부인은 자신의 살롱이 가지고 있는 위치를 빼앗기지 않으려 아등바등할 것이다.

이엘리가 언제쯤 살롱을 열까, 호시탐탐 견제하고 있겠지.

‘이왕 살롱을 연다면, 그 살롱으로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든다든지. 뭔가 좋은 방법, 없나?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고민에 빠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로렌 백작 부인만큼은 어떻게든 하고 싶단 말이지.’

백작 부인와의 기나긴 악연을 떠올리던 그녀는 문득 창밖을 내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 비 오네?”

토독, 토도독. 가느다랗던 빗줄기는 금세 굵어졌다. 초여름 소나기였다.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자카리가 우산이 있었던가?”

어차피 마차를 타고 오긴 할 테지만, 현관까지 들어올 때 비에 젖을 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녀가 아니라도 휘하 사용인들이 우산 정도는 챙겨다 주겠지만, 그래도 역시 사람 마음이란……

“……좋아. 자카리를 데리러 가자.”

어차피 그녀가 계획하고 진행하고 있던 일이 어떻게 진척되는지를 확 인하기 위해서라도, 행정청에도 한

번 들를 생각이었다.

몸을 일으킨 이엘리는 밖으로 나섰다. 빗줄기가 꽤나 거셌다.

“세상에.”

솨아아_ 소리와 함께 비가 쏟아졌다.

빗물 냄새와 흙냄새가 뒤섞인 여름 특유의 소나기 냄새가 났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마차로 향했다.

우산을 받쳐 든 메리가 걱정스럽게 입을 연다.

“이렇게 비가 오시는데 행정청에 가시려고요?”

“응, 자카리는 우산이 없을 거 아니야.”

“하지만 사람을 따로 보내셔도 될 텐데.”

“내가 자카리를 보고 싶어서 그래.”

씩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자, 메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 되어 이엘리를 배웅해 주었다.

“그럼 다녀오세요, 마님.”

“……그렇게 순식간에 납득할 필요는 없어, 메리.”

“하지만 진심이실 테니까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냐? 그녀는 입 안으로 불평을 터뜨리며 마차에 몸을 실었다.

 행정청에 있던 자카리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초여름 소나기이긴 하지만, 하늘이 꽤나 어두운 것이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다.

‘어?’

자카리는 미간을 좁히며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마차 한 대가 비를 뚫고 달려와 행정청 앞에 섰다.

펼친 우산 아래로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색깔은 아샤꽃을 닮은 분홍색 이다.

“이엔?”

이렇게 비가 오는데 여기까지 찾아 왔단 말이야? 자카리는 황급히 밖으로 나섰다.

막 마차에서 몸을 내리던 이엘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색을 한 이엘리가 반가운 목소리 로 외쳤다.

“자카리!”

“네가 여기는 웬일이야?”

“비도 오니까, 우리 남편 모시러 왔지.”

이엘리는 생글생글 웃었다. 자카리는 그녀 손에서 우산을 빼앗아 들고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자카리, 어깨가 다 젖는데.”

“네가 젖는 것보다는 나아.”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데리러 온 의미가 없잖아.”

이엘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우산을 다시 자카리 쪽으로 밀었다. 행정관들이 밖으로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부인.”

“다들 반가워요.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자카리만 데리고 금방 돌아갈 생각 이었기에, 이엘리는 우산 아래에서 행정관들에게 질문했다.

“예. 서면으로도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눈을 가늘게 뜬 이엘리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행정관들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재차 묻는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굴 양식 사업에 관련하여 좀 궁금한 점이 있어서요.”

“굴 양식 사업이요?”

“네.”

이엘리의 곁에서 있던 자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엘리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행정관들이 보내 준 보고서들은 항상 잘 읽고 있어요. 그런데……”

“예, 공작 부인.”

“지원 사업에 선정된 사람들을 좀 더 까다롭게 추려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행정관들은 약간 긴장한 얼굴을 했다.

이엘리는 기본적으로 온화한 성격이었지만, 일에 있어서는 꼼꼼하고 가차 없는 성격이기도 했던 터다.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이 사업은 북부의 어민들을 지원 하기 위한 사업이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혹시 부정을 저질러 예산을 타 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알겠죠?”

이엘리는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말했다. 진지한 낯이 된 행정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살펴보겠습니다, 공작 부인.”

“고마워요.”

인사를 남긴 이엘리가 돌아섰다. 자카리는 잽싸게 그녀의 머리 위로 우산을 드리우며 물었다.

“혹시 뭔가 마음에 걸리는 문제라도 있었어?”

“아니, 그랬던 건 아니지만.”

그녀는 행정관들이 보내 왔던 서류를 머릿속으로 다시 떠올렸다. 이엘리는 차분하게 말했다.

“왠지 귀족들 중에서도 어떻게든 부정정적으로 한번 발을 걸치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응. 솔직히 굴을 양식해서 판매하 면 그 수익 자체는 무척 높을 거 아냐.”

속이 뽀얀 생굴은 제국을 통틀어 고급 음식으로 통했다.

수요가 많음에도 수량이 모자라 판매가 어려운 제품이기 때문에 일부러 축제를 기획하여 홍보하고, 예산 까지 지원해 가면서 양식을 장려한 것이었다.

“만약 양식이 성공한다면 양식 사업에 뛰어든 사람들은 큰 이득을 얻겠지. 게다가……”

마차에 몸을 실은 이엘리는 자카리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녀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작가에서 일정 예산도 지원 하니까, 만약 실패한다 한들 사업 당사자의 피해도 적어.”

“듣고 보니 그러네.”

“귀족들이 이 맛 좋은 먹잇감을 그대로 두고 볼까?”

자카리는 그녀의 말을 납득했다. 분명 귀족들도 이번 사업이 큰 이득 이 될 거라는 걸 알 터였다.

“뭐, 그래도 공작가의 눈이 무서워 서라도 웬만하면 끼어들지 않으려 하겠지만……”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상식이 있는 귀족 가문들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인 상식을 지닌 사회라면, 진상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주제를 모르는 가문은 어디든지 있는 법이니까.”

예를 들면 로렌 백작가라거나.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있어, 그녀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어쨌거나 로렌 백작가문은 자카리의 외가야.’

말조심하자,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으니.

그럼에도 자카리는 냉소적인 얼굴로그녀에게 말했다.

“로렌 백작가문을 말하는 거야?”

“……” 

“그렇게 말조심할 필요 없어, 나도 가장 먼저 떠오른 가문이 그쪽이었으니까.”

자카리는 웃으며 그녀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그녀를 달래 준 이후, 자카리가 여상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살롱 준비는 잘되가?”

“잘되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만간 열 계획이야.”

“넌 뭐든지 잘하니까 이번에도 괜찮을 거야.”

이엘리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음, 자카리는 가끔 날 너무 믿고 있는 것 같아.

웃으며 시선을 돌리던 이엘리는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자그만 동 물이 보였다.

“……강아지?”

“응?”

“저기, 빨리 마차 좀 세워 봐."

깜짝 놀란 이엘리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차가 멈추고, 그녀는 구르듯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거 봐, 강아지야."

이엘리는 안타까운 얼굴이 되어 강아지를 내려다보았다.

임신이라도 했는지, 배가 남산만큼 부푼 강아지는 그 체구가 조그마했다.

이엘리는 그 강아지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당겨 물었다.

‘닮았어.’

온통 젖고 흙탕물이 된 강아지의 털은 연한 갈색이었다.

자신의 전생에서 키웠던 강아지와 닮아서 유난히 마음이 갔다.

그 와중에 힘없이 꼬리를 흔들면서 도 자신의 손을 핥는것도 안쓰러웠다.

“얘, 데리고 갈래.”

“……”

이엘리는 조심스럽게 강아지를 안아들었다.

자카리는 미간을 좁힌 채,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또다. 이런 위화감.

이엘리가 다른 세상으로 훌쩍 떠나 버릴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

“이엔.”

“응?”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그녀가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다. 그녀는 자신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자카리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냐, 빨리 돌아가자.”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두 사람은 마차에 다시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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