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응?”
“그러니까, 신사님의 첫 번째 춤을 제게 허락해 주시겠어요?”
연녹색 눈동자가 미소를 머금고 반짝인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그는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꺼이.”
이엘리의 웃음소리가 붉은 하늘 위로 청량하게 흩어졌다.
공작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잡고 하얀 모래톱 위로 나섰다.
흰 모래 위로 그들이 남긴 발자국이 길게 늘어섰다.
바다는 푸른 혀를 내밀어 그들의 발자국을 천천히 핥아 내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꿈같은 하루를 끝내기에도 좋은 곡이네.”
“맞아.”
그렇게 대답한 자카리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은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파도 소리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음악에 박자를 맞추는 둘만의 춤이었으나, 그것으로도 족했다.
두 사람은 결 고운 흰 모래를 카펫 삼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대로 우리 둘만이 함께하는 세계로 떠났으면 좋겠어.”
“말도 안 돼, 자카리.”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웃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진심이었다.
인파가 모두 빠진 축제의 끝, 귓가를 쌉싸래하게 쓰다듬는 파도 소리와 끼룩대는 갈매기 소리만이 두 사람을 휩싸고 돌았다.
“하지만.”
춤의 끝. 자카리의 품에 나붓이 안긴 그녀는 자카리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너만 있다면 어디로든 떠나도 상관없을 것 같아.”
자카리는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세상에 단둘이 남겨진 듯한 느낌은, 정말 괜찮았다.
그렇게 축제는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홍보 효과는 톡톡히 있었던 것 같다.
이엘리는 축제의 결과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축제 이후 수많은 곳들이 거래를 요청했기에, 어렵지 않게 판매처를 뚫었다는 후문이었다.
풍어제는 아샤 축제와 더불어 북부의 새로운 명물로 자리 잡았다.
이엘리의 추진력에 힘입어 그녀가 주창했던 계획들은 모두 빠르게 진행되었다.
영지민을 직접 대면할 행정원들과 그들을 관리할 행정관들이 새로 뽑혔다.
그리고 이엘리는 굴 양식에 대해서 한 가지 대원칙을 정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 더미 너머 로 그녀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있지, 자카리.”
“응?”
“이건 명백히 어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헤센바이츠의 예산까지 사용하여 준비하는 거잖아.”
이엘리의 미간 위로 자잘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쿡쿡 웃음을 터뜨린 그가 미간을 꾹 눌렀다.
“이엔, 이렇게 인상 쓰면 미간에 주름 잡혀.”
“아, 이런.”
그녀가 황급히 표정을 풀었다. 손으로 제 미간을 꾹꾹 어루만지며 이엘리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튼,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른 귀족들이나 부유한 사람들은 양식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의자에 몸을 길게 기댔다. 펜 끝을 까닥거리던 이엘리는 그대로 자카리를 올려다본다.
“그래서 이 점을 확실하게 하고 싶은데……”
“이 일은 뭐든지 네게 일임할 테니까, 네가하고 싶은 대로 해.”
자카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내에 대한 애정을 제외하더라 도, 이엘리는 객관적으로 훌륭한 행 정가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공작령에 대해 커다란 애정을 가졌다.
“다만 내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말해. 알았지?”
“응, 그럴게.”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쳤다. 그녀는 새삼 자카리에게 고마운 마음 이 들었다.
보통은 집안 살림과 내정 정도만을 맡기 때문에, 한 가문의 안주인에게 이 정도의 자율성을 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북부의 가신들도 좀 놀랐지.’
현재 그녀가 처리하고 있는 건 공작성의 안살림뿐 아니라, 북부에 직접 영향을 주는 행정 관련 문제도 있지 않나.
원래대로라면 자카리의 영역임에 도, 그는 기꺼이 제 아내를 받아들였다.
“아 참, 예산 관련해서 나도 좀 생각해 봤는데."
책상 너머에 비스듬히 서 있던 자카리가 이엘리의 손에서 부드럽게 서류를 받아 들었다.
펜을 쥔 그가 예산안이 기록되어 있은 서류를 들여다보았고, 몇 가지 메모를 남긴 후 다시 돌려주었다.
“이런 식으로 배분하면 좀 더 효율 적일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아, 정말이네?”
이엘리는 흐뭇하게 웃었다.
“언제나 고마워, 자카리.”
“아냐, 오히려 내가 네 곁에 있는 게 기쁜걸.”
자카리는 말끔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이엘리는 가슴속이 간지러워졌다.
음, 네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내가 엄청나게 설렌다는 건…… 역시 넌 모르겠지?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렴.”
“주인님, 그리고 안주인 마님.”
그때 메리가 이엘리와 자카리를 불렸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이엘리는 잠시 후 수줍게 웃었다.
안주인 마님이라니. 새로이 바뀐 호칭이 간질거리면서도 기뻤다.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니?”
“두 분의 초상화를 그릴 화가가 도착했습니다.”
“아, 벌써?”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새로운 공작 부부의 초상 화를 그리기로 한 날이다.
“그렇다고 하네. 그러니까 이제 일은 그만하고……”
자카리는 능숙한 동작으로 이엘리의 손을 들어 올렸다. 쪽, 손등 위 로 짧은 키스가 내려앉는다.
“나가자, 이엔.”
“……”
아니 지금 메리가 옆에서 보고 있잖아!
이엘리는 뺨을 붉히면서 입술을 달싹였지만 자카리는 오히려 아무렇지 도 않은 듯했고, 곁에서 있던 메리 또한 그저 익숙하다는 얼굴이었다.
‘공작님과 안주인 마님께서 저러시는 건 뭐,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메리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공작성 사람들은 공작 부부의 다정한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이엘리는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만 부끄러운 거야? 왜 다들 이렇게 평온한 건데?’
이엘리는 속으로 잔뜩 투덜거렸다. 뚱한 얼굴이 된 그녀는 화가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헤센바이츠 공작가에는 오래된 전통이 있다.
새로이 공작 부부가 탄생하면 초상화 방에 초상화를 그려서 걸어 두는 것이다. 초상화 방이라.
그녀는 예전 일을 생각하며 약간 감회에 빠졌다.
‘예전에 전대 공작님과 자카리가 그곳에서 대판 싸웠었지.’
그러고 보면 테론이 죽은 지도 벌 써 몇 달이 흘렀다.
그 당시의 상처는 아직 남아 있었 지만, 그럼에도 이엘리와 자카리는 이제 전대 공작을 떠올리며 약간 웃을 정도의 여유는 되찾았다.
“오늘은 스케치만 먼저 하겠습니다.”
깐깐한 눈빛의 화가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자카리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더니 말했다.
“이엔, 너부터 먼저 그려.”
“그럴까? 하지만 네가 좀 기다리게 되잖아.”
“아냐, 괜찮아. 난 초상화 방에 가 있을 테니까.”
“초상화 방?”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분홍색 정수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다 끝나고 불러 줘, 알았지?”
“응, 알았어.”
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빙긋 눈웃음을 친 자카리가 응접실을 나섰다.
이엘리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사각사각 연필이 화폭 위를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카리가 초상화 방이라니……’
이엘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카리는 초상화 방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자카리가 스스로 먼저 초상화 방에 방문한다고? 그때 화가의 엄격한 목소리가 이엘리를 불렀다.
“공작 부인, 살짝 미소를 지어 주십시오.”
“아, 그래요.”
찔끔한 이엘리는 애써 입술 끝을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내내 자카리를 향해 있었다.
스케치만 하는 것뿐인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화가가 ‘끝났다’라고 선언하자마자,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종종걸음으로 자카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자카리?”
“아, 이엔.”
자카리는 놀라지도 않고 태연한 얼굴로 등 뒤를 돌아본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곁에 다가갔다.
“화가가 널 찾아.”
“그래.”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네?”
“꼭 그런 건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주제에 표정은 깊게 가라앉아 있다.
자카리의 시선은 두 초상화에 못 박힌 것처럼 남아 있었다.
이엘리는 자카리 바로 옆에 서, 그가 바라보는 초상화를 보았다.
“……전대 공작님과 공작 부인이시 네.”
그는 대답 대신 비스듬히 시선을 기울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초상화를 느릿하게 훑어 내린다.
자카리의 표정은 차분했다. 자카리는 약간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참 이상하지.”
“자카리.”
“예전에는 두 분이 그저 밉기만 했는데…… 이젠.”
초상화를 바라보는 자카리의 눈동자는 여전히 복잡해 보였다. 그대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의 부모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자카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화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
“응?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했다. 자카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이미 그녀에게 너무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이엘리에게는 항상 밝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데, 어째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가자, 이엔.”
자카리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난 좀 더 있다 갈게.”
“왜?”
“그게, 난 두 분께 할 말이 좀 있거든."
“두 분?”
자카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이엘리는 생글거리며 그를 방 밖으로 밀어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그저 매끄러운 미소만을 만면에 걸 뿐, 그녀는 전혀 대답해 줄 기미가 없어 보였다.
자카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엘리는 초상화 앞으로 걸어갔다. 크게 숨을 삼킨다.
“두 분, 자카리를 낳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연녹색 눈동자가 선대 공작 부부를 바라보았다.
고요한 방 안에 이엘리의 목소리만이 울린다.
“자카리를 힘들게 한 건 나빴어요.”
오랫동안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선대 공작 부부의 초상화 앞에서 이엘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옳지 못한 일이예요, 그 애의 잘못도 아니었잖아요.”
언제나 원망스럽고 안쓰러웠었다. 비뚤어진 원망과 사랑 속에서 갈피 조차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자카리가 가여웠다.
하지만 선대 공작 부부를 아예 이 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건 그저.......
“그래도…… 두 분께서도 모두 처음이었을 테니까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은 미리 학습하여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은룡의 순수한 피를 타고난 자카리는 특별한 아이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게 되는 그런 아이.
“그래도 제가 자카리가 어떻게든 웃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할 테니까……”
사위는 고요하다. 마치 스스로에게 맹세라도 하는 것처럼, 이엘리는 힘을 주어서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지켜봐 주세요. 알았죠?”
마지막으로 살짝 미소 지은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방 한구석에 천을 덮어쓴 채 히 침묵하는 그림이 있었다.
이엘리는 천을 걷었다. 햇빛 아래로 이엘리가 사랑하는 소년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