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196)

111 화

“이리 와, 이엔. 잘못하면 멀어져.”

“아, 응,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대부분의 레이디들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푸른 리본을 달았다.

공작 부인이 가장 먼저 이 지역의 축제와 풍습을 존중한다는 뜻으로 그 옷을 입었기에, 다 같은 의미로 입은 것이었다.

“레이디들이 다 하얀 꽃 같아, 다들 정말 예뻐.”

“그래?”

자카리는 부러 미간을 좁혀 보였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장난스레 답한다.

“난 너밖에 안 보여서 잘 모르겠는데.”

“……정말, 못 살아.”

이엘리는 뺨을 붉히면서 미소를 지었다.

자카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말을 잇는다.

“난 진심인데?”

“으음, 믿지 못하겠다는 소리는 아니었어.”

이엘리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바닷가의 맑은 공기가 파도처럼 밀려 들었다.

물고기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그녀는 짠 내음이 섞인 바닷바람을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상쾌한 공기가 기껍기만 하다.

내키는 대로 축제를 구경하며 쏘다니던 그녀가 자리에 멈췄다.

“자카리, 이리와 봐. 인형극이야!”

그녀가 멈춰 선 장소에서는 인형극이 한창이었다.

“저 인형, 아샤 요정 같은데.”

인형을 관찰하던 이엘리는 눈동자를 크게 떴다.

분홍색 머리칼, 녹안을 가진 아리따운 아가씨 인형은 확실히 봄의 요정인 아샤였다.

은빛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청년 인형은 아마 은룡일터였다.

“아무래도 아샤 요정과 은룡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그러게. 이런 인형극은 나도 처음 보는데.”

자카리는 슬쩍 시선을 기울였다. 공작 부부는 흥미로운 얼굴이 되어 인형극을 관람했다.

인형극의 내용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달콤한 사랑 이야기였다.

하지만 두 주인공이 아샤 요정과 은룡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건국 전설의 내용과 달랐기 때문이다.

“건국 전설에서는 아샤 요정이 황가의 회색 기사를 선택한 것처럼 말하곤 하잖아.”

“그런데 이 연극에서는 아샤 요정이 은룡을 선택했네?”

“솔직히 건국 전설이 편파적인 거지. 아샤 요정이 누구와 함께하기로 했는지, 어떻게 알아?”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 도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전설이다 보니, 여러 가지 변용된 이야기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또한 흔한 사랑 이야기는 그만큼 인기가 높기에 흔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 인형들, 꽤 귀여운 것 같아.”

“갖고 싶어?”

“아니요, 구해다 달라는 소리는 아니었습니다만.”

당연하게 묻는 말에 이엘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은룡의 품에 안기는 아샤는 인형이었음에도 굉장히 사랑스러웠다.

공작 부부를 시작으로, 사람들은 점차 모여들었다.

어느새 인형극이 끝날 때쯤이 되자 꽤 많은 군중들이 인형극을 관람하고 있었다.

“관객 여러분, 관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공작 부부는 인형극이 끝날 때까지 극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극이 끝난 이후 그들은 돌리는 모 자 안에 기쁘게 은화를 던져 넣었다.

인형극을 한 남자는 관중들에게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 보였다.

“아, 배고파.”

인형극을 다 보자 이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자카리는 눈치 빠르게 그녀에게 물었다.

“한번 가판대 쪽으로 가 볼까? 네가 개발한 음식들이 잘 판매되고 있나 볼 겸.”

자카리의 제안에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까 페터가 말해 주긴 했지만, 실제로 판매되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

두 사람은 출출한 뱃속을 붙잡고 가판대 쪽으로 걸어갔다.

“해산물 튀김 한 컵이 단돈 2셀!”

“얼큰한 스튜도 있습니다!”

활기찬 음성들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튀김이 가득 든 종이컵을 손에 든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작게 마련한 노점상에서 팔팔 끓인 스튜를 먹고 있는 사람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솔직히 저건 스튜가 아니라 매운 탕에 가까운 음식이지만……’

이엘리는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고 보면, 매운탕에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으면 최고인데.

나중에 자카리와 술이라도 한잔해 볼까.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우선 오징어 튀김을 샀다.

“먹을 거지?”

“물론.”

자카리는 이엘리가 건네는 바삭거리는 새우튀김을 받아 들었다.

아마 이것이 튀김옷이라 했나. 고소한 기름 맛과 튀김옷, 그리고 탱글탱글한 해산물의 조화는 훌륭했 고, 씹는 식감도 좋았다.

“이거 진짜 맛있어.”

“그렇지? 역시 튀김에는 튀김옷을 입혀야 한다니까.”

이엘리는 양어깨에 힘을 주면서 우쭐거렸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저 멀리에서 껍질을 벗긴 새우를 층층이 꽂아 버터를 발라 구운 꼬치 요리를 팔고 있었다.

공작 부부는 당연하다는 양 새우꼬치를 두 개 구입해 각자 입에 물었고, 이번엔 가판대를 둘러보기 시 작했다.

“앗, 저거 예쁘다.”

“그럼 사.”

“저기, 예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매하는 건 합리적인 소비가 아니라고.”

장신구들을 구경하던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카리는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헤센바이츠의 공작 부인은 합리적인 소비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런 거야?”

“당연히 그런 거야.”

당연히, 라는 말에 힘을 주던 자카리는 문득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길을 잡아끄는 게 있었다.

“자카리?”

자카리는 좌판에 성큼성큼 다가갔다.

 고만고만한 장신구가 가득 올라온 나무 가판대 위로, 분홍색 장식 수 정을 이용해 만든 아샤꽃 모양 장 신구가 있었다.

크라바트를 장식하는 핀이었다.

‘자카리가 자기 물건에 관심을 보이는 건 거의 처음 보네.’

이엘리는 고개를 쏙 내밀어 자카리가 바라보는 것을 함께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게 마음에 들어?”

이엘리가 물었다. 곧게 내밀어진 손가락 끝에 놓인 장식 핀.

축제에서 판매되는 물건답게 다소 조잡해 보인다.

저급한 재질의 분홍 수정을 박아 세공한 꽃잎들의 모양은 제각각이었다.

세공한 사람이 그리 솜씨가 있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투박한 모양이 정감이 갔다.

‘‘아니, 그냥.”

자카리는 애써 시선을 떼어 냈다. 두 눈을 가늘게 치뜬 이엘리는 냉큼 장식 핀을 집어 들었다.

“헤센바이츠의 공작 각하께서는 합리적인 소비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 도 돼.”

장식 핀을 구매한 그녀가 자카리에게 핀을 건네주었다.

“고마워.”

핀을 받아 든 자카리가 씩 미소했다. 분홍색 수정 꽃잎이 순간 햇살을 반사하여 반짝 빛났다.

“그런데 네가 이런 물건에 관심을 가지다니, 웬일이야?”

“그냥.”

나와 닮아서. 자카리는 문득 튀어 나오려는 대답을 삼켰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실은 이렇게 모자라 고 하찮으니까. 꽃잎 표면에 미끄러 지는 햇살이 눈이 부신다.

“자카리."

그런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내가 만약 네 곁에 없다고 해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자카리는 대번 정색했다. 어휴, 만 약이라는 가정도 못 하니.

이엘리는 샐쭉한 얼굴이 되었다.

“만약이라고 했잖아, 만약.”

이엘리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자카리의 손을 오므려 장식 핀을 쥐여 주면서, 생긋 미소한다.

“나 대신 그게 널 지켜 줄 거야.”

“……이엔.”

“그러니까 소중히 간직해, 알았지?”

이엘리는 웃는 얼굴 그대로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그것을 들여다보던 자카리는 장식 핀을 손수건에 감싸 소중하게 챙겨 넣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그는 숨을 삼켰다.

‘나의 이엘리.’

무채색이었던 그의 세상에서 홀로 빛나는 아름다운 사람. 그에게 빛과 색을 돌려준 사람.

너의 곧은 눈동자가 날 그 안에 담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심장이 뛰는지 너는 아마 모를 거야.

“……네가 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기뻐.”

“다행이네, 나도 네 옆에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하거든.”

그녀는 다정하게 답했다. 공작 부부는 축제의 풍경 안에 스며들어, 축제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  *  *

축제의 마지막은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로 장식되었다.

긴 뿔고둥 나팔 소리와 함께 제사는 시작되었고, 황금색 술로 장식된 커다란 깃발이 펄럭이며 노을진 하늘에 제멋대로 궤적을 그렸다.

“이 제사가 축제의 끝이야.”

“그래?”

“응. 그 이후에는 음악을 연주하고, 그 안에 기원하는 마음을 실어 보낸대.”

이엘리는 호기심이 가득 찬 눈초리로 제사를 치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손에 황금색 술이 달린 장식대를 든 사제는 화려하게 장식된 제단 위 로 올라섰다.

축문을 외고, 장식대를 흔들며 사 제의 춤을 춘다.

차랑차랑 머리에 꽂은 장식이 흔들 린다. 그 광경은 굉장히 엄숙해 보였다.

“……멋있네.”

이엘리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자카리에게 소곤거렸다. 자카리는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이엔. 네가 이렇게나 가까운데…… 숨이 막히도록 멀게 느껴져.’

자카리는 찰나, 깊은 막막함을 느꼈다.

너를 내 곁에 둔 것 자체가 내게 걸맞지 않는 과분함을 누리는 것 같아.

넌 이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닌 좀 더 고귀하고, 먼 세계의 존재 같아서.

‘언젠가 네가 날 떠나겠노라 말한다면.. 난 어떡하지.'

자카리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비이성적인 두려움이라는 것은 그 자신도 잘 안다.

하지만 가끔씩, 그녀를 볼 때마다 그녀가 이상하게 멀게 느껴지는 이런 기이한 기분. 그는 숨을 삼켰다.

‘단순히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일까.’

그와 동시에 사제의 춤이 끝났다.

이엘리가 흘끗 자카리를 돌아보며 그를 불렀다.

“자카리?”

“……”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이엘리는 환하게 웃었다.

자카리는 제 아내의 부름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웃는 그녀의 얼굴이 심장을 쿡 찌 르는 것 같아서. 그녀는 당연하게 그의 손을 감아쥔다.

“저기 봐, 바다가 엄청 예뻐.”

결 고운 저녁놀이 만물을 발그스름 하게 물들였다.

연한 다홍빛에서부터 불타오르는 주홍빛, 끝내는 붉은 금빛으로 물들 어 아련한 선을 그리는 수평선.

이엘리는 버릇처럼 손목에 감긴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푸른 리본은 붉은빛에 담뿍 젖어 보드랍게 그녀의 손가락에 감겨든다.

“네가 더 예뻐.”

자카리는 약간 잠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눈 안에 모습을 새기듯, 자카리는 자신의 아가씨를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나비처럼 팔랑대는 하얀 드레스 자락. 가느다란 손목에 맨 파란 리본.

“이엔.”

“응.”

그녀는 순순히 그의 부름에 대답한다.

파란 장식 리본을 얽어 일부만을

맣아 내린 분홍색 머리카락. 연녹색 눈동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세계였고, 목숨이었던. 소중한 이.

“사랑해."

느닷없이 툭 튀어나온 진심에, 이엘리의 입술이 그림 같은 호선을 그렸다.

이엘리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연녹색 시선이 천천히 흐른다. 흡사 흐르는 물처럼, 거스를 수조차 없었다.

“나도.”

그 달콤한 속삭임에 자카리는 넋을 놓았다.

어느새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축제의 종료를 알리는 흥겨운 음악이었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문득 물었다.

“음악도, 함께 춤을 춰 줄 사랑하는 사람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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