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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108/196)

108화

“그렇게 해서 종자를 채집한 후에 키우는 거야.”

이엘리는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평소 좋아하던 프로그램은 아니었지 만, 어민들이 굴 양식을 하는 모습 은 흥미로웠기에 계속 지켜보고 있던 기억이 났다.

리포터가 호들갑스럽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것을 보며 굳이 저렇게 해야 하나,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모로 감사한 일이었다.

“아마 어민들과 상의해서 진행하면 더 괜찮을 거라고 봐. 한번 찾아가야 겠어.”

“좋은 생각이네.”

그녀의 조심스러운 말을 들은 자카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차분히 말한다.

“정말로 굴 양식이 가능하다면 크게 도움이 될 테니까.”

“그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이엘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자카리는 기웃이 시선을 기울였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응?”

“넌 그런 건 어떻게 알아?”

그의 목소리는 약간 가라앉아 있었다.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전부터 자신의 목덜미를 간질이는 희미한 위화감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은 잘 떠올리지 못하잖아.”

“자카리?”

“가끔 보면 넌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아.”

순간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플로랑테 섬에 방문했을 때가 문득 떠오른다.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그녀의 가녀린 등.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던.

“그도 그럴게, 누구도 생각해 내 지 못하는 것들을 거침없이 생각해 내니까.”

자카리는 무릎에 올려 두었던 왼손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그의 호흡이 약간 불안정해진다.

“이엔, 네가 말하고 싶지 않은 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자카리는 가만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달칵. 포크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다.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생길 때마다, 너와 멀어지는 것 같아서.”

“……” 

“난 그게 좀 두려워.”

이엘리는 침묵했다. 자카리의 눈동자가 그녀를 간절히 본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물론 그녀가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있었다. 환생했다는 것을 어떻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자카리, 이것 하나만큼은 약속할 수 있어.”

“뭔데?”

“난 절대로 널 떠나지 않아.”

이엘리는 확고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카리는 허를 찔린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녀가 웃었다.

“난 이 공작령이 번영했으면 좋겠 고, 우리가 함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이엔.”

“난 네 아내고, 북부의 안주인이자 헤센바이츠의 공작 부인이니까.”

무릎 위로 단정하게 손을 올린 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이왕 북부의 안주인이 되었으니, 난 최선을 다해 모든 일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는 숨을 삼켰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준다. 푸른 시선이 잘게 떨렸다.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난 정확히는 몰라.”

그렇게 말하며 이엘리는 약한 죄책감을 느꼈다.

이엘리의 행동을 보면서 분명, 자카리도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을 터다.

그녀는 일부러 자카리의 위화감을 외면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고마워.”

자카리는 그제야 약간 안도한 얼굴을 했다.

이엘리는 그런 그를 보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그렇다면.’

내게는 비밀이 있어. 이제는 오래된 꿈처럼 느껴지는 전생의 기억이야.

그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 이야기 이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그 이야기도 너에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정말 나도 참.’

이엘리는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멀게만 느껴지는 전생의 그리움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자카리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

그저 주어진 현재를 살아가야 할 뿐이었다.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

‘답답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밝힐 수 없는 오래된 비밀. 이엘리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 * *

이엘리가 이번 일을 진행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양식이란 개념은 사실 제국에서는 그리 흔한 개념이 아니었다.

어업 자체는 성행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물고기나 어패류를 키운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직접 어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로 결정하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그도 그럴 법하지.’

무언가를 키우는 것은 동물과 식물에 한정되었다.

아무래도 그 방법이 농업이나 축산 업에 비해 까다로운 까닭이리라.

번성한 다른 산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업이 덜 발달한 이유였다.

“공작 부인께서 직접 어민들을 만 나 보실 필요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마저 그렇게 말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엘리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가장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갔다.

또한 아내의 의견에 공작도 동의했다.

“다들 처음 뵈어요. 이엘리 헤센바이츠예요.”

그리하여 이엘리는 어민들을 직접 찾아갔다.

무려 광대한 북부를 통치하는 공작 부부가 자신들을 만나러 온 것에 어 민들은 첫 번째로 놀랐고, 공작 부부의 소탈한 태도에 두 번 놀랐다.

“아마 오늘 저희가 찾아온 이유는 다른 행정원들을 통해서 미리 들으셨을 것 같아요.”

이엘리는 인재가 있다면 적극 활용 해야 한다는, 지극히 실용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현실적인 행정 문제는 행정원들을 파견하여 미리 설명해 뒀다. 이엘리가 말했다.

“오늘은 어민분들에게 양식 사업에 대해 전반적인 의견을 듣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공작 부인이 한낱 어민들을 향해 존대를 하는 것 자체가 무척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이들은 그녀가 직접 부리는 사람들이 아닌, 북부를 떠받드는 시민들이 아닌가.

'시민들이 없다면 귀족들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걸.’

그녀는 기본적으로 최대한 북부의 사람들은 존중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귀족들은 시민에게 권리를 위임 받아 책임과 권위를 가지지 않았나.

‘게다가 직접적으로 고용한 관계, 혹은 가신 관계가 아니잖아.’

하지만 이엘리의 행동은 귀족 전체의 행동을 봤을 때, 다소 특이한 행동임은 맞았고, 그 때문에 어민들이

긴장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엘리는 부러 웃었다.

“다들 좀 긴장하신 것 같지만,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니, 그것이……”

“전 여러분들이 어떤 이야기든지 자유롭게 제게 해 주시기를 바라거든요.”

이엘리는 살갑게 말했다.

공작 부인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어 민들과 소통하는 것을 주전하지 않았고, 공작은 공작 부인이 하는 일 에 참견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한발 물러나 있었다.

“자카리, 뭔가 할 말은?”

“없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공작은 그저 아내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여 줄 따름이었다.

그리고 공작의 그런 신뢰는, 자연 히 다른 사람들도 공작 부인에게 믿음을 갖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면 귀 기울여 들을게요.”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어민 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진지했다.

저렇게 귀한 분께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건가.

그녀를 보던 어민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공작 부인.”

“네, 말씀하세요.”

“양식 사업에 지원해 주시는 것부터 정말 감사합니다.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꽤나 젊은 어민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자카리는 은근슬쩍 눈썹을 찡그렸다.

그냥 다른 남자가 이엘리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런 자카리를 흘겨보았다.

‘자카리, 끼어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면서 그는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어민은 조심스레 말했다.

“사업은 공작 부인께서 미리 기획 해주신 게 있어서, 무사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이에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엘리가 제공한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가리비나 굴 껍데기들을 철사에 꿰 어 바다에 내려보내는 것.

그렇게 굴의 유생을 채집하여 양식을 시작하는 것이다.

북부의 유능한 행정원들은 어민들 과 협조하여 차근차근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 부탁을 드려도 될 지 ……”

“부탁이요? 네, 뭐든지 말씀해 보세요."

그녀의 태도는 여전히 살가웠다.

어민은 잠시 우물쭈물하는 것 같더니, 결심한 것처럼 말했다.

“양식 사업은 저희 힘으로 진행할 수 있지만, 판매처를 뚫는 게 난관입니다.”

“흠, 판매처라 하면……”

“상품이 있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 도 없지 않습니까.”

다소 도전적인 발언이었다. 그 말에 이엘리는 물론이고 자리에  모인 이들도 모두 술렁거렸다.

“판매를 해야 하는데, 북부는 모피 같은 물건은 유명하지만 어업은 규모가 작아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듣던 이엘리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이엘리가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요?"

“저희의 상품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엘리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저 사람, 본능적으로 판매의 기본을 알고 있는 사람이네.

이엘리가 제 의견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어민의 목소리에 점차 힘이 실렸다.

“어떤 방식이든지 좋습니다. 전 북부의 어업이 좀 더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어민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이엘리는 어느새 어민의 이야기에 집중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공작 부인께서는 공작령을 자유롭 게 오갈 수 있는 교통수단을 계획하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맞아요. 그런 생각은하고 있어요.”

“그 교통수단이 실제로 실용화가 된다면, 판매는 더욱 쉬워질 겁니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는 지, 어민의 목소리는 열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상품의 판매 중 중요한 요소는 운송이니까요.”

“운송 체계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계셨던 건가요?”

이엘리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저렇게 다양한 시각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은, 저 사람이 북부의 어 업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었단 뜻이다.

이엘리에게는 저런 사람이 필요했다.

“양식 사업이 성공하고 운송 문제 도 해결된다면, 남는 건 상품의 홍 보이겠군요.”

이엘리는 명쾌하게 결론을 정리해 냈다. 상품의 홍보. 그 단어에 사람들의 입이 꾹 다물렸다.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는 알지만,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는 제대로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다면 기존에 있던 축제를 이용하는 건 어떨까요?”

뺨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던 이엘리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확 쏠린다.

“이미 북부에는 ‘아샤 축제’라는 대규모 축제를 성공적으로 자리 잡게 한 경험이 있잖아요.”

이엘리는 전생의 기억을 곰곰이 곱 씹으며 입을 열었다.

도청이나 시청에서 각 지역을 발전 시키기 위해, 지역색을 가진 축제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물론 온갖 축제들이 난립하여 눈먼 예산을 낭비할 수도 있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그런 문제는 이엘리가 살 피면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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