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장기적으로 공작령에 이 기관이 필 요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기존 사람들이 과한 업무를 감내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이 기관을 운영하는 행정 관분들은 따로 채용할 생각이예요.”
처음에는 이엘리의 말을 흘려듣던 행정관들이었지만, 점점 들어 볼수록 그녀의 의견이 현실성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오랫동안 현장에서 굴러 왔던 행정 관들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업무를 분담할 사람들이 더 뽑힌다 면야……”
“인원이 더 늘어난다면 업무를 진행하는 것 자체는 괜찮을 테니까요.”
행정관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러던 중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행정관 한 명이 질문했다.
“그렇다면 행정청의 업무와 새로운 기관의 업무는 분리되는 겁니까?”
“일부는 업무를 공유하고, 필요 없는 부분은 분리될 거예요.”
그녀는 친절한 목소리로 답했다. 설명을 이어 나가는 그녀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행정청은 새로운 기관의 상위 기관이 될 테니까요.”
“그렇다는 말씀은……”
“또한 행정청이 맡고 있던 과도한 업무의 일부 또한 새 기관이 맡아 가져갈 거 랍니다.”
이엘리의 말에 행정관들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업무를 새로이 분장하여 줄여 준다는데 환영하지 않을 리 없다.
행정관들의 표정을 가만히 관찰하던 그녀는 낭랑한 어조로 칭찬을 건넸다.
“지금껏 여러분은 굉장히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 오셨어요.”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자카리는 약간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저 능구렁이 같은 행정관들을 능숙하게 대할 줄이야.
그녀는 기본적으로 사람과 대화하고 설득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전 그저 여러분들의 일을 약간 나누고, 영지민들과 조금 더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란답니다.”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대하며, 잘못된 점을 질책하기보다는 그들의 노고에 공감부터 해 주 지 않나.
이후 당근을 내밀면서 새로운 기관에 대한 필요성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아차, 그리고.”
이엘리는 행정관들의 분위기가 호의적으로 변한 걸 틈타,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행정청으로 오다 보니, 공작령이 상당히 넓다는 생각을 좀 했거든요.”
“예, 그 말씀은 맞습니다만……”
북부 전체를 지배하는 헤센바이츠 공작령은 제국에서도 가장 넓은 영 지 중 하나였다.
그 넓이만을 따지자면 제도 리펜이 있는 리펜베르크보다도 훨씬 크다. 행정관들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공작령을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 체계를 만드는 건 어떨까요?”
“교통 체계라고요?”
“네. 시간에 맞춰서 주기적으로 공작령을 횡단하는 마차를 마련한다든 지, 하는 식으로요.”
이엘리가 생각하고 있는 건 바로 버스 시스템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말을 규칙적으로 교체하면서 운행 하면 그리 무리가 가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번 제안은 새로운 기관을 만들자는 것보다 훨씬 더 호응이 좋았다.
행정관들은 진지한 얼굴로 이엘리의 말을 경청하고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생활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공작 부인.”
“과찬이세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 다니 제가 훨씬 더 기쁘네요.”
이엘리는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입씨름을 해야 할까 봐 걱정했는데, 지금 반응을 보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다행이다. 회의실 안 사람들은 훈훈하게 웃었다.
회의가 모두 끝났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문밖으로 빠져나왔고, 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엔, 네가 그렇게 유능할 줄은 몰랐어.”
“세상에. 나와 함께 산 시간이 얼 만데, 내 유능함을 지금까지 몰랐단 말이야?”
장난스럽게 대답한 이엘리가 씩 눈 웃음을 쳤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자카리가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밖에서 점심이라도 먹고 갈래?”
“바로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야?”
“그럼, 내가 여기까지 왜 따라왔겠어.”
자카리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귓전에 입술을 붙인 채 작게 소곤거린다.
“너랑 데이트하려고 왔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발언이 시네요, 신사님.”
“그런가요, 레이디?”
두 사람은 나란히 키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엘리를 마차에 먼저 태워 주며 그가 물었다.
“그래서 점심은 뭐가 좋을까?”
“여기 굴 요리를 잘하는 곳이 있는 데, 가 볼래?”
“갈래!”
생각해 보면 북해가 가까운데 해산 물 요리는 그리 자주 먹지 않았던 것 같다.
신선한 해산물을 떠올리며, 이엘리는 입에 군침에 도는 걸 느꼈다.
뺨을 간지럽히는 바람을 느끼며 묻는다.
“레스토랑도 이미 알아 둔 거야?”
“물론이지.”
“옛날 생각나네, 우리 아샤 축제 갔을 때도 네가 카페를 미리 알아 왔잖아.”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이엘리가 말했다. 그녀가 호기심 어린 낯이 되어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그때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인데, 내가 단 음식을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거야 당연히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지.”
“뭐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는 대답에, 이엘리는 까르르 웃었다. 그녀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질문한다.
“나랑 놀러 가려고 미리 정보를 모 아 본 거야?”
“이엔.”
“응?”
자신을 부르는 진지한 목소리에 이엘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카리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좋아하는 여자와 처음으로 놀러 나가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는 남자는 없어.”
“……아, 그런 거야?”
“그런 거지.”
두 사람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이엘리는 작게 웃었다.
지금 자카리가 자신을 배려해 주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공작 부부가 함께 영지를 시찰한다는 것은, 이엘리가 북부의 안주인임을 확고히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자카리를 빤히 보던 그녀가 말했다.
“자카리.”
“응?”
“고마워.”
진심을 담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무엇이 고맙냐고 묻는 대신, 자카리는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득 끌어안았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품에 안긴 채 창밖을 잠시 응시했다. 그러던 바로 그때.
“..어라?”
이엘리의 입술 사이로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겁한 그녀가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저, 저거 도대체 뭐야!”
“뭐가?”
자카리가 홀끗 창밖을 내다본다. 그의 눈이 커졌다.
둘은 나란히 경악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
“……”
그들이 보고 있는 건 카페 로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카페 로랑은 아니었다.
“내 눈…… 지금 이상한 거 아니 지?”
“아니야…… 내 눈에도 지금 똑똑 히 보이니까……”
자카리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페 로랑 바로 옆에 심어져 있는 키가 큰 가로수 위쪽으로 천으로 만든 현수막이 휘날리고 있었다.
현수막에는 커다란 글자로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공작 각하와 공작 부인께서 직접 방문하셔서 차를 마신 유일한 카페, 카페 로랑.’
‘공작성의 티타임에 디저트를 공 급한 유일한 카페입니다, 한번 방문 해 보세요!’
이엘리와 자카리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현수막을 손가락질하며 질 문했다.
“자카리 너, 저거 알고 있었어?”
“당연히 몰랐지! 알고 있었으면 당장에..!”
언성을 높이던 자카리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긴, 저런 홍보용 현수막에 공작가가 일일이 간섭하는 것도 우습다.
이엘리도 남편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숨을 삼켰다.
“아, 저게 도대체 언제 적 일인데 현수막까지 만들어서 걸어 두고 있담……”
창피해서 죽을 것 같다. 차라리 모르고 지냈다면 좋았을 텐데. 그가 이엘리를 애써 다독였다.
“그,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 엔 네가 사랑받는 공작 부인이라는 뜻이니까……?”
“으응, 고마워……”
하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엘리는 흘끔 창문 밖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어느새 마차는 한참 동안 달려, 카페 로랑의 모습은 이제 시야에서 멀 어진 상태가 되었다.
‘그렇지만…… 조금 기쁘기는 하네.’
크게 숨을 들이쉬며 이엘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거나 자신과 자카리가 북부에서 신뢰받는 영주 부부가 아니었더 라면, 일반인들이 그들을 그렇게 친
근하게 여기지도 못했을 것 아닌가.
‘하지만……’
역시 좀 부끄럽단 말이지. 이엘리는 다시 고개를 폭 숙였다.
자카리가 고개를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춘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풋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공작령에서 오랜 기간 살아왔고, 결혼 생활도 오래 지속했던 이엘리 자신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사
실이 하나 있었다.
헤센바이츠 공작령은 북해(北海)라 고 불리는 바닷가가 잇닿아 있는 지역이었다.
다만 온전히 그녀 탓만은 아니다. 북부는 광활했고, 보통 공작가는 야만족들과 마수가 침입하는 북쪽 설 원과 산맥을 주로 경계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북해는 평화로웠다.
“그래서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뿐이야. 내 탓이 아니라고.”
이엘리는 고급 생굴 요리를 앞에 둔 채,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자카리가 웃었다.
“그래, 이엔.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야.”
“그렇게 말한다면야, 가 아니야. 사실이라고.”
그녀는 포크를 까닥이며 당당히 턱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생굴 위로 레몬즙을 듬뿍 뿌리며 말한다.
“자카리, 나 하나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우리 아가씨, 또 무슨 재미있는 생각을 하신 건가요?”
자카리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있잖아. 굴은 고급 음식이지?”
“그렇지.”
자카리는 알쏭달쏭한 낯이었지만 그녀의 대답에 성실하게 답해 주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고급 굴을 대량 생산하여 저렴한 가격에 판매할 수 있다면 어떨까?”
“굴을 대량 생산한다고?”
“응.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어민들의 살림에 좀 도움이 되지 않을 까?”
이엘리는 실은 굴 요리를 먹는 내내 전생에서 보았던 프로그램을 떠 올리고 있었다.
예전 텔레비전으로 방영했던 ‘일곱시 내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치떴다.
‘사실 난 전혀 관심 없는 프로그램 이긴 했지만.’
자취방에서 저녁밥을 먹다가 우연 히 틀어 놨던 프로그램에서 굴 양식을 하는 어민들이 나왔었다.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자카리는 어리둥절해했다.
“굴을 어떻게 대량생산을 하는데?”
“그러니까…… 양식을 하는 거지.”
“양식이라고?”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전생에 살던 한국에서는 양식 덕분에 굴이 고급 음식이 아니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굴을 잔뜩 먹고 가던 기억이 난다.
“굴을 양식할 수가 있어?”
“아."
이엘리는 두 눈을 깜빡였다. 그렇구나. 아직 이쪽 세계에서는 바다 생물을 키운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 한 것 같았다.
그녀는 최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일곱 시 내 고향에서는 분명.
“내가 알기로 철사에 가리비나 굴 따위의 껍데기를 꿰어서 바다 바닥에 내리면 되는데.”
고마워요, 일곱 시 내 고향! 그녀는 대충 흘리듯 봤던 프로그램에게 속으로 찬사를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