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이엘리는 검지를 곧게 세워 두어 번 흔들어 댔다.
그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카리를 보았다.
“난 그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영지민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우리의 의무니까.”
“네 말이 맞아.”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연녹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방법이었다.
행정관들을 파견하여 영지민들의 생활을 살피는 건 한계가 있다.
민원을 직접 듣는 게 가장 효율적 일 터.
“좋은 생각이네.”
“진짜?”
“그럼.”
그녀가 환한 얼굴로 웃었다. 자카리는 그녀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소곤거린다.
“다만 무리는 하지 마, 알았지?”
“무리라고 할 것도 없는걸,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넌 뭐든지 너무 열심히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자카리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음, 넌 날 너무 걱정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이엘리는 그 말을 꿀꺽 삼켰다. 대신 손을 뻗어 자카리의 손을 꼭 움켜쥐고는 생글거린다.
“그것보다 자카리, 나 있잖아. 공작 령을 한번 돌아보려고.”
“공작령을? 왜?”
“아까 내가 말한 기관을 만들려면, 행정관들부터 가장 먼저 만나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아서.”
역시 제 아내의 행동력만큼은 알아 줘야 한다.
쓰게 웃은 자카리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무리하지 말라니까?”
“절대 무리 아니야. 난 이제 헤센바이츠의 공작 부인이잖아?”
그녀가 열정적인 눈으로 입을 열었다.
숫제 자카리의 손까지 꼭 맞잡은 그녀가 말을 잇는다.
“한 번쯤 영지를 시찰할 때도 되었잖아? 그러니까……”
“좋아.”
“역시 자카리야! 나 잘하고 올게!”
신이 난 이엘리가 즐거운 표정이 되어 미소했다.
하지만 자카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신 나랑 같이 가.”
“……으응?”
웃는 얼굴 그대로 이엘리는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녀는 어리둥절 해졌다.
“왜 너랑 같이 가?”
“영지 시찰을 한다며?”
“응, 그럴 거긴 한데……”
“그러니까 같이 가.”
아니 대화가 지금 빙글빙글 돌고 있잖아.
이엘리는 그를 빤히 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 혼자 보내는 건 싫거든. 걱정스러워.”
“아니, 걱정할 게 뭐가 있어? 공작령 이상으로 치안이 좋은 도시가 어 디 있다고.”
기가 막힌 그녀가 자카리에게 되물었다.
자카리는 세상 근심을 모두 끌어안은 얼굴로 답했다.
“하지만 예전에 깡패들에게 끌려갔 던 적도 있잖아?”
“뭐어?”
“그때의 일도 있으니까, 난 널 내 눈 밖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아.”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이엘리는 황망해졌다.
그때는 아샤 축제 기간이어서 뜨내기도 많았고, 호위 기사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한참 어렸을 때의 일이 아닌가.
“저기 자카리,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는 건 역시 좀……”
“그래도 안 돼. 영지 시찰을 하려 면 나와 같이 가.”
하지만 눈앞의 자카리가 너무 완고했다.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킨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같이 간다고 한들 뭐, 큰 문제는 없을 테지.
그 말을 들은 자카리의 얼굴이 환 하게 밝아진다.
“그럼 우리 이거 데이트하는 거야?”
“……일하러 가는 거라니까?”
“겸사겸사 생각하면 되지.”
솔직히 저걸 노린 게 아닐까. 의심 스러운 눈초리로 이엘리는 자카리를 곁눈질했으나, 자카리는 여전히 생글생글 미소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결국, 그 소년 같은 미소에 이엘리도 함께 웃어 버렸다.
그리고 이튿날. 두 사람은 마차를 탄 채 공작령을 한번 돌아보았다.
봄은 한껏 무르익어 이제 늦봄에 가까웠다.
활짝 피어있었던 아샤꽃잎은 이제 모조리 졌고, 대신 짙은 초록빛으로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이 살랑살랑 제 가지를 흔들었다.
이엘리는 웃는 낯으로 창밖을 보았다.
“날씨가 많이 따스해졌네.”
“그러게.”
창에 팔을 기댄 채 자카리가 희미 하게 웃었다.
이엘리는 그런 자카리를 흘끔 곁눈질로 본다.
‘역시 내 남편이지만 잘생겼어.’
그녀는 흐뭇하게 웃었다. 문득 그 들이 처음 만났던 시절, 단둘이 놀러 갔던 아샤 축제가 떠오른다.
그때 단둘이서 카페에 갔었고, 자카리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시켜 늘어놨었다.
‘그리고 그때 뭔가 재밌는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이엘리는 턱을 된 채 살짝 자카리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래,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했던가.
'으음…… 내 취향을 완벽히 저격하는 미모는 기본에, 몸매 좋고, 성격 좋고, 엄청 부자인 거?’
신이 난 그녀가 늘어놓았던 남편의 조건, 그때 그의 충격 받은 얼굴은 엄청나게 귀여웠었다.
'저거, 너잖아.’
‘…뭐?’
'너 잘생겼고, 다정하고, 엄청 부자잖아.’
그렇게 말해 주자 사르륵 풀어지던 그 표정까지.
그녀는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자카리가 그녀를 힐끗 응시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가 무척 수상하다는 얼굴로 질문을 한다.
“왜 그렇게 웃어?”
“응? 아니,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가 미간을 좁혔으나 이엘리는 그저 어깨를 으쓱여 보일 따름이었다.
“듣지 않는 편이 좋을걸?”
“……뭐, 네 표정을 보고 있으니까 그런 것 같다.”
자카리는 뚱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어렸을 때의 자카리 모습을 다시 떠올리던 그녀는 다시 아련한 눈빛이 되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마차가 멈췄다. 자카리가 마차 밖으로 내려갔다.
“자, 내리시죠. 레이디.”
“감사합니다, 신사분.”
자카리가 정중하게 손을 뻗었다. 예법 교본에서나 볼 법한 단정한 에스코트 자세를 바라보며, 이엘리가 눈매를 곱게 접었다.
장난스러운 말에 똑같은 말투로 응수하며 그와 손을 맞잡는다.
“여기가 행정청이야?”
“응. 대부분의 행정관들은 여기서 일하거든.”
그녀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행정청을 올려다보았다.
단정하게 단장한 건물이 그녀를 마주 본다.
“굉장히 넓네.”
“여기서 근무하는 행정관만 백 명이 넘으니까.”
“그렇게나 많아?”
“응. 그리고 네가 원하는 그 기관들을 설치하려면 새로 행정관을 더 뽑아야 하겠지.”
자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의 말을 듣던 이엘리는 대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다.
“저기, 예산은 괜찮아?"
“예산?”
햇살을 머금어 새파란 색유리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이엘리를 돌아본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안심해, 이엔.”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애정이 가득 차 있었다.
“행정관을 몇백 명쯤 더 뽑는다고 해도, 공작가의 예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까.”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이엘리는 그제야 약간 안도했다.
뭐, 자카리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별문제 없는 거겠지.
자카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오는 것도 꽤 멀었지, 아마?”
“뭐, 마차가 없으면 움직이기 좀 불편한 거리이긴 하지.”
자카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엘리는 그 자리에 멈칫했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자카리, 영지민들이 영지를 오갈 땐 어떻게 해?”
“글쎄, 그건……”
자카리는 말문이 막혔다. 그 또한 여상하게 지나갔을 뿐,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영지민들이 개인 마차나 말을 가 지고 있을 리는 없는데……”
그녀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면 전생에 그녀가 살던 대한 민국은 교통편이 훌륭한 나라였다.
지하철은 물론이고 버스 노선도 제대로 정비되어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그럼 이 넓은 공작령을 걸어서 이 동하는 거야?”
“……아마 그렇겠지?”
이건 좀 불합리한 것 같은데. 이엘리는 다시 고민에 빠졌고, 자카리는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영지민들이 공작령 내를 이동하는 수단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문제 아닌가.
‘온전히 영지민들의 입장에서 생각 하지 않으면 떠올릴 수 없는 고민인 데.’
자카리는 흘끗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새하얀 이마 위로 옅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는 지금 당장 급한 일을 떠올렸다.
“이엔,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응?”
“우선은 행정관들부터 만나야지. 그렇지?”
“아, 맞아. 그렇지.”
그녀가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행정관들이 모여 있는 중앙 회의실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중앙 회의실로 걸어 들어갔고, 그가 그녀의 곁을 따랐다. 이엘리는 약간 긴장한 낯이었다.
‘사실 이런 자리는 처음인데. 나 잘할 수 있을까?’
이엘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우 선 먼저 도전이라도 하는 게 낫겠지.
자리에 대기하던 행정관들이 분분 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이엘리 헤센바이츠입니다."
행정관들은 공작령의 정식 관리였 으므로 그녀는 공대를 사용했다. 행정관들도 고개를 숙였다.
“공작 각하, 그리고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반가워요. 다들 앉으시겠어요?”
이엘리는 가볍게 손짓을하며 먼저 자리에 앉았다.
자카리는 입을 여는 대신 묵묵히 제 아내의 곁을 지킴으로써, 오늘의
회의를 주관하는 건 그녀임을 알렸다. 행정관들도 자리에 앉는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을 찾아뵌 이유는, 새로운 기관을 하나 개설하고 싶어서예요.”
목을 가다듬은 이엘리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행정관들의 낯 이 호기심에 가득 찼다.
“목표는 영지민들을 위한 기관을 만드는 거랍니다.”
“영지민들을 위한 기관이라니……”
“글쎄요, 그런 기관이 꼭 필요할까요?”
행정관들의 분위기는 딱히 그리 호 의적이지는 않았다.
사실 이엘리가 꽤 인기 높은 안주인이었기에 그나마 이 정도의 유한 반응이 돌아온 것이다.
개중 젊은 행정관이 손을 들며 물었다.
“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됩니까?”
“물론이예요."
어차피 이엘리도 이 정도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가 허리를 곧게 펴고 입을 연다.
“주택과 노인, 그리고 어린아이등 복지에 관한 분야를 신설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던 행정관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굳혔다.
이엘리의 곁에 앉아 있던 자카리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눈빛으로 윽박지른다.
‘지금 당장 이엘리의 말에 집중하지 않으면, 그 뒷감당은 알아서 해 야 할 것이다.’
명백한 뜻이 담겨 있는 눈빛에 행정관들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행정관들의 눈빛에 총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이엘리는 머릿속으로 정리해 왔던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애를 썼다.
“영지민들의 민원을 직접 듣고 전 달할 수 있도록 행정원들을 따로 배치할 생각이고요.”
그렇게 말하던 이엘리는 과거 그녀가 보았던 동사무소의 직원들을 떠 올렸다.
내내 피곤한 얼굴로 민원인들을 상대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들. 공무원의 비애가 저런 건가 했는데.
“물론 지금도 여러분들의 업무가 과중하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므로 이엘리는 말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