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96)

105 화

“미안해, 네가 갈아입을 옷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

“내 옷이 없다니?”

아니, 요리를 해 먹을 식재료까지 모두 구비해 둔 주제에 내 옷은 왜 없는 거야? 이엘리는 조금 황망해졌

다.

자카리는 진심으로 난감한 얼굴이었다. 그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설명을 했다.

“그게, 이곳에 너와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

“조금 더 준비를 한 다음에 데려오고 싶었는데, 어제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민망한 얼굴이 된 그가 뺨을 긁적였다. 타월로 몸을 가린 이엘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괜찮아.”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데……”

“무슨 소리야?”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턱짓으로 옷장을 가리켰다.

그가 왜 저렇게 당황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옷 자체는 많잖아?”

“그게, 내 셔츠랑 바지밖에 없는데?”

“그것들을 입으면 되지?”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으나, 이엘리는 오히려 말짱한 낯이다.

“이리 줘 봐. 그리고 잠시 넌 나가 있고.”

자카리의 손에서 옷들을 빼앗은 이엘리가 자카리의 등을 밀어냈다.

어차피 이미 서로의 몸은 모두 본 사이인데 어째서 나가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카리는 순순히 방

밖에 나갔다.

“이제 들어와도 돼.”

잠시 후,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카리는 살짝 문을 열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

자카리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옷을 차려입은 그녀가 자신만만 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별로 안 이상하지?”

자카리는 약간 혼란해졌다. 아니, 어떻게 고작 셔츠를 접어서 차려 입었을 뿐인데 저렇게 예쁠 수가 있지?

물론 이엔이 예쁜 건 알지만…… 이엘리는 소매를 팔랑팔랑 흔들며 눈웃음쳤다.

“옷이 좀 크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이엘리의 바지는 너무 품과 통이 컸는지 던져둔 상태였다.

소매는 한껏 접어 올렸고, 맵시 있게 허리를 동여맸다.

품이 큰 셔츠 자락이 무릎 언저리 까지 닿아 마치 원피스를 차려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다만 하나 아쉬운 건, 밖에 나가 기에는 어렵다는 점이려나.”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웃었다. 자카리는 그런 그녀를 보며 심장이 미 친 듯이 뛰는 걸 느꼈다.

“……이상해?”

자카리의 표정이 영 이상했는지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상한 게 아니라.”

너무 예뻐서. 차마 그 말은 꺼내지 못하고 자카리는 말을 되삼켰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 그녀를 다시 쓰러뜨리고 싶었지만, 아까 전에 ‘오늘은 이걸로 끝’이라는 약속은 지켜야 한다.

“그건 그렇고 자카리.”

“응?”

“이제 슬슬 공작성으로 돌아가 봐 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속내는 전혀 모르는 이엘리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의 곁을 알짱거릴 뿐이었다.

자카리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욕망을 억눌렀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잇는다.

“단둘이 보내는 시간도 좋지만 이 젠 그만 가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아니, 난 평생 단둘이서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자카리는 간신히 그 대답을 억눌러냈다.

“아냐, 내일까지만 있자.”

“그렇게 오래 공작성을 비워도 돼?”

“그 정도는 집사도 혼자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의 얼굴이 지나치게 단호해서 이엘리는 어리둥절 해지고 말았다.

그가 흘끗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를 제 품 안에 끌어안고 다정한 목소리로 어른다.

“그리고 너도, 그 차림으로는 어차피 공작성에 돌아갈 수 없을 거 아냐?”

“아, 그건 그렇지.”

그녀는 살짝 뺨을 붉혔다. 몸에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다니.

자카리 외에는 절대 보여 줄 수 없는 차림이었다.

자카리는 당연하다는 양 이엘리의 이마와 뺨에 키스를 쏟아부으며 말했다.

“내가 따로 공작성에 연락을 넣어서 갈아입을 옷도 보내 달라고 할 테니까.”

“연락은 어떻게 보내는데?”

“전서구가 있어.”

아니, 전서구까지 마련해 뒀으면서 내가 갈아입을 옷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단 말이야? 이엘리는 좀 억울해지고 말았다.

그때 자카리의 손이 살금살금 그녀의 목 언저리를 어루만졌다.

“자카리, 안 돼. 알지?”

“……알지.”

그녀가 인상을 쓰자, 아쉬운 얼굴이 된 자카리가 손을 떼어 냈다.

그가 마치 기죽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순간 이엘리는 미안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카리는 이엘리와의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니까 그 하루 동안은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았다는 소리다.

자정이 지나자마자 자카리는 이엘리를 덮쳤고, 결국 이엘리는 공작성에 돌아가기 직전까지 그에게 실컷 시달려야만 했다.

나중에 그녀를 맞이한 집사가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안주인 마님.”

“응, 조금……”

이엘리의 눈 밑에 퀭하게 그림자가 져 있었다.

곁에서 있는 자카리가 반들반들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과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집사는 부부의 금슬에 기뻐하면서도 안주인 마님을 애도했다.

아무래도 마님께서는 당분간 밤마다 즐거우면서도 피로한 밤을 보내 셔야 하실 것 같다.

그리고 집사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 맞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사이좋은 부부 인 데다, 실제로 부부다운 신혼 생 활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기에 자카

리는 이엘리를 절대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공작 부부의 신혼 생활은 평온하고 달콤하기보다는, 격렬하고 격정적인 쪽에 가까웠다.

“……이엔.”

“으응, 자카리……”

공작 부부는 며칠간의 시간을 통해 상대방을 좀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공작 부부가 함께 보낸 시간은 짙고 농밀했으며, 행복으로 가득 차있었다.

“자카리, 하, 잠시만……”

이엘리는 진저리를 쳤다. 그녀는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며 칭얼거렸다.

“아, 오늘은 완전히 녹초야. 나 힘 ...."

“……정말로 힘들어?”

자카리는 아쉬운 얼굴로 물어 왔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아무래도 합방이 늦어진 만큼, 그 들의 합방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진하고 격렬했으니까. 또한 그는 아내의 몸이 가장 소중했다.

‘정말로 힘들다면 그만둬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자카리는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연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와 시선을 맞추던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이 번에도 또 저런 눈빛이네.

‘몇 번이나 저 시선에 넘어갔었지.’

오늘은 피곤해서 그만해야겠다, 생각하다가도 저 표정을 볼 때마다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집요하게 그녀의 시선을 따라붙는다.

“으음……”

이엘리는 손을 들어서 자카리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매끄러운 뺨 위로 하얀 손가락이 스쳐 지난다. 그 감촉 하나가 이상 하리 만치 유혹적이었다.

그녀는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끝나면……”

“응?”

자카리의 목소리는 어느새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매를 접으며 그녀는 매혹적으로 웃는다.

“내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줄 거야?”

“……물론이지.”

천천히 움직이던 그녀의 손가락은 이제 자카리의 입술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작게 속삭인다.

“다정하게 안아 줄 거야?”

“언제나 했던 그대로.”

조금 쉰 듯한 목소리가 이엘리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녀의 긴 속눈썹 이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나, 끝나면…… 너무너무 지쳐서.”

그녀는 보란듯이 속눈썹을 내리 깔았다. 잠시 후, 도발적인 연녹색 시선이 그를 똑바로 본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자카리는 살짝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는 언제나 관계가 끝난 후, 이엘리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도 일부러 저렇게 소곤거리는 것까지도 자카리의 애를 끓게했다.

“이엔.”

자카리의 목소리가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엘리는 자카리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저런 목소리를 내는 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성공적으로 자카리를 미치 게 만들었다.

“그리고 달콤한 간식이 먹고 싶을 거야. 분명해.”

“그렇다면 당연히……”

“먹여 줄 거지?”

그의 말을 중간에 톡 끊어 버린 이엘리가 나른하게 질문을 던졌다. 아직 말은 끝나지 않았다.

“……입으로?”

“물론이지. 네 말이면 뭐든지 할 거야.”

자카리는 담백하게 패배를 선언했다.

그 말에 이엘리는 쌕 눈웃음을 쳤 다. 승리자의 미소였다.

“그렇다면 좋아.”

오만한 여신처럼 이엘리는 선언했다.

자카리는 제 여신의 품에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 이엘리는 손을 들어 자카리의 목을 휘감아 끌어 안았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갔다.

 이엘리는 달콤한 밀월에만 집중하지는 않았다.

공작 부인의 일에도 소홀해지고 싶지 않았다.

명백한 안주인이 된 그녀는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공작성의 사람들도 그녀의 행보를 즐겁게 받아들였다.

마님이 계실 때와 계시지 않을 때의 분위기가 무척 달랐던 것이다.

“요새 성내의 분위기가 무척 밝지 않아?”

“맞아, 안주인 마님이 계시지 않았을 때를 이제 상상하기가 어려울 정도야.”

하녀들은 즐거운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안주인이 된 이엘리는 여러 가지 일을 해냈다.

내정을 돌보는 한편, 영지민들의 생활이 좀 더 편안해질 수 있는 방법을 골몰했다.

이엘리가 떠올린 것은 영지민들이 직접 민원을 넣고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동사무소 같은?’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만약 영지를 구역별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동사무소 비슷한 것을 설 치한다면, 영지민의 생활이 훨씬 더 편해지지 않을까.

이엘리는 골똘히 생각을 거듭했다.

‘영지민 출신 행정관들을 뽑아 일을 맡기면, 영지민들의 불편함도 더 빨리 이해할 수 있겠지.’

이엘리가 영지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창구는 남겨 둘 생각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자카리를 돌아본다.

“그래서 말인데.”

“응?”

자카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엘리를 마주 보았다.

이엘리는 눈매를 쌩긋 접으며 웃었다.

“새로운 기관을 설치하고 싶은데, 안 될까?”

연녹색 눈동자가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든지 해. 자카리는 무심코 그렇게 말할 뻔했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해도 되지 만, 무슨 기관인데?”

“음…… 그러니까 말이지. 이런 기관 괜찮을 것 같지 않아?”

그녀가 빙글 돌아앉아 자카리를 마주 본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더니 거침없이 말했다.

“영지민들의 민원을 처리해 주는 기관을 만드는 거야.”

“영지민들의 민원을?”

“응. 세금 문제도 그렇고, 영지민들의 복지 문제도 전반적으로 살필 수 있게……”

이엘리는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저 그녀를 사랑스럽게만 바라보던 자카리의 눈빛이 문득 진지해졌다.

이엘리의 설명이 일부 타당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좋은 생각이 아닌가.

“솔직히 대부분의 귀족들이 영지민들의 생활에는 별 관심 없는 거 알 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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