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화
분홍색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 입을 맞추던 그가 작게 소곤거렸다.
“너는……”
나직한 목소리 안쪽에는 채 해갈되지 못한 갈증과 갈망이 가득 차 있다. 그는 설핏 미소했다.
“지금의 내 기분 모르겠지.”
깜빡. 자카리의 눈이 꼭 한 번 감 겼다 뜨였다.
들뜬 맹수를 보는 것처럼 선정적인 그 눈동자.
“……그게 무슨 소리야?”
이엘리가 질문을 던지는 바로 그 순간, 자카리는 깊숙이 그녀에게 키스했다.
짙고 농밀한 키스였다. 달아오른 그녀의 낯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그건 말이지.”
조도가 낮은 불빛 아래로 새파란 시선만이 선명하게 빛났다.
낮은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내가 지금 너에게 미쳐 있다는 뜻.”
자카리의 입술에 맺혀 있는 미소가 어찌나 선명한지.
그는 다시 한 번 이엘리에게 키스했다.
자카리는 자신이 이렇게 소유욕이 강한 인간인지를 처음 알았다.
그녀의 모든 것을 갖고 싶었다. 머리카락 한올주고 싶지 않다, 그 누구에게도.
‘이엔이 정말로 내 아내라니.’
지금껏 그녀를 단 하나의 가족이자 삶의 의미로 생각해 왔던 자카리였지만, 오늘 일은 그에게도 무척 특별했다.
거의 남매와도 같았던 두 사람이 명백하게 서로를 이성으로서 받아들 인다.
‘……이엔.’
이런 키스 또한 거의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단 하나뿐인 삶의 동반자 였지만, 명백히 성적인 의미로 상대방을 마주 본 적은 없었다.
이엘리가 제 키스 하나에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행 복했다.
그녀의 달아오른 낯에, 그는 이성 이 뿌리째 뽑혀 나가는 기분을 느낀 다.
“하아, 하아, 자, 자카리. 나……”
거칠고 격렬한 키스 끝에 이엘리는 못 견디겠다는 것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꽃분홍색으로 물든 양 뺨. 발그레한 입술. 나, 이런 감각을 어떻게 지금까지 모른 채 살아올 수 있었나.
“……네가 너무 좋아, 이엔.”
“으응……”
고작 키스 뿐이었는데도 이엘리는 반쯤 혼몽한 시선을 하고 있다. 자카리는 힘을 주어 말했다.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긴 검지가 이엘리의 입술을 어루만진다.
입술의 모양을 덧그리며 내려온 그 손가락이 천천히 이엘리의 뺨을 간지럽힌다.
잠시 후, 자카리는 허리를 숙였다. 그가 쪽, 입술을 맞추면서 속삭인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
자카리는 이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무지 그녀에게 시선을 뗄 수 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이 기분.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린다.
파드득 온몸을 떨면서, 젖은 속눈 씹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엘리.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지.
“저, 저기……?”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되었다 여겼는지, 자카리의 품에 파묻혀 있던 이엘리가 작게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것마저 사랑스러워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그는 비스듬히 그녀 위로 몸을 굽혔다.
“이엔, 네가 말했지.”
이엘리를 침대 위에 눕혀 놓은 채 자카리는 작게 소곤거렸다.
그녀의 몸 위로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자카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나 이엘리에게 소유욕을 느끼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나 짙은 감정은 처음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녀는 약간 울상이 되어있었다.
‘아, 그 말…… 이렇게까지 효과가 엄청날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못했는 걸…..’
그녀는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새 파란 눈동자가 이엘리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끔씩 그를 보며 맹수 같다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를 향하는 시선은 무시무시했다.
“자, 자카리?”
그녀는 우선 조그맣게 자카리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자카리는 약간 쉰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마음의 준비가 됐다고 한쪽은 바 로 너야.”
“어, 그, 그건,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 된 거 맞지?”
자카리는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엘리는 간신히 그가 이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았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그녀의 의사를 한 번 더 물어보는 자카리가 너무나 그다웠다.
“응, 됐어.”
이엘리는 침대에 누운 채 손을 뻗어 자카리의 뺨을 쓸어내렸다.
보드라운 손끝이 뺨에 닿자, 자카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상하다. 그저 손가락이 뺨 위를 스치는 것뿐인데도, 이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자카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기에 젖은 이엘리의 속눈썹 아래로, 그가 드리운 그늘을 삼켜 어둡게 빛나는 연녹색 눈동자가 자 리하고 있었다.
자카리는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
제 위로 떨어지는 그림자가 좀 더 짙어진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금방 후회했다.
‘괘, 괜히 감았어.’
눈을 감으니 숨소리며 체온, 맞닿는 살갗의 감촉 따위가 너무나도 적나라했다. 자카리의 손가락이 이렇게 따뜻하고 길었던가?
꼭 감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검을 오래 쥔 단단한 손가락이 그녀의 몸에 와 닿았다.
잠시 후, 그가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엔.”
“……으응……”
“눈 좀 떠 봐.”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시트 위로 엉망으로 흩어졌다.
“시, 싫어, 부끄럽……”
자카리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목에 스치는 기분이 적나라하다.
그녀의 얼굴에 키스가 쏟아졌다.
비처럼 촉촉한 키스였다.
그렇게 달콤한 밤이 무르익었다.
* * *
아마 깜빡 잠이 든 것 같다. 이엘리는 멍하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아, 그랬지. 우리 어젯밤에.’
이엘리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제의 기억은 토막토막 끊긴 채 머릿속을 맴돌았다.
기억은 희미했지만 단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어젯밤은 완벽하게 행복했다는 것.
“……”
이엘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어제 달콤했던 밤을 지나치게 누린 탓이었는지, 지금의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기분 좋은 피로감이 전신을 짓누른 채다.
“……몸은 좀 어때?”
아마 그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나 보다.
기민하게 잠에서 깨어난 자카리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반쯤 졸음에 취해 있는 이엘리와는 다르게 자카리의 목소리는 단정하기만 하다.
“괜찮…… 아.”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가 자카리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를 얽어매듯 끌어안은 단단한 팔. 조각 같은 근육이 빈틈없이 짜 인 가슴에 고개를 기댄다.
온기가 몸 구석구석으로 번진다.
“조금 더 자.”
자카리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다시 잠의 계곡으로 떨어졌다.
그 이후, 이엘리가 잠에서 깨어난 때는 거의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었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주변을 둘러본다.
자카리는 자리에 없었다. 다만 맛 있는 냄새가 공기 중에 떠돌고 있었다.
“……어라.”
이엘리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달칵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다정한 인사가 들렸다.
“잘 잤어?”
“자카리.”
이엘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쟁반이 하나 들려 있었다.
“이게 뭐야?”
“네 아침 식사야.”
“뭐?”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자카리는 웃으며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닭고기 수프네?”
“응. 아무래도 어제 좀 힘들었을 것 같아서.”
“……”
그래, 힘들긴 했지. 이엘리는 애정을 담아 자카리를 살짝 흘겨보다가, 이후 놀라서 입을 연다.
“그런데 이 닭고기 수프는 네가 직 접 만든 거야?”
“물론이지.”
이엘리는 새삼스럽게 쟁반 위의 음식들을 내려다보았다.
두툼한 닭고기가 풍족하게 들어간 수프는 사실, 수프라기보다는 스튜의 형태에 더 가까웠다.
이엘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
아, 창피해. 자카리는 신사답게 모르는 척해 주는 센스를 발휘해 가만히 있었고, 그녀는 애써 말을 돌렸다.
“요리도 할 줄 알아?”
“야영 생활을 몇 년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익히게 돼.”
“……그렇구나.”
이엘리는 숙연해지고 말았다. 하긴 자카리가 살아온 인생이 힘들긴 했지.
이건 전대 공작님이 잘못했어. 그녀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며,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계속 전투식량을 먹다 보면 역시 물리는 법이니까.”
“그래, 내가 미안……”
“뭘 미안해, 사실을 말한 것뿐인 데.”
자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그 손짓이 어린 동생 다루듯 다정하다.
‘내가 자기를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게 불만이라면서.’
오히려 날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건 자카리 아니야? 이엘리는 미간을 좁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차피 말해 봤자 전혀 아니라고 하겠지. 그리고 뭐…… 어린 동생과 관계까지 맺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이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요리 까지 하다니. 힘들지는 않았어?”
“전혀. 네가 먹을 거잖아.”
가슴이 찡해진다. 아, 내 남편은 말 한 마디도 너무 예쁘게 하네. 이엘리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도 침대까지 가져다줄 필요는 없었는데.”
“아니야, 이건 내가 너에게 꼭 한 번쯤은 해 주고 싶었던 일이거든.”
응?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무릎에 쟁반을 놓아주던 그의 귀 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네 아침 식사를 침대에서 챙겨 주고 싶었어. 그래서 그런 거니까.”
“……”
내 남편은 어쩜 이렇게 귀엽지. 그녀의 시선이 감동에 젖어든다.
자카리가 이엘리를 재촉했다.
“얼른 먹어 봐, 간은 내가 대충 보 긴 했는데……”
자카리의 열렬한 시선에 못 이겨 이엘리는 수프를 한술 떴다.
자카리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붙는 것이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하여 이엘리는 한 가지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앗, 뜨거!”
급하게 수프를 먹다 보니 입 안을 데였다.
눈물이 찔끔 난다. 자카리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이런, 괜찮아?"
“응, 괜찮긴 한데……”
아, 너무 창피해…… 어린애도 아니고 뜨거워서 숟가락을 놓칠 줄이 야! 그때 자카리가 쟁반 위를 나뒹 구는 숟가락을 주워 들었다.
수프를 커다랗게 한 숟갈 뜬 자카리가 호호 입김을 분다.
“……”
이거 설마 그거니? 먹여 주는 그거? 그녀가 자카리를 곁눈질했다.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자, 아 해.”
“……”
정석적인 연인의 대화이긴 한데, 내가 자카리에게 이런 대사를 듣게 될 줄은 몰랐지.
지금까지 어린 동생 같았던 내 남편이 언제 이렇게 자라선. 뺨을 붉히면서도 이엘리는 입을 벌렸다.
“맛있어.”
오물거리던 그녀가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었다.
간은 딱 맞았고, 건더기는 부드럽게 익었다.
“그래?”
자카리는 안도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엘리는 한참 열심히 수프를 먹었 고, 자카리는 그 모습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약간 허기가 가신 이엘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카리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넌 안 먹어?”
머쓱하게 숟가락을 내려놓은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