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겉옷을 벗은 자카리가 그녀의 몸에 그것을 둘러 주었다.
이엘리는 옷깃을 여미며 그를 보았다.
“추우면 내게 안겨도 되는데.”
“음흉해.”
“앗, 그건 좀 너무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자카리가 소리를 내어 웃는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품에 제 몸을 기댔다. 자카리는 이엘리를 품에 당 겨 안았다.
평화로운 풍경 속 바다를 보던 이엘리는 약간 감회에 젖었다.
‘나의 전생.’
지금은 기억이 많이 희미해졌지만, 한때 그녀는 한국에서 살았었다.
취직 스트레스에 고민하는 평범한 여대생.
전생에서나 봤던 바다를 다시 보게 되니 자꾸만 과거의 생각이 떠오른 다.
‘난 어째서 이 세계에서 태어나게 된 걸까?’
보통 죽은 이후에 환생한다고 하면 살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닌가?
물론 내가 이쪽 세상에 환생한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왜 하필이면 이쪽의 세계였을까?
“이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때 자카리가 고개를 쏙 내밀며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이엘리는 어설픈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냥, 별생각은 아니고.”
어둠 속에서도 자카리의 새파란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널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닐까.
그게 진짜라면 정말 좋을 텐데. 그녀는 자카리의 뺨을 쓸어내렸다.
“너 눈동자 색…… 바다와 닮았어.”
“이엔, 그거 알아?”
“뭘?”
“내게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야.”
그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괴물, 그리고 얼음. 그 외의 단어로 비유되는 자신이라니.
“농담 아니야.”
“알아, 네가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는 건.”
자카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의 낯에 희미한 웃음이 서려 있다.
“그냥 역시 너 밖에 없다 싶어서.”
“그런 사람한테 이혼이나 하자고 하고, 참 잘했다. 그치?”
이엘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흘겨보았다. 아무래도 그때의 앙금은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정말 미안해.”
진지한 어조로 말한 자카리가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툭 머리를 기댔다.
“그래, 평생 동안 내게 미안해하면서 갚아. 알았지?”
“알았어."
자카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 별 엄청 많아.”
“그러게.”
저 수많은 별들 속, 아마 내가 살던 세계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다 시 전생의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쪽이 훨씬 더 발전되어 있음에도 지금 세상이 더 좋다고 느껴지는 건.
‘자카리, 네가 내 곁에 있어서 그런 거겠지.’
그녀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간간이 귀를 간지럽히는 파도 소리 만이 울릴 뿐, 사방은 고요하기만 하다.
머리 위 아득하게 펼쳐진 밤하늘 안에 흰 별들이 반짝거린다.
이 세상에서 오로지 두 사람뿐인 것 같은 압도적인 기분. 깊은 충만 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웃었다.
“그건 그거고, 무려 바다까지와 봤는데.”
“이엔?”
“물 안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는 건 실례라고 생각해.”
발딱 자리에서 일어난 이엘리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슈미즈 드레스 자락을 제멋대로 말아 올리자 새하얀 다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카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엔, 다리! 그렇게 드레스를 걷으면 다리가 다 보이잖아!”
“뭐 어때, 여긴 너랑 나 두 사람밖에 없는걸.”
이엘리는 시큰둥한 얼굴로 남편을 돌아보았다. 오히려 수영복이 없는 게 아쉬울 정도다.
뭐, 아직 물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날씨는 아니지.
그녀는 속 편한 생각을 하며 해변을 거닐었다.
“아, 차가워!”
그러던 중 이엘리가 짧게 진저리를 쳤다. 밀려드는 바닷물이 그녀의 발목까지 차오른 것이다.
“너 그러다 감기 걸려.”
“무슨 그런 말씀을. 겨우 바닷물에 발목을 담그는 것 정도인걸.”
이엘리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차가운 물이 그녀의 종아리까지 튀어 올랐다.
바닷물이 밀려든 탓이었다. 깜짝 놀란 이엘리가 짧은 비명을 지르면서 비틀거렸다.
“까!”
“이엔?!”
이엘리는 균형을 잃었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놀란 자카리가 황급히 달려왔다.
“아야……”
“괘, 괜찮아?!”
“응, 다친 곳은 없지만……”
이엘리는 울상이 된 채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자카리의 표정이 미묘 하게 변했다.
제 아내가 입은 슈미즈 드레스는 하늘하늘하고 편한 소재로 만든 드레스였다. 그것이…….
“……자카리?”
이엘리는 미심쩍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그 자리에 빳빳하게 굳어 버린 지 오래였다.
물에 흠뻑 젖은 드레스 안쪽으로 비쳐 보이는 하얀 살갗이 지나치게 적나라했던 것이다.
“아, 이런.”
“뭐야. 설마 내가 넘어져서 화난 거야?”
“그, 그게 아니라.”
고개를 가로저은 자카리는 약간 말을 더듬고 말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자카리가 이엘리가 벗어 두었던 제 겉옷을 들고 왔다.
그녀의 몸에 겉옷을 걸친 이후, 그녀를 덥석 들어 안는다.
“저기, 나 혼자서 걸을 수 있어…… 이렇게 안으면 너도 젖을 텐데?”
“괜찮아.”
그녀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자카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 설마……”
그의 품에서 자카리를 올려다보던 이엘리는 그의 귀 뒤가 새빨갛게 물 들어있은 것을 보았다.
“……”
그녀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고, 연 분홍색 살갗이 젖은 슈미즈 드레스 안쪽으로 비쳐 보이는 것을 그제야
인지했다. 세상에. 그녀의 얼굴도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지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자카리, 심장이 엄청 빠르게 뛰네.’
쿵쿵대는 심장 소리를 듣던 그녀는 약간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도 나 혼자서만 설레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야.
이엘리가 고개를 폭 파묻는다. 어떡하지, 너무 두근거려. 그녀는 숨을 삼켰다.
저택에 도착한 자카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단 하나였다.
그건 바로 이엘리를 뜨거운 물이 가득 욕조 안에 집어넣는 것.
욕조 안에 온수를 틀며 온도를 맞추던 자카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어떤 향이 좋아?”
“어, 음, 베르가못 향……?”
이엘리는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자카리는 능숙한 동작으로 입욕제를 집어 들며 되물었다.
“이거?”
“응, 그거. 내가 할게.”
“아, 응.”
자카리가 머쓱한 얼굴로 이엘리에게 입욕제를 건네주었다.
그러고 보면 조금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그녀가 감기에 걸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대뜸 욕실부터 들어온 건 좋은데.
“……”
“……”
두 사람은 아직 첫날밤도 제대로 치르지 않은 사이였다.
이엘리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만 나가도 돼.”
“그, 그래.”
자카리는 민망한 표정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이엘리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전에도 목욕 때문에 어색한 상황이 됐었는데, 이번에도 또 그러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내외하 면서 지낼 수는 없잖아.’
뜨거운 물에 반쯤 몸을 담그며 이엘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지금까지는 그들이 성인이 아니었기에 직접적인 관계를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성인이었다.
‘그리고 자카리는 제국 유일의 공작이야.’
헤센바이츠 공작가는 손이 적었다.
자카리만 해도 꽤 고생한 끝에 태어났다 들었다.
또한 공작가에 정당한 가주와 안주인이 들어온 이상, 적법한 후계자를 생산하는 것도 그들의 의무다.
“……아이.”
이엘리는 저도 몰래 작게 중얼거렸다.
자카리와 나의 아이라니. 도무지 상상도 안 간다.
솔직히 전생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엘리는 아직 자카리와 자신이 한참 어리게 느껴졌다. 그런데.
“공작가의 후계자를 낳아야 할 의무, 라……”
생각해 보면 이엘리와 비슷한 연배의 레이디들은 대부분 결혼을 마쳤 다.
조금 일찍 결혼한 사람들은 지금쯤 갓난아이 한둘쯤은 낳아 키우고 있을 정도다.
이엘리는 코끝까지 물에 담갔다.
‘하지만 자카리를 이대로 두면 아 이는 무슨, 계속 손만 잡고 자게 될텐데.’
그녀는 살짝 붉어진 얼굴이 되어 굳게 닫힌 욕실 문을 곁눈질로 바라 보았다.
분명히 그도 건장한 성인 남성이니 그런 쪽에 욕구가 없진 않을 텐데, 그는 항상 담백한 척을 하고 있었다.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좀 과하잖아.’
솔직히 성년이 된 이후의 본격적인 키스도 그녀가 먼저 한 상태다.
어렸을 때의 아샤 축제에서 있었던 일은 그냥 사고였으니까.
함께 밤을 보내는 것까지 그녀가 먼저 언질을 줘야 하나.
“……내가 못 살아.”
그렇게 중얼거린 이엘리가 결연한 얼굴로 일어섰다.
그래, 까짓것 질러 보는 거야.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이렇게 판이 깔렸을 때 저지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이엘리의 눈이 빛났다.
“자카리?”
수건으로 대충 몸을 가린 그녀가 살짝 욕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침대에 주저앉아 있던 자카리가 깜짝 놀라 이엘리를 마주 본다.
이엘리는 단단히 결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갈아입을 옷이 없는데.”
“……어.”
그것만큼은 자카리도 예상하지 못 했던 것 같다. 새파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녀가 웃었다.
“그리고 온몸도 온통 젖어서.”
“이엔?”
“이대로라면 감기 걸릴 것 같거든.”
이엘리는 자카리의 눈치를 살폈다. 자카리는 마치 홀리기라도 한 양 이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안아 주면 덜 추울 것 같은데……”
그렇게 속삭인 이엘리가 부끄러움을 참으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발그레한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유혹적으로 자카리를 부른다.
짙게 물든 녹색 눈동자가 자카리를 나른하게 올려다보았다.
으으, 이런 노골적인 대사를 내가 말하게 되다니.
설마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도 자카리는 일반 성인 남성 만큼의 눈치는 보유하고 있었다.
“……아.”
자카리의 눈동자가 깜빡 감겼다 떠졌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가 말했다.
“이엔..?”
이엘리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카리가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되물었다.
“그, 내가 이해한 게…… 맞아?”
“맞아.”
“너, 하지만, 그, 네 마음의 준비가……”
“이미 다 했어.”
이엘리는 침착했다. 순간 자카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정말이지?”
“응?”
이엘리는 문득 어깨를 굳혔다.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자카리의 얼굴은,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유욕과 집착이 가득 들어찬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한다.
“이엔.”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자카리의 목소리.
나른한 그 목소리가 이엘리의 고막을 긁었다.
이엘리는 조심스럽게 자카리를 올려다 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새카맣게 가라앉아 있다.
“어, 자카리?”
자카리의 저런 시선은 정말로 처음 본 것 같은데.
이엘리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자카리.
다시 한 번 입술만을 달싹이자, 자카리의 눈빛이 짙어졌다.
털썩. 이엘리의 몸이 침대 위에 그대로 흐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