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화
또한 자카리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이엘리가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엘리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공작성 밖으로 빠져 나왔다.
첫날밤을 위해 일부러 꾸며 놓은 방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조금 미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손을 잡고 자박자박 걸음을 옮기던 이엘리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자카리.”
“응?”
“집사한테 미리 말해 놓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다들 걱정하면 어떡하지?”
“걱정이라니?”
자카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입을 연다.
“그래도 공작 각하이신데, 호위 하나 없이 이렇게 밖에 빠져나오면 안 되잖아.”
“그러니까 내가 험한 일을 당할까 봐 그게 걱정이라고?”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이엘리가 말끄러미 자카리를 올려다본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자카리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이엔.”
“응?”
“이 제국에서 날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목소리는 확신에 가까웠다. 그리고 자카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넌 그런 내가 목숨을 바쳐 서라도 지킬 사람이야.”
“어……”
아니, 내가 위험해질 거라고 생각 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는데. 그때 자카리가 차분하게 말했다.
“넌 내 영혼과 심장의 주인이니까.”
이렇게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건 반칙이야! 그녀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홱 시선을 돌렸다.
“이리 와.”
마구간에서 말을 끌어온 자카리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엘리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이제 승마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
“정말? 우리 이엔, 성장했네.”
마치 아이를 어르는 것 같은 그 목소리에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불퉁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랑 같이 말을 탔으면 좋겠는데.”
“왜?”
“왜냐하면……”
자카리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아 올렸다.
어어, 하는 새 이엘리는 까만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자카리가 말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며 씩 눈 웃음을 친다.
“내가 너와 함께 타고 싶으니까.”
그렇게 속삭인 자카리가 말 위로 뛰어올랐다.
턱, 자카리의 무게가 얹혀 말의 몸 이 출렁거린다.
자카리는 그대로 등 뒤에서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았고, 반대편 손으로 말고삐를 쥐었다.
‘아.’
이엘리는 눈을 깜빡였다. 자카리의 고개가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널 끌어 안을 핑계가 없잖아.”
“어, 언제는 핑계가 없으면 끌어안지 않았던 것처럼 이야기하네.”
“그랬나?”
부러 새침하게 대답하자, 소년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등 뒤로부터 울려 퍼졌다.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몸을 단단하게 받치고, 자카리는 그대로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발굽이 땅을 박찼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을 달려 영지의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다소 먼 거리이긴 하나, 그렇다하여 가지 못할 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영지 바깥으로 나서자 옅은 바다 내음이 나기 시작했다.
“……공작령에 북해가 잇닿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있었지만?”
“그래도 바다가 이렇게 가까운 줄은 몰랐어.”
이엘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 고삐를 잡아당겨 말의 속도를 줄인 자카리가 냉큼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넌 내내 공작성에만 있었잖아.”
“하긴 그것도 그런가.”
이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결혼 직후엔 전대 공작의 눈치를 보느라, 그 이후에는 실제로 공작성 살림을 맡아 하느라 외부로 돌아다닐 일이 없었다.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다 왔다.”
말에서 뛰어내린 자카리가 당연하 다는 듯이 이엘리의 허리를 안아 내렸다.
이엘리는 무심결에 손을 내밀다 말 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든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으려 하는 게 보인다.
“내가 그렇게 좋아?”
“그럼.”
이엘리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자카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작게 웃었다.
“이리 와, 이엔.”
“고마워.”
은거울처럼 빛나는 동그란 달이 밤 하늘 위로 동그마니 떠 있었다.
어둠을 삼켜 군청색으로 빛나는 바 다 표면으로, 달빛이 은빛 물고기의 비늘처럼 일렁인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바다도 정말 오랜만에와 본다.”
“예전에 가 본 적 있어?”
“그게……”
이엘리는 애매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전생에서야 물론 가 봤지만, 이번 생에서는 가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문득 떠오른 탓이다.
이엘리는 신발을 벗어 들고 맨발로 백사장을 걷기 시작했다.
“간지러워.”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어, 이엔.”
나지막이 키득거리는 이엘리를 보며 자카리는 미간을 좁혔다.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냥, 좀 옛날에.”
“옛날?”
대충 뭉뚱그려 그렇게 말하자, 자카리는 애매모호한 얼굴을 했다. 흰 모래가 발을 간지럽힌다.
“응. 대충 어렸을 적이라고 생각해 줘.”
정확히 말하자면 환생 전이라고 해야 하지만.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을 머금어 흩날린다.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이엔?”
그녀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자카리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자카리?”
“그게.”
네가 너무 멀게 느껴져서.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자카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상해.
“뭐야, 너도 참.”
어색한 분위기를 날리기 위함인지 이엘리는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고는 슬쩍 시선을 돌린다.
“저기가 플로랑테 섬이야?”
“응, 맞아.”
그녀가 섬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들은 나란히 서서 섬을 바라보았다.
플로랑테 섬은, 사실 섬이라고 말 하기 어색할 정도로 육지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남부에도 바다가 있던가?”
“음, 뭐……”
이엘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짭짜름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메웠 다. 그녀가 말문을 돌린다.
“그런데 섬에는 어떻게 가?”
“그야 배를 타고 가지.”
“……설마 노를 저어서 가겠다는 소리는 아니지?”
대번 기겁하는 얼굴이 된 이엘리가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마 내가 그러려고.”
“그럼?”
“우선 이리 와.”
자카리가 그녀를 한쪽으로 이끌었다.
자카리, 준비가 엄청 철저한데?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얀 모래톱에 얌전히 놓여 있는 건, 조그마한 조각배였던 것이다.
“설마 이 배까지 미리 마련해 둔 거야?”
“물론이지.”
“……결혼식 준비로도 바빴을 텐데, 여러모로 너도 신경 썼네.”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하나 문제가 있었다.
눈앞에 있는 배는 두 사람이 간신히 탈 수 있을 만한 작은 조각배였다.
보통 섬으로 건너갈 때 이런 조그만 배를 타지는 않는다.
“근데 저 배를 타고 섬으로 건너갈 수가 있어?”
이엘리는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물론 플로랑테 섬은 섬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면구할 정도로 가까 운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조각배를 타고 건너갈 정도의 거리는 아닌데.
“나만 믿어.”
하지만 그는 홀로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배에 올라탔다. 잠시 후.
“이거 좀 재능 낭비 아냐?”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니, 무슨 배를 움직이는 데 겨울의 마법까지 써?
“뭐 어때, 내 힘인걸.”
“아니 뭐 그건 맞지만.”
이엘리는 멍하니 배 밖을 바라보았다. 자카리는 지금 바람을 불러일으켜 배를 밀어내고 있었다.
지금의 자카리는 능숙하게 자신의 힘을 다루었다.
감정이 흔들리지만 않으면 괜찮을 텐데…… 가 아니라.
“노를 젓는다 든지 하는 방법도 있잖아?”
이엘리는 최대한 온건한 방법을 꺼내 놓았다. 하지만 자카리는 미간을 좁히며 대답할 뿐이다.
“언제 저기까지 노를 저어서 가?”
“어,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자카리가 가진 겨울의 마법은 마수 들과 야만족까지 홀로 상대할 수 있는 강대한 힘이었다.
그런 힘을 고작 배를 움직이는 데 쓰다니, 너무 과한 것 아냐? 자카리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바다를 얼려서 걸어가는 방법도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그건 좀 그렇잖아?”
“당연하지, 자카리! 그럴 필요는 없거든!”
바다가 얼어붙는 모습을 상상하던 이엘리는 기겁하여 외쳤다.
자카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게 최선이잖아?”
“너무 자기 합리화 아냐?”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는 착실히 움직여 플로랑테 섬의 기슭에 닿았다.
“제가 레이디를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
자카리는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입술을 꼭 다물긴 했지만, 어쨌든 이엘리는 자카리의 손을 잡은 채 걸
음을 내디뎠다.
사박사박 발아래로 풀잎들이 밟힌 다. 저 멀리 저택이 하나 보였다.
“저기야?”
“응.”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그마한 저택이었다.
크림색 벽돌을 쌓아 만든 벽과 붉은 지붕은 동화 속에 나오는 저택처럼 아기자기해 보였다.
이엘리는 환한 얼굴이 되어 저택을 응시했다.
“이 저택, 엄청 귀엽네.”
“그래?”
“응. 동화 속 요정님이 살 것 같은 건물이야.”
이엘리는 드물게 들떠 보였다. 그 러면서도 흘끗거리며 등 뒤를 돌아 보는 모습이, 오래 보지 못한 바다 에 미련이 남은 것 같다.
자카리는 쿡쿡 웃었다. 그녀의 머 리를 쓸어내리며 말한다.
“저택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 나 보고 갈까?”
“아, 그럴까?”
이엘리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두 사람은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하얀 모래톱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검푸른 바다가 찰랑거린다.
자카리는 모래톱 위로 손수건을 펼 치고 그녀를 앉혔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어?”
“글쎄, 오랫동안 외부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알게 되지.”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의심 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본다.
공작령은 광활했고, 자카리가 주로 활동하는 곳은 야만족들의 땅, 마수 가 주로 출몰하는 최북단 산맥과 설 원 아닌가.
“사실 근교에 바다가 있다는 것도, 플로랑테 섬이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는데.”
이엘리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알아챘는지 자카리는 머쓱한 얼굴을 했다. 이엘리가 되물었다.
“그런데?”
“내 어머니가 좋아하던 장소여서 일부러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어.”
자카리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을 뿐 인데, 듣고 있던 이엘리가 더 숙연 해져 버렸다.
하지만 자카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 드리던 그가 미소했다.
“하지만 비록 내게는 불편한 장소라고 해도.”
“……”
“너와의 추억이 쌓이면 그 장소도 분명 좋아질 테니까.”
자카리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그녀를 향한 순수한 믿음과 애정. 그녀는 머쓱해졌다.
“그렇다면 좋을 텐데.”
“분명히 그럴 거야.”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귓속을 간 지럽 힌다.
달빛을 반사해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바다가 아름다웠다.
봄이라지만 바닷바람은 아직 쌀쌀했다.
“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