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13. 북부의 안주인 (2)
결혼식이 끝났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두 사람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일을 맞닥뜨렸다.
그건 바로 그들의 합방이었다.
이엘리는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방 안의 전경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뭐, 이런 걸 아예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닌데……’
아무래도 공작성의 사람들이 너무 큰 정성을 발휘한 것 같다.
조도를 낮춘 방 안의 풍경은 아늑해 보였고, 그 이상으로 선정적으로 보였다.
붉은 천으로 만들어진 커튼과 침상 위에 흩뿌려진 수많은 장미 꽃잎들, 테이블 위에는 기분을 돋워 줄 술과 약간의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
“……”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묵했다. 이거 지금 그러니까 그거지. 분위기 띄워 주기?
‘그, 그러니까.’
오늘 나…… 자카리랑 정말로 밤을 보내야 하는 거야? 이엘리는 흘끗 자카리의 눈치를 살폈다.
‘어쩌면 좋아, 너무 긴장돼……!’
장담할 수 있었다. 자카리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 동안, 지금 이상으로 긴장되었던 적이 없었다.
그때 이엘리와 자카리의 눈이 딱 마주쳤다. 두 사람은 파드득 놀라서 상대방을 외면했다.
‘아마도 합방의 정석대로라면……’
자카리가 이엘리의 드레스를 벗겨 줘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너무 오랫동안 친구 같은 부부 사이를 유지했던 두 사람은 도무지 그런 분위기를 만들
기가 어려웠다.
두 사람은 다시 침묵했다.
“……”
“……”
서로를 힐끔거리던 두 사람은 암묵 적으로 합의했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먼저 씻을래?”
잠시 후 자카리는 태연한 척 이엘리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엘리는 자카리의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안 돼, 최대 한 긴장하지 않은 척해야……
“으, 응.”
아니 지금 목소리가 떨리면 어떡해! 이엘리가 입술을 잘근거리자, 자카리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럼 난 기다릴 테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이엘리가 욕실 로 쏙 들어갔다.
달칵 문이 닫힌다. 그제야 자카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엘리. 너무 가슴 이 뛰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아, 어쩌면 좋지.’
닫힌 문 너머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태연한 척을 하는 것도 이제 한계다.
“……”
얼굴이 화끈거린다. 커다랗게 심호흡을 한 자카리가 목을 조이는 크라 바트를 대충 끌러 냈다.
이엘리는 꼼꼼히 화장을 지우고 따뜻한 물을 틀었다.
그 와중, 몸을 씻는 세정제가 농염한 장미 향기로 준비된 것을 보며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공작성 사람들의 배려가 너무 과하다.
“이 사람들 정말……”
아니, 지금껏 남매처럼 자라 온 부부를 당장 이런 방으로 밀어 넣으면 어떡해.
깨끗하게 몸을 씻은 이엘리는 장미수로 피부를 정돈하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붉었다.
“……”
이상하다. 자카리에게 화장기가 없는 얼굴 정도는 이미 수없이 많이 보여 준 것 같은데도…….
‘……지금은 이대로 나가는 게 왠지 좀 부담스러워.’
오늘만큼은 그에게 최대한 예쁘게 보일 수 있는 상태로 나가고 싶다.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자카리가 기다리도록 할 수는 없으니까.’
몸의 물기를 꼼꼼히 닦아 낸 그녀가 거울을 본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입술을 다시 칠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녀는 몸을 돌려 가운을 걸쳐 입었다. 은은한 장미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아니, 누가 첫날밤 아니랄까 봐. 쓴웃음을 지은 이엘리는 가운을 잘 여며 매듭을 짓곤 수건으로 머리를 감쌌다.
“나 다 씻었어. 얼른 들어가 봐.”
문을 열고 빠져나온 이엘리는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자카리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
그리고 이엘리는 화르륵 뺨이 달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카리는 정장 상의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놓고, 크라바트를 풀어 놓은 상태였다. 셔츠 단추를 두어 개 끌러 놓았는데, 그게…….
‘……세상에, 이엔. 너 정말.’
쇄골의 우아한 곡선이 자꾸만 시야에 들어온다.
이엘리는 자신이 굉장히 한심하게 느껴졌다.
‘변태도 아니고 이게 뭐야!’
이엘리는 자신이 자카리의 가슴께를 흘끔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자니, 욕실로 들어가려던 자카리가 제 앞에 섰다. 응?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릴 때였다.
“깨물지 마.”
“응?”
“입술 그렇게 물어뜯으면 피 나잖아.”
손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진 자카리가 씩 눈웃음을 쳤다.
그녀는 멍하니 자카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자카리가 그녀의 뺨에 짧게 키스했고, 다정하게 속삭인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씻고을 테니까. 알았지?”
“아? 어, 으, 으응……”
바보 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이 새 하얗게 물들어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씩 눈웃음을 친 자카리는 그대로 이엘리의 곁을 스쳐 지났다. 세상에.
“……바보, 이 멍청이.”
달칵 소리와 함께 욕실 문이 닫힌 이후에야 이엘리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한심해 죽겠어!
그녀가 젖은 머리를 얼추 다 말릴 때쯤 자카리가 욕실 밖으로 빠져 나왔다.
느슨하게 묶은 가운 사이로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이엘리는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세상에, 머리를 하나도 안 말리고 나왔네?”
이엘리는 미간을 잔뜩 구겼다. 자카리의 새하얀 은발 아래로 톡톡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리 와.”
“괜찮아, 대충 물기를 털어 내기만 해도……”
“아직 봄이잖아. 그러면 감기 걸려.”
그리고 이엘리의 말만큼은 잘 듣는 자카리는 이번에도 그녀의 부름에 순순히 따랐다.
그녀가 자카리의 머리에 수건을 덮어씌우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예전에도 이랬었지.”
“예전에?”
“그래. 네가 영지를 시찰하느라 눈을 맞고 돌아왔을 때 말이야.”
이엘리는 살며시 웃었다. 그때가 문득 떠올랐다.
자카리에게서 묻어나던 서늘한 눈 냄새. 사락사락 수건과 은빛 머리카락이 마찰하던 소리.
그때보다 그들은 한참 자랐고, 관계도 달라졌다.
'이제 자카리는 내게 있어 남동생 같은 아이가 아니니까.’
이엘리는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위태롭던 소년은 사라지고, 그녀의 마음을 마음대로 쥐고 흔드는 아름다운 청년만이 남았다.
잠시 후 그녀는 수건을 떼어 냈다.
“다 말랐다.”
“고마워."
싱긋 웃는 자카리의 얼굴에 이엘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자카리가 다정하게 말한다.
“그럼 잘까?”
“응.”
두 사람은 나란히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손을 꼭 맞잡은 두 사람이 상대에게 씩 웃었다.
“잘 자.”
“그래, 너도 잘 자."
조그마한 밤 인사가 울렸다. 불을 끈 두 사람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고요함이 어색한 밤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함께 침대를 쓰는 날인데, 그리 쉬이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반짝 눈을 뜬 이엘리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자카리도 마찬가지인지, 마주 잡은 손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이엔.”
“으, 응?”
놀란 이엘리가 어깨를 움찔하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카리가 작게 질문했다.
“혹시 잠이 안 와?”
“글쎄……”
당연하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에, 긴장이 되어 잠이 오지 않는단 말이야.
결혼식 이후 함께 보내는 첫날밤 이잖아? 하지만 그리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엘리는 짧은 농담을 던졌다.
“이대로는 못 자겠는걸."
“왜?’’
“결혼 직후인데, 신혼여행도 한번 못 가 본 게 억울해서.”
이엘리의 농담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로 누운 자카리가 이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새파랗게 빛나는 시선은 오로지 그녀만을 응시한다. 어쩌지. 심장이 뛰어.
“그렇다면 바다라도 보러 갈까?”
“바다?”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카리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질문을 던진다.
“공작가가 소유한 개인 해변이 있는 것은 알지?”
“응, 그건 아는데……”
하지만 자카리와 결혼한 이래로, 개인 해변 쪽으로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이 여유 자적하게 휴식을 취할 정도로 편안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카리가 웃었
다.
“거기에 작은 섬이 있거든.”
“아, 플로랑테 섬 말하는 거야?”
그녀의 대답에 자카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지럽힌다.
“알고 있네?”
“응. 집사가 알려줬어.”
선대 공작이 죽고 이엘리가 헤센바이츠의 완전한 안주인이 된 이후,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공작가의 재산을 모두 파악하는 것이었다.
안살림을 맡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섬에 작은 별장이 있다고……”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플로랑테 섬에 딸린 자그마한 별장은 선대 공작 부인이 좋아하던 장소였다.
그랬기에 그녀의 시아버지는, 아내 가 죽은 후 플로랑테 섬 자체를 반쯤 폐쇄해 버렸다.
“혹시 괜찮다면 거기라도 갈래?”
자카리의 물음에 이엘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오랜만에 바다 구경이라.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난 좋아, 언제로 생각하고 있으면 될까?”
“지금.”
“지금?”
깜짝 놀란 이엘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자카리의 얼굴은 홀로 태연할 따름이다.
“지금은 밤인데?”
“그게 뭐가 어때서?”
“아니, 그니까……”
막상 그렇게 되물어 오자 대답할 말은 없긴 하다. 미간을 구기던 이엘리는 다른 질문을 했다.
“너 안 바빠?”
“응, 안 바빠.”
“어째서?”
“그렇지 않아도 결혼 이후에는 너 랑 좀 쉬려고 했었거든.”
자카리는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엘리는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자카리는 씩 웃어 보였다.
“그래서 일부러 일을 모두 몰아서 처리해 놨지.”
“세상에, 그게 정말이야?”
“물론.”
그래서 자카리가 요 근래 그렇게 바빠 보였던 거구나.
그 와중에 내게 줄 티아라까지 마련하고…… 이엘리는 약간 감동에 젖었다.
살짝 고개를 기울인 자카리가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사실 너와 함께 플로랑테 섬에는 한 번쯤 가 보고 싶었어.”
“나랑? 어째서?”
“그냥…… 그러니까.”
지금껏 거침없이 대답하던 자카리는 이번만큼은 약간 머뭇거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거든.”
“어……”
“아무래도 공작성은 보는 사람들이 좀 있으니까.”
물론 공작 부부의 사생활까지 간섭 하려 드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느낌 자체가 좀 달랐다.
“사실 집사한테도 미리 언질은 해놨어.”
“그래?”
“응. 며칠 정도 보이지 않아도 놀라지 말고, 급한 일이 있으면 섬으로 연락하라고.”
그렇게 말한 그는 약간 뜸을 들였다.
이엘리는 이상하게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너만 괜찮다면.”
“……”
“지금 당장이라도 단둘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어.”
자카리의 목소리엔 약간의 열기가 서려 있었다. 어둠 속 자카리의 뺨이 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