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화
피로연은 가든파티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무리 지어 핀 아샤꽃 아래로 우아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피로연 내내 자카리는 이엘리를 독점하려 들었다. 되레 보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레이디, 제게 레이디의 첫 번째 춤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자카리는 첫 곡이 연주되자마자 이엘리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코 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공작 각하, 전 피로연의 주최자잖아요. 다른 사람들도 두루두루 살펴 야 한답니다.”
“그래도 춤 한 곡 정도는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만.”
장난스러운 말에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살포시 눈웃음을 친 이엘리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그렇다면 이번 한 곡만이예요.”
“좋습니다.”
부러 존대를 하며 두 사람은 나란히 시선을 맞추었다. 때마침 경쾌한 왈츠로 음악이 바뀌었다.
“자카리, 오늘 너 왜 그래?”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다른 사람과 있을 때마다 자꾸 불러내잖아.”
이엘리는 미간을 좁히며 소곤거렸다. 아까 전부터 그녀가 다른 사람 과 대화라도 몇 마디 나누고 있으면, 그가 귀신같이 들러붙는다.
이엘리는 질책하는 의미로 마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래 쾌도 내가 주최자인데, 너 하고만 어울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글쎄, 사이좋은 부부구나…… 그 정도로 생각하지 않을까?”
“뭐어?”
능글맞은 자카리의 대답에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되물어 버렸다. 자카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난 네가 다른 사람과 대화 하는게 싫단 말이야.”
“어린애도 아니고 그게 뭐야.”
“언제는 날 어린애 취급 안하고 있다더니, 지금도하고 있네.”
자카리가 설핏 웃었다. 그녀는 말 문이 막혔다. 자카리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이래서 내가 너에게 남자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거야.”
“……”
언제 저렇게 말솜씨가 늘었담. 그녀는 자카리를 흘끗 곁눈질로 흘겨 보았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카리가 제대로 춤의 박자를 맞추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네가 날 남자로 바라보고 있다고 말해 준 건 고맙지만.”
“자카리?”
“그것보다도 훨씬 더.”
옆으로 세 걸음, 뒤로 다시 한 걸 음. 자카리의 품으로 이엘리가 되돌아온다.
빙그르르 돈 이엘리의 치맛자락이 꽃잎처럼 활짝 펼쳐졌다. 자카리는 그대로 제 아내를 품 안에 가둬 넣었다.
“네게나 외의 다른 사람은, 무엇 보다도 다른 남자들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
“그렇게 생각해.”
춤의 스텝을 밟으며, 자카리의 품에 안겨 있는 찰나의 시간.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말하면 역시 좀 그러려 나?”
멋쩍은 얼굴이 되어 자카리가 속삭였다. 이엘리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는 싶더니 대답했다.
“아니.”
“오히려 좋아. 왜냐하면……”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 이런 말을 입 밖으로 스스로 꺼내게 될 줄은 몰랐다.
보드라운 깃털로 심장 한구석을 문 지르고 있는 기분이다. 간지러우면 서도 보드라운 감각. 그녀는 뺨을 붉혔다.
“……나도 그러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자카리는 멍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본다. 이엘리는 좀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아까 좋아한다고까지 말했는데, 이런 말을 꼭 내 입으로 들어야겠어?”
이엘리는 새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음악이 끝난다. 빙글빙글 춤을 추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손을 놓았다.
춤도 끝났으니 그녀는 자카리의 손을 놓으려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이엘리는 어깨를 가벼이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꼈다. 살짝 뒤를 돌아 보자 자카리가 서 있었다.
“자카리?”
시야를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이는 수백 수천의 아샤꽃잎들. 이엘리는 살짝 눈살을 찡그렸다.
“왜 그러고 서 있어?”
춤은 끝났잖아. 그런 의미를 담아 이엘리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카리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서.”
눈처럼 흰 은발이 뺨에 스친다.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쪽빛 하늘을 한 조각 떼어 내어 박아 넣은 것 같은 새파란 시선. 빙하처럼 차가웠던 눈동자는 이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런 방법밖에 몰라서 미안해.”
자카리는 짓궂게 미소 지었다. 그와 동시에. 쪽, 이엘리의 뺨에 자카리의 입술이 스쳐 지났다.
“사, 사람들이 보는데……”
“봐도 괜찮아.”
아니, 너만 괜찮지 난 안 괜찮은데요. 이엘리는 붉어진 얼굴로 그렇게 반박하려다 말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람들의 흐뭇한 시선마저 낯부끄럽다.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너 솔직히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일부러 지금 그런 거지?”
“맞아.”
그렇게 담백하게 긍정하지 말란 말야. 이엘리는 포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자카리가 어떻게 저런 소유욕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하지만 뭐, 그래도 귀엽긴 하니까.’
고작 소유욕을 표출하는 방법이 뺨이며 이마에 키스하거나, 이엘리의 곁에 바싹 붙어있거나, 가든파티의 첫 춤을 권하는 것뿐이라니.
황제의 무례한 행동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지 않나.
“정말, 내가 못 살아.”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에는 채 감추지 못 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레이디들의 담소에는 웃음과 나긋한 목소리, 그리고 차와 다과가 필수품이었다.
그리하여 이엘리는 손님들의 답례 품으로 선물해 줄 아샤 잼과 차를 귀부인들에게 미리 보여 주기로했다.
‘아무래도 차와 잼이니까, 이런 자 리에서 첫선을 보이는 편이 좋겠지.’
북부의 귀부인들은 웬만하면 모두 초대받았고, 게다가 황녀도 있는 자 리다. 이엘리는 아샤꽃차를 따끈한 물 안에 넣었다. 조그마한 봉오리 같던 꽃잎이 뜨거운 물 안에서 활짝 피어난다.
“어머나……”
귀부인들은 물론이고 황녀까지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짙은 아샤꽃향기가 물씬 풍겼다.
“너무 예뻐요.”
“그러게요. 이런 차가 지금까지 있었던가요?”
귀부인들이 탄성을 올렸다.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이런 정도의 호응이라니. 직접 사교 행사에 내놓아도 괜찮은 반응을 얻을 것 같다. 이엘리는 차를 따라 주면서 설명을이었다.
“이번에 새로 개발한 차인데, 품이 많이 들어 소량만 제작할 수 있었어요.”
그녀는 제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제국 유일의 공작 부인이었 고,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이며, 북부의 여주인이다.
자카리가 본격적으로 작위에 오른 이상 그녀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황녀 전하가 계신 자리에서 직접 보여드리고 싶었답니다.”
그건 바로 북부 귀부인들의 사교 행사를 주도하는 것.
지금까지는 로렌 백작 부인이 황가를 등에 업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 뛰었지만, 이제 로렌 백작가의 오만 방자함도 끝날 때가 되었다.
‘귀부인들이 주도하는 사교 행사는 여러 가지가 있지.’
대표적으로 귀부인들이 모이는 살 롱이 있었다. 지금까지 북부에서 가장 이름 높은 살롱은 백작 부인의 것이었으나, 이엘리는 그 자리를 빼앗아 올 생각이었다. 그녀는 슬쩍 입매를 올렸다.
‘사교 행사에서 제공되는 이런 독특한 차와 다식들은 그 행사의 가치를 높여 주니까.’
아샤꽃을 이용하여 만든 차는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열은 수색, 그리고 살랑거리는 꽃 잎. 게다가 아샤꽃을 설탕으로 적절히 처리하여 만든 분홍색 잼 또한 그 색깔이 화사하다.
“다들 한번 드셔 보시겠어요?”
이엘리의 말에 귀부인들은 호기심 에 가득한 얼굴로 앞다투어 맛을 보았다. 그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맛있네요.”
“정말이예요. 향이 무척 좋아요.”
“이런 차는 처음 마셔 봐요.”
당연히 처음이겠지. 이 차는 그녀가 가진 전생의 기억에 힘입어 만들 어진 거나 마찬가지니까.
“다행이네요, 입맛에 맞으셔서.”
이엘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녀가 예리한 눈으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도자기 안쪽으로 옅은 분홍색으로 물든 찻물이 찰랑거린다. 분홍 꽃잎들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잘 하면 이 꽃차, 사교계에서도 유행할 수 있겠는걸요.”
“과찬이십니다, 황녀 전하.”
“아뇨, 진심이예요. 이렇게 예쁜 차는 처음 보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황녀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굳이 이 귀한 차를 지금 보여 주는 것은…….
“이제 공작 부인께서도 본격적으로 사교 활동을 하실 텐데, 그때 선 보이실 건가요?”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황녀가 여상 하게 물었다. 이엘리는 미소 지었다. 역시 황녀는 예리하다.
“네, 맞아요. 그래서 소중한 분들을 먼저 모시고 맛을 보여 드리고 싶었 답니다.”
자신의 의도, 귀부인들의 반응을 미리 살펴보기 위함이라는 걸 황녀는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잼이 너무 달지는 않으신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게……”
하얀 크래커 위에 잼을 올려 한입 먹은 귀부인은 즐거운 얼굴을 했다.
아샤꽃잎 특유의 쌉싸래한 맛과 달콤한 설탕의 맛이 적당히 어우러진다. 귀부인들은 앞다투어 찬사를 내놓았다.
“다른 차들와도 잘 어울리겠는걸요.”
“맞아요. 게다가 달콤하지만 과하지 않아서 계속 먹을 수 있겠어요.”
이런 피드백을 원했다. 이엘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황녀가 웃으며 지켜보았다.
피로연을 겸한 가든파티는 그날 밤 늦게야 모두 종료되었다. 활짝 무리 지어 피어난 아샤꽃 아래로 군데군데 켜 놓은 가스등이 환상적인 주홍 색을 흩뿌리고 있었다.
이엘리는 피로연에 참석한 답례로 귀빈들에게 아샤꽃으로 만든 차와 잼을 선물해 줬다. 황녀가 의아하게 물었다.
“이건 뭔가요, 공작 부인?”
“이번에 참석해 주신 것에 대한 답례랍니다.”
이엘리는 빙긋 웃었다.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황녀는 잠시 후 눈을 반짝이었다.
“설마 아까 마셨던 그 차인가요?”
“맞아요. 결혼식에 참석해 주신 귀빈들을 위해 답례품으로 준비해 뒀었어요.”
황녀는 즐거운 얼굴로 답례품을 받았다. 그녀가 코끝을 찡그리며 장난 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연다.
“이거, 공작 부인 때문에 제가 황제 폐하께 한 소리 듣겠는걸요.”
“황녀께서요? 어째서요?”
“공작 부인께서는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하고 계시잖아요.”
투명한 회색 눈동자가 이엘리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리둥절한 이엘리를 앞에 두고 말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교 활동도 하실테고, 이번에 이렇게 훌륭한 방 식으로……”
황녀는 보란 듯이 이엘리가 선사한 답례품을 톡톡 두드려 보였다. 황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황가의 상징이기도 한 아샤꽃을 선점하신 것도 그렇고요.”
“아.”
이엘리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면 황녀는 황제에게 여러모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귀부인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황녀를 보며 황제가 불쾌해 하는 것도 언 뜻 소문으로 들어서 알았다.
“물론 전, 아샤꽃 따위 누가 선점 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황녀 전하.”
“제 오라버니께서는 아마 자존심이 꽤나 상하시겠죠.”
황녀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황녀가 황제에게 받아 온 대우를 생각하면 저럴 만도했다.
“이따위 상징에 집착하기보다는 성실하게 제국을 다스리는 편이 훨씬 더 나으실 테지만요.”
신랄하게 말한 황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스쳐 간다.
“하지만 전 별로 신경 안 써요. 오히려 공작 부인을 응원할 테니까요.”
“음, 감사합니다……?”
이엘리는 어색하게 황녀에게 대답했다. 황녀는 이엘리를 흘끗 바라보는 싶더니 입을 연다.
“감사는 됐고, 로렌 백작 부인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줘요. 알았죠?”
그렇게 말한 황녀는 곧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자카리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다.
“오늘 고생했어, 이엔.”
“아, 자카리 너도.”
이엘리는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왠지 먼 길을 돌아와 이제야 자카리의 곁에 온전히 남을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자카리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일 따름이었다.
결혼식이 종료된 이후 북부의 새로 운 공작 부부에 대한 소문들이 퍼져나갔다.
한때 이혼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도, 공작 부부는 한 쌍의 잉꼬부부처럼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소 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