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화
“자카리."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이엘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자카리는 다시 한 번 진 부한 경험을 했다. 축포가 터지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환상. 세상
에, 당장 죽어도 좋을 것 같아.
“이엔.”
최대한 여유롭게 그녀를 맞이하리 라 결심했는데, 실제로 내뱉는 건 그녀의 이름뿐이다.
꽉 잠긴 목소리로 자카리는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우아한 동작으로 손을 내밀고는 눈웃음을 친다.
“왜 그렇게 굳은 얼굴이야?”
“……그게.”
“내가 너무 예뻐서?”
언제나처럼 농담을 던지며 웃는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자카리는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여기서 무어라 말을 하면, 그대로 말실수를 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자카리, 걷는 동작이 너무 어색 해.”
이엘리는 웃음을 삼키며 속삭였다. 평소 사람들을 대할 때의 칼 같은 기세는 모두 사라진 채 그녀만이 알고 있던 수줍은 청년만이 남았다.
자카리는 뻣뻣한 동작으로 이엘리를 이끌었다.
“이건 모두 너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고?”
“그래. 누가 이렇게 예쁘라고 했어? 사람 설레게.”
자카리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뿍 들어가 있었기에, 이엘리는 어색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음, 난 농담이었는데. 그런데 자카리가 저런 식으로 날 바라보니까. 그 속에 담긴 달콤한 애정이 너무
강렬하다.
‘……이젠 나도 이제 가슴이 두근거리잖아.’
처음엔 분명 괜찮았는데 자꾸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찌나 심장이 뛰는지 마주 잡은 손 안쪽으로 가슴 뛰는 소리가 울릴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주단의 끝, 사제가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공작 각하와 공작 부인의 결혼 맹세를 들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
온갖 꽃을 엮어 아치로 만들어 놓은 그 아래, 단상 앞에 선 사제는 주름진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의 결혼을 증명해 줄 사제였다. 두 사람을 향해 사제가 단정하게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서로를 영원히 아끼고 존중하며 상대에게 충실할 것을 맹세하십니까?”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이엘리는 제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을 느꼈다. 자카리를 힐끔 곁눈질 하자, 자카리 또한 긴장한 얼굴이었다. 고운 레이스 장갑 너머로 자카리의 온기가 느껴진다. 어쩌지, 가슴이 뛰어.
“서로 외의 다른 이를 마음에 품지 않을 것을 맹세하십니까?”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톤이 다른 목소리가 음악처럼 엮였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사제가 곧장 말을 잇는다.
“그렇다면 두 분, 서로를 마주 보십시오.”
이엘리와 자카리는 마주 잡은 손을 놓고 상대를 응시했다. 두 사람의 뺨은 발갛게 물든 채였다.
“……”
“……”
새싹 같은 눈동자와 짙푸른 눈동자가 서로를 제 안에 담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온 세상에 상대만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압도적인 감각. 넘치는 애정. 두 사람은 저도 몰래 숨을 삼켰다.
“그렇다면 이제, 결혼 맹세를 반려에게 바치십시오.”
사제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엘리는 몸을 조여 오는 긴장감을 느꼈다.
북부의 결혼 맹세는 다른 지역과 다르게 간단하다. 자카리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려 그대로 속삭인다.
“나의 심장과 영혼을 그대에게 바칩니다.”
다만 그 무게감 또한 다른 지역과는 다르다. 심장과 영혼. 한 사람을 구성하는 단둘의 요소.
“그대는 나의 영원한 주인이며, 오 직 단 한 사람의 레이디입니다.”
무릎을 꿇은 자카리가 손등에 키스했다.
북부는 기사의 지역답게, 결혼 맹 세 또한 레이디에게 기사가 맹세를 바치는 구조였다.
자카리의 짙푸른 눈동자가 이엘리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대의 맹세를 받아들입니다.”
이엘리는 최대한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카리의 입술이 닿은 부분이 이상하게 뜨겁다.
“우리의 운명은 함께할 것이며, 영원히 서로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이엘리의 말에 자카리가 작게 미소 짓는 모습이 보였다. 온 세상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행복하게 보이는 미소였다.
이엘리는 그의 손을 잡고 자카리를 일으켰다. 사제가 그들에게 말했다.
“두 분, 서로에게 맹세의 키스를.”
자카리는 이엘리를 기웃이 내려다 보았다.
새하얀 베일 아래의 말간 얼굴, 곱게 내리깐 긴 속눈썹, 붉은 입술. 아샤 요정의 현신인 양 아름다운 그의 아가씨. 자카리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엔.”
그 목소리를 들은 이엘리는 살짝 고개를 치켜 올렸다.
연녹색 눈동자 안쪽으로 도발적인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자카리는 이엘리의 허리에 손을 얹었고, 그대로 끌어당기며 고개를 숙였다.
“……”
흣. 그녀는 신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반쯤 핀 꽃잎처럼 열려 있는 입술 사이를, 자카리는 망설임 없이 파고들었다.
여린 입술을 뜨겁게 두드리며 입 안을 탐하는 농밀한 동작. 그저 가벼운 키스가 아니라, 그녀에 대한 소유욕을 온전히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자카리.”
입술이 떨어졌다. 그녀는 어느새 가빠진 숨을 간신히 고르며 남편을 업지 않게 노려보았다.
“미안, 참을 수가 없었어.”
그토록 격렬한 키스를 한 주제에 자카리는 수줍은 소년처럼 속삭였다.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공작 부부의 다소 과한 키스에, 하객들은 민망함과 흐뭇함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로써 두 분이 영혼으로 묶인 반려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큼큼. 헛기침을 한 사제가 그렇게 선언했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다시 손을 맞잡고 결혼식에 참석해 준 사람들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아샤꽃잎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오후였다.
이후 피로연이 이어졌다. 피로연을 위한 의상으로 갈아입은 공작 부부는 손님들을 접대했다.
‘내가 만들었지만 저 의상들, 참 잘 만들었다니까.’
트란셀 부인은 흐뭇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모든 재능을 쏟아부어 공작 부부의 의상을 만들었는데, 옷 걸이 또한 훌륭하다.
아마 이것으로 트란셀 의상실의 이름은 한껏 높아질 것이었다.
‘역시 티아라를 결혼 예물로 준 건 잘한 일인 것 같군.’
한편 자카리는 은밀한 기쁨을 느꼈다. 이엘리의 손목에는 황제가 보내온 페리도트 팔찌가 걸려 있었음에 도, 귀빈들 중 누구도 황제의 팔찌 따위는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 축하해요.”
“축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그리고 공작 부인.”
황녀와 론도 후작이 이엘리와 자카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황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로렌 백작가문의 사람들은 초대하지 않았네요?”
“네. 저희의 결혼식만큼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보내고 싶었거든요.”
이엘리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황녀는 이해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요, 그 심정 알 것 같네요.”
“황녀 전하와 론도 후작님 모두, 즐거운 시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매끄러운 말에 두 사람이 빙그레 웃었다. 화목하면서도 잔잔한 시간이 이어졌다. 기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만이 함께 모였기에 분위 기는 편안했다.
자작 부인이 딸아이에게 미소했다.
“우리 이엔, 표정이 좋은걸?”
“그, 그거야……”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게 싫은 사람이 어디 있나요.
하지만 차마 그 말은 꺼내지 못한 이엘리는 화르륵 얼굴만을 붉힐 따름이다. 그때 블랑쳇 자작이 자카리를 붙들었다.
“공작 각하.”
“예, 장인어른.”
자카리는 얌전히 대답했다. 그리고 자카리의 ‘장인어른’이란 호칭에 사람들은 헛숨을 삼켰다.
'각하께서 장인어른이라는 호칭을 입에 담으시다니……’
'성인식 때의 소문은 과장된 이야 기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모두 사실인가 보군.’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교환했다. 블랑쳇 자작은 거의 울먹거리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비록 모자란 딸이지만, 그래도 저희 딸을 꼭 행복하게 해 주셔야 합니다. 아셨습니까?”
“당연한 말씀입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럴 것입니다.”
사람들은 목숨까지 운운하는 공작의 태도에 한 번 놀라고, 공작이 진 지한 얼굴로 고개까지 끄덕이는 것을 보며 두 번 놀랐다.
그걸 본 블랑쳇 자작 부인이 미간을 좁히며 제 남편을 말렸다.
“아, 여보. 딸아이가 결혼식을 올리는 자리에 서까지 푼수처럼 굴 거예요?”
“이건 당연히 해야 하는 말이잖소! 우리 이엔이, 이엔이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제 자작은 거의 울먹거리는 얼굴이 되어 버렸다. 아, 창피해. 이엘리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저기, 저 자카리랑 결혼 자체는 이미 한참 전부터 했는데요.”
보다 못한 이엘리가 한심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자작은 지극히 서운한 얼굴이 되어 제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엘리는 팔짱 까지 끼면서 고개를 모로 기울일 따름이었다.
“전 이미 유부녀라고요."
매정한 딸아이의 말에 자작은 크나 큰 상처를 입은 얼굴이 되었다. 자 작이 아내에게 매달렸다.
“들었습니까? 이엔이 하는 말 ..!”
“하지만 맞는 말이잖아요?”
“여보!”
모녀는 쌍으로 블랑쳇 자작을 한심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카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화목한 모습이라니.’
저 가족들이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쪽이 따스해진다. 그때 자작이 말했다.
“뭐, 그래도 이엘리는 꽤 행복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카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작에게 되물었다. 자작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을 잇는다.
“모르셨습니까? 저 아이가 공작 각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자, 잠깐만 아빠! 무, 무슨 말을 하시려고 그래요?!”
이엘리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된 채로 양손을 휘휘 저어 댔다. 당장이라도 제 아버지의 입을 틀어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자카리는 자작의 말을 모조리 듣고 말았다.
‘아.’
자카리를 힐끔 곁눈질하던 이엘리는 한숨을 삼켰다. 어쩌지, 너무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다고.
“……그랬어?”
자카리가 지극히 행복한 얼굴로 이엘리에게 물었다. 이엘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못 살아!
“어, 그게……”
“진짜로 그랬던 거야?”
자카리는 이엘리를 향해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어떡하면 좋아.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이엔, 나 좀 봐 봐.”
“시, 싫어.”
“얼른.”
그가 보채듯 입을 열었다. 자카리가 저렇게 즐거워하던 때가 또 있었 나. 그녀는 살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뺨이 붉어졌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그냥, 기분 좋아서.”
아, 정말. 부끄러움 한 점 없이 그렇게 말하지 말란 말이야. 이엘리는 입 안으로 투덜거렸다.
“정말로 기뻐.”
“……”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지극히 솔직 해진 자카리는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다. 사람들은 잉꼬부부처럼 다정한 공작 부부의 모습을 따사로운 눈으로 지켜봐 주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렸다.
‘아니, 나만 부끄러워!?’
아무래도 이엘리만 부끄러운 게 맞는 것 같다. 다음 순간 자카리가 제 아내를 와락 끌어안은 것이다. 깜짝 놀란 이엘리는 파드득 자신의 어깨를 굳혔다.
“어, 저기……?”
쪽. 뺨에 닿는 자카리의 입술에 이엘리는 얼어붙었다. 황녀와 론도 후작은 흥미진진한 얼굴을 했다. 자카리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따스한 숨과 함께 귓가에 닿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
“이엔. 난…… 진심으로 너를.”
자카리의 얼굴 또한 붉어졌다. 얼굴에 철판을 깐 자카리였지만 차마 끝까지 말하지는 못했다.
“……”
좋아해, 사랑해. 수많은 말이 있었 지만 자신의 감정을 모두 표현하기 엔 부족한 것 같았다.
그때 이엘리가 자카리의 팔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연녹색 눈동자가 자카리를 빤히 올려다본다.
“……좋아해.”
“응?
“나야말로, 진심으로 널 좋아한다 고.”
이엘리는 빠른 말씨로 속삭였다.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이엘리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뭐…… 솔직히 좀 부끄럽긴 하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얼굴을 볼 수 있다니 남는 장사다.
“고마워.”
귀 뒤까지 붉게 물들인 채 자카리가 소곤거렸다. 화창한 하늘 아래, 자카리의 얼굴만이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