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화
“뭐 아예 힘들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카리의 성인식, 그리고 이번 결혼식을 진행하며 이엘리는 긴장감을 느꼈다.
하지만 기분 좋은 긴장감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온전히 믿고 있다는 충만감.
“제가 공작 부인이 됐다는 이유로 이미 특별 취급을 받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뭐,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기는 하 다만……”
“그리고 실은 전, 자카리가 외척에 휘둘린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거든요.”
이엘리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머니의 품에 고개를 기댄 채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면 공작가와 가신 가문 사이의 관계도 나빠질 거고, 우리 집안 도 불편해질 테니까요.”
“이엔.”
물끄러미 딸을 바라보던 자작 부인은 딸을 보듬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네.”
“아이 참, 저도 이제 성인이라고요.”
이엘리가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자작 부인은 그런 딸아이를 새삼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네가 이렇게 어른스러운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하지 못했는데.”
“도대체 절 어떻게 보신 거예요?”
“떼쟁이에 고집쟁이?”
“엄마, 정말.”
이엘리는 입지 않게 어머니를 흘겨 보았다. 웃음을 터뜨린 자작 부인이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엔.”
다정한 눈동자가 이엘리를 자신 안에 소중하게 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보드랍게 휘어진다.
“넌 언제나 나와 네 아빠의 가장 사랑스러운 딸이란다.”
“엄마.”
“그러니까 언제든 힘들면 말해도 돼. 알았지?”
어머니의 시선은 그녀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네.”
폭신하며 달콤한 무언가를 입 안에 가득 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작 부인이 웃었다.
“그럼 이엔, 우리 오랜만에 같이 잘까?”
“좋아요.”
이엘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불 속에 먼저 자리를 잡은 자작부인이 톡톡 옆자리를 두드렸다.
그녀는 마치 다람쥐처럼 어머니의 품을 파고들었다. 모녀는 나란히 손을 잡고 잠들었다.
12. 북부의 안주인 (1)
황제의 호화로운 국혼이 끝났다. 귀족 사회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제국 유일의 공작가로 쏠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공작 부부는 황제 부부와는 다소 다른 방향의 결혼식 노선을 잡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결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소수만을 결혼식에 받아들인 것이다.
“공작가의 청첩장을 받으신 귀족가는 몇 되지 않으신다면서요?”
“그렇다면 이번 청첩장을 받은 가문은 공작가가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봐도 괜찮을까요?”
귀족들은 천성적으로 권력 관계에 예민하다.
게다가 이번에 결혼한 사람들이 헤센바이츠의 새로운 공작 부부라면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황가와 비견할 수 있는 제국 유일의 공작가였다.
“공작 부부께서는 어떤 결혼식을 치르실까요?”
“글쎄요…… 공작가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드무니까요.”
사람들은 공작 부부의 결혼식에 촉 각을 세웠다.
황가의 국혼은 온 제국에 드러나도록 화려하게 치러졌지만, 공작가의 결혼식은 비밀스러웠다. 다만 약간의 소문만이 감질나게 퍼졌다.
“황제 폐하께서 공작가에 축하 선물을 내리셨다고 해요.”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 결혼식과 피로연을 치른다고 하던데요.”
“게다가 트란셀 부인이 계속 공작성에 머물렀다고 들었어요.”
제도에서 유명하다 싶은 레이디들 은 모두 트란셀 부인에게 드레스를 맞출 정도로 그녀는 유명한 디자이너였다. 그런 디자이너를 결혼식 기간 내내 독점할 정도라니.
“게다가…… 공작가의 그 유명한 보석 있잖아요? 아샤의 눈물.”
하나 가장 놀라운 소식은 바로 전 설 속의 보석, ‘아샤의 눈물’이다. 사람들은 잔뜩 흥분했다.
“공작께서는 그 보석을 공작 부인께 결혼 예물로 드렸다고 해요.”
“그 보석은 공작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귀물 아닌가요?”
“그러니까 더욱 놀랍죠! 공작 각하께서 공작 부인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면……”
공작 부인이 받은 엄청난 결혼 예물. 공작가와의 친분을 인정받는 소 수의 귀족들. 청첩장을 받은 사람들. 사람들의 호기심에 불이 붙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와중에 청첩장을 받은 사람들이 일 부드러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공작가와의 친분을 가진 의외의 사람들을 보며 당황했다.
“황녀 전하와 론도 후작님이라니……”
“그러게요. 황녀 전하는 한때 공작 각하와 혼담이 오갔잖아요?”
“게다가 론도 후작님은 황후 폐하의 아버님이실 텐데요.”
의외의 초대에 사람들의 호기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사람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은 채 공작 부부는 침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결혼식 당일 아침.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모였다.
예고했던 대로 공작 부부의 결혼식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참석했다.
비록 황제와 새 황후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대신 공작가에서 공식적으로 청첩장을 받은 황녀가 황가를 대리하여 결혼식에 참석하게 됐다.
“어서 오십시오, 황녀 전하.”
“반갑네. 다시 한 번 이렇게 헤센바이츠 공작성에 방문하게 될 줄이야.”
결혼식 때문에 자리를 비운 공작 부부 대신 공작성의 집사가 직접 귀빈들을 접대했다. 정중한 인사에
황녀는 빙긋 웃었다.
그러면서 공작 부부의 적절한 처신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일부러 블랑쳇 자작 부부는 귀빈의 위치로 물러나 있군.’
손님맞이로 집사를 내세운다는 건, 헤센바이츠 공작가가 외척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다는 무언의 표시다.
예전 로렌 백작가가 공작가를 등에 업고 날뛰던 것을 생각하면 훌륭한 선택이었다.
“론도 후작님,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고맙군."
황후의 아버지인 론도 후작 또한 공작가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조금 놀라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론도 후작은 일찍 아내를 잃고서 딸아이 하나만을 애지중지 길러 왔던 것이었다.
“후작님께서도 대단하시지요.”
“그러게요, 황제 폐하께서 공작 부인께 보이는 호의를 모르시지는 않으실 텐데.”
“하지만 그렇다 해도 공작가와의 끈을 놓는 건 어리석은 짓이긴 하니까요."
소중한 딸이 황제에게 홀대당하는 모습이 과히 보기 좋지 않았을 텐데, 론도 후작은 보란 듯이 이번 결혼식에 참석했다.
공작가와의 친분을 유지하는 귀족. 그 가치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번 참석 때문에 황제 폐하께서 불쾌해하시지는 않을까요?”
“그러지는 못하시겠죠. 황제 페하께서 먼저 황후 폐하를 홀대하신 것 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사람들이 낮게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론도 후작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 결혼식 참석은 황후가 된 딸 아이가 직접 가라며 떠민 일이기도 했으며, 황제에 대한 항의 이기도했다.
‘이번 결혼식에 꼭 참석하세요, 아버지.’
‘황후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 십니까. 황제 폐하께서 황후께 어떻게 행동하셨는데……?’
황후 폐하라는 호칭을 듣는 순간 깊게 가라앉던 딸아이의 눈빛. 황후는 차분하게 입을 연다.
‘그렇기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
'사랑받지 못하는 황후는 제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어려운 법이지요.’
론도 후작은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황후의 고요한 얼굴이 제 아버지를 가만 응시한다.
‘그러니 아버님, 공작가와의 친분을 돈독히 하세요.’
'폐하!’
‘먼저 잘못하신 쪽은 폐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가문을 질책하시기는 어려울 테죠.’
그렇게 말하는 황후의 눈빛에는 약간의 체념이 서려 있었다.
언제나 현명했던 딸.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론도 후작은 씁쓸한 감회에 젖어야했다.
“론도 후작.”
“아, 황녀 전하.”
그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론도 후작이 슬쩍 곁을 돌아보았다. 황녀 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곁에 앉아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론도 후작은 제 옆자리를 권했다. 황녀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침묵하던 황녀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황녀께서 무엇이 죄송하십니까.”
“그냥…… 황가의 일원으로서 대신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그 말에 론도 후작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황녀는 눈이 부신 것처럼 살짝 눈매를 찡그렸다.
“오늘 결혼식.”
“……”
“……무척 아름다운 결혼식이 될 것 같습니다.”
론도 후작의 말에 황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치 렸음에도 전혀 행복해질 수 없었던 아리따운 아가씨 한 명을.
활짝 핀 아샤꽃잎이 화사하게 나부꼈다. 소수의 하객만을 모은 결혼 식은 야외에서 진행되었다.
결혼식을 위해 공작 부부는 공작성의 정원을 개방했다.
정원 곳곳을 장식한 장식은 화려하 진 않았지만 고급스러웠다.
친밀한 사람들만이 모였기에 결혼 식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세상이 온통 분홍색이네요.”
황녀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제의 것과 온도가 다른 회색 눈동자가 곱게 흰다.
“마치 공작 부인을 위한 날 같은 걸요.”
온통 분홍색으로 물든 세상은 이엘리의 분홍색 머리카락과 꼭 닮아 있다.
론도 후작은 고개를 끄덕여 황녀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에 앉은 채 작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도 공작령의 아샤 축제는 어김없이 진행되나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새로운 공작부부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 규모가 무척 크다던데요.”
“아, 그런가요? 제도의 아샤 축제는 올해는 생략한 걸로 알아서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흥미진진한 얼굴이 되었다. 그들은 그대로 결혼식의 정경을 본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한 명 등장했군요.”
론도 후작이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 멀리 공작이 나타난 것이다. 새하얀 은발을 깔끔하게 빗어 넘기
고, 말끔한 예복을 차려입은 공작은 동화 속의 기사 같았다. 우아한 맹수가 저럴까.
“……”
공작은 느른한 눈동자로 하객들을 돌아보았다.
살짝 고개를 숙여 손님들에게 감사 인사를 표한 공작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길게 깔린 주단을 밟으며 공작은 사제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 이제 공작 부인이 오실 차례인가……”
론도 후작의 말이 씨라도 된 것처럼, 저 멀리서 약간의 소란이 들려 왔다.
황녀와 후작을 포함한 하객들은 두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저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사가 군데 군데에서 들렸다.
“공작 부인이신가요?”
“세상에, 너무 아름다우세요.”
그 찬사는 입바른 말이 아니었다. 새하얀 베일이 안개처럼 흔들린다.
레이스 자수가 섬세하게 들어간 드레스는 푸르게 보일 정도로 희었다. 끝자락은 흰 장미처럼 우아하게 부 풀려져 있었다.
“그런데 저건……?”
“티아라네요.”
사람들은 놀란 눈빛을 했다. 공작 부인의 머리 위로는 새하얀 티아라가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티아라를 선택한 것 자체가 황가에 대한 도전이었다.
“설마, 티아라에 박힌 저 보석이……?”
백금으로 아샤 화관을 형상화한 새 하얀 티아라의 중앙에는, 엄지만 한 분홍색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잎사귀는 최상급의 에메랄드로 만 들었다. 반짝거리는 그 빛이 눈안을 간지럽힌다.
“결혼 예물로 공작 부인께서 ‘아샤의 눈물’을 받으셨다는 소문은…… 사실이었군요.”
한숨처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샤의 눈물. 은룡과 아샤 요정의 전설이 담긴 공작가의 가보.
‘……하지만 티아라라니, 황녀께서 불쾌해하실지도 모르겠는데.’
사람들은 저도 몰래 황녀를 흘끗 곁눈질했다. 하지만 황녀는 오히려 즐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이런. 아무래도 공작 부부께서 단단히 마음을 다잡으신 것 같네요.”
“그렇죠?”
“게다가 저 티아라, 공작 부인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걸요.”
황녀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중얼거렸다. 론도 후작 또한 유한 얼굴이었다. 황녀가 불쾌해하지 않으면 마음 졸일 이유도 없다. 하객들 은 안도한 표정을 했다.
‘이엔.’
자카리는 홀린 듯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온 세상의 색깔은 사라지고 오로지 이엘리만이 빛났다. 세상에, 이엘리가 저렇게 예뻤던가? 아니 원래도 예쁘긴 했지만 저건 너무, 너무나도……
‘……요정 같아.’
다소 진부한 찬사였으나 자카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전설 속 은룡이 어째서 아샤 요정을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카리가 지금 그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