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화
마치 세상의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자카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색하게 웃던 그녀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넌 아샤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거 아니야?”
“예전 일이지.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난 뭐든 좋아.”
자카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엘리를 닮은 분홍색 꽃.
게다가 아샤꽃은 여러모로 상징성이 있는 꽃이기도했다. 황가와 공작가가 동시에 가문의 문장으로 삼아 신경전을 벌이는 꽃.
“하긴, 황제 폐하의 신경을 긁기에는 딱 알맞은 모양새이긴 하지만……”
이엘리는 한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런 이엘리를 바라보던 자카리가 빙긋 눈웃음을 쳤다.
“그보다 이엔, 웨딩드레스는 언제 가봉해? 장모님이 오신다고 들었는데.”
“아, 응. 어머니는 내일쯤 도착하신다고 했으니까…… 그때 함께 가봉 하기로 했어.”
결혼 준비는 대부분 신부의 어머니 가 도와주곤 한다. 하지만 이엘리는 지금까지 결혼식 준비를 혼자 맡아 서 진행했다.
자카리가 부모님을 일찍 모셔 오라고 말했지만 그녀가 거절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 부모님께서 북부의 영지를 새로 받는 건…… 어찌 보면 특혜잖아.’
‘넌 헤센바이츠의 공작 부인이야. 내 장인과 장모께서 이런 대우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자카리, 가족일수록 이런 문제는 더 엄격해야 하는 지야.’
이엘리는 고개를 커다랗게 가로저었다. 자카리는 이엘리의 단호한 얼굴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내 부모님의 안전을 위해 북부로 모셔 오는 건 맞지만, 그 이상의 특혜는 받고 싶지 않아.’
게다가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새로 운 공작 부부가 외척에게 휘둘린다는 말 또한 사양이었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로렌 백작 부인이라는 불편한 예시를 이미 겪어 봤잖아?’
'이엔.’
‘영지를 내려 준 것만으로도 충분 해. 그러니까 이번 결혼식은 내 힘으로 진행할 수 있어.’
그리하여 이엘리의 부모님은 딸의 결혼식에 귀빈으로서 참석만 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던 자카리는 문득 이엘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결혼식은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될 테니까.”
“그래, 널 믿어.”
다정한 대답에 가슴 한구석이 깃털 로 문지르는 것처럼 간지러워진다. 자카리가 질문을 했다.
“그래서 내일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오신다고?”
“응. 아침 일찍 도착하신다고 했 어.”
드레스만 가봉하게 되면 결혼식 준비는 모조리 끝난다. 손님을 맞을 피로연 준비도 모두 완벽하다.
이엘리는 흘끗 창밖을 내다보았다. 터지기 직전의 꽃망울을 양팔에 가득 얹은 아샤나무가 봄바람을 머금고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엘리는 행복하게 미소했다.
‘봄의 신부가 될 줄은 몰랐네.’
며칠이 지나면 아샤꽃이 활짝 무리 지어 피어날 것이다. 이엘리는 옅은 감회에 젖어 물었다.
“자카리, 기억나?”
“뭐가?”
“우리 함께 아샤 축제에 나갔던 때.”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자카리는 축제에서 이엘리를 앞에 둔 채 폭주를 경험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소리 하나에 순식간에 가라앉던 분노란.
“그때도 이렇게 아샤꽃이 활짝 피 었었는데.”
턱을 된 채 창밖을 올려다보는 이엘리의 뒷모습이 가늘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세상 모든 것을 믿지 못하고 날카롭게 날을 세우던 자신, 그리고 순 식간에 거리를 좁히던 그녀.
‘하지만 난 널 만나면서 변할 수 있었어.’
자카리는 행복하게 웃었다. 이엘리는 자카리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녀가 부드럽게 소곤거린다.
“그때 우리, 성인이 되면 함께 아샤 축제에서 춤을 추기로 했었는데.”
“그랬었지.”
자카리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의 그들은 아직 성년이 아니었다. 그랬 기에 성년이 되면 꼭 함께 춤을 추 자고 약속했는데.
곰곰이 고민하던 이엘리는 살포시 눈매를 접으며 입을 열었다.
“올해 아샤 축제는 결혼식과 겹치니까 좀 그렇고. 내년쯤?”
“그래, 그땐 꼭 같이 춤을 추는 거야.”
두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손가락을 걸며 키득거렸다. 가슴 깊은 곳부터 따스함이 번져 나갔다.
그리고 이튿날. 블랑쳇 자작 부부 가 헤센바이츠 공작성에 도착했다. 이엘리는 잔뜩 신이 났다.
“엄마!”
“이엔!”
날듯이 달려간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작 부인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자작이 삐죽댄다.
“넌 이 아빠는 보이지도 않니?”
“아빠도 보고 싶었어요!”
까르르 웃던 그녀가 말했다. 그러 던 중, 자작 부인이 이엘리의 뺨을 꼬집으면서 잔소리를 했다.
“넌 집에는 들르지도 않고 바로 공작성에 내려오니?”
“미, 미안해요. 그게, 자카리의 일 이 너무 급했던 바람에……”
“딸랑 편지 한 통 보내고 홀랑 내려오다니, 딸자식 키워봤자 소용도 없어!”
서로 반가움을 나누는 가족에게 자카리가 머뭇대며 다가왔다. 자카리는 마른 입술을 할았다.
“죄송합니다, 이엘리를 마음고생 시켜서……”
자카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작 부부는 이엘리를 감싸 안은 채 사나운 눈으로 자카리를 흘겨보았다.
자카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자작 부인이 날카롭게 말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다면.”
블랑쳇 자작 부부는 호의라고는 전 혀 남아 있지 않은 시선으로, 자카리를 뚫어져라 노려본다.
“이번에는 저희가 이엘리를 공작 각하와 이혼시킬 거예요.”
“……예, 반성하고 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자카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자작이 한숨을 쉰다.
“하지만, 뭐.”
“예?, ’
“전대 공작님께서 돌아가시다 니…… 공작 각하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걱정스러운 음성에 울컥 마음이 흔들렸다. 이 가족들은 어째서 이렇게 다정하고 따스한지.
이상하게 눈가가 젖어 들 것 같아 자카리는 입술을 물었다. 자작 부인 이 한 마디 말을 덧붙인다.
“많이 힘드셨죠?”
“아니…… 아닙니다.”
“아버지를 잃었는데 힘들지 않을 리가 없죠.”
두 부부는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눈썹을 찡그린 채, 자작 부인이 다정하게 입을 연다.
“우리 이엔이 공작님을 대뜸 찾아 간 것도 이해는 할 수 있어요.”
자카리는 침묵했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였다. 자작 부인은 엄하게 말을 잇는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 이엔을 또 울리면 안 돼요.”
“엄마.”
“애가 말이예요, 얼마나 슬퍼하던지 살이 쪽 빠졌었다고요. 알아요?”
“엄마!”
아, 창피해 죽을 것 같아!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그녀가 자작 부인의 옷깃을 마구 잡아당겼다.
“우리 화해했어요! 화해한 지 오래 라니까요!?”
“아니, 왜!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아아아, 엄마아! 제발!”
“네가 그때 계속 방에 틀어박혀 있는 바람에, 엄마가 얼마나 속상했는 지 알아!?”
아옹다옹 말다툼을 하는 모녀와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버지. 자카리가 언제나 바라 왔던 이상적인 가족이었다.
어찜 저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는 지.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웨딩드레스를 가봉하고 마지막으로 몸의 치수를 맞추었다. 자카리는 내심 이엘리의 웨딩드레스 차림이 궁금했지만, 보통 남편은 아내의 드레스 차림은 결혼식 당일에 보는 게 예의였다.
“이제 절대로 몸의 치수가 바뀌어 서는 안 돼요. 알았죠?"
트란셸 부인은 엄격하게 입을 열었다. 그 표정이 어찌나 단호한지, 이엘리는 살짝 얼어 버렸다.
“네, 그렇게 할게요."
“약속하셔야 해요. 더 이상 밤에 간식을 챙겨 드시는 건 안 돼요.”
“네에.”
이엘리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밤에 먹는 쿠키가 꿀맛인데. 내 삶의 낙 이 이렇게 사라지는구나.
“좋아요.”
줄자와 시침핀 따위를 챙겨 든 트란셀 부인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부드럽게 말을 덧붙인다.
“아마 공작 부인께서는 결혼식 날,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실 거예요.”
“고마워요.”
이엘리는 생긋 웃었다. 마지막으로 미소를 남긴 트란셀 부인이 방을 빠져나갔다.
옷을 갈아입은 이엘리는 어머니의 무릎에 매달렸다. 이엘리의 연녹색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엄마, 저 아까 웨딩드레스 입었을 때…… 어땠어요? 예뻤어요?”
“뭐, 그 정도면 봐 줄 만하긴 했 지.”
자작 부인은 부러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엘리는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재차 캐물었다.
“그럼 자카리도 절 예쁘다고 생각 해 줄까요?”
“글쎄……”
자작 부인이 눈동자를 굴렸다. 그 이후 딸아이의 보드라운 뺨을 꼬집으며 농담처럼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공작님께서는 네가 거적만 걸치고 있어도 예쁘다 고 하실 것 같은데.”
“아, 정말. 그건 아니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딸의 뺨에는 홍 조가 드리워져 있었다. 물끄러미 딸을 보던 부인이 물었다.
“이엔. 공작 각하가 그렇게 좋니?”
“……”
아픈 뺨을 문지르던 이엘리는 그 물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자작 부인은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얼마나 진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게, 귀 뒤까지 새 빨갛게 물든 것이다.
“……얼굴이 무슨, 잘 익은 토마토 같구나.”
자작 부인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이엘리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자작 부인은 딸을 끌어안았다.
“그래, 네가 좋다면.”
“엄마?”
“엄마는 네가 행복한 게 가장 기쁘 단다.”
다정한 목소리를 귀담아듣던 이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고마워요.”
이엘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 갔다. 모녀는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깊은 포옹을 나눴다.
그리고 결혼식 전날. 이엘리는 침 대에 누운 채 작게 뒤척거렸다. 이 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심란한지 모르겠네.’
이엘리는 한숨을 삼켰다. 결혼식이 라. 자카리와의 결혼 생활 자체는 오래 지속해 왔는데도 묘하게 가슴 이 두근거렸다. 아가씨란 호칭을 버리고 공작 부인이라는 호칭을 갖는 것도 그렇다.
‘……지금 자카리는 어떤 기분일 까?’
어둠 속에서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피부 미용을 위해서라도 일찍 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들었는 데, 가슴이 뛰어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이엘리는 억지로 눈을 꼭 내리감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해, 이엔. 자자. 이제는 진짜 자야 해.’
그런데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이엘리는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잠이 오지 않니?”
방문 너머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자작 부인이었다. 자작 부인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럴 만 하다고요?”
“결혼식 전날이잖니. 심란한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
그렇게 말한 자작 부인이 한숨처럼 미소했다. 딸아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을 잇는다.
“그러고 보니,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커서 결혼식까지 치르게 된 건 지……”
가만히 자작 부인을 바라보던 이엘리가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그녀가 황급히 방문을 열었다.
“아, 엄마. 우선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래.”
두 모녀는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았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어머니는 이엘리의 어깨를 끌어
안고 토닥거렸다. 그녀는 폭신한 어머니의 품에 고개를 기대며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이번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힘든 건 없었고?”
“응, 괜찮았어요. 예산도 넉넉했고, 공작성 사람들도 많이 도와줬거든 요.”
“그래도 엄마가 도와줄 수 있었다 면 좋았을 텐데. 공작님은 도와주시기 어려웠을 것 아니니.”
자작 부인이 안쓰러운 얼굴로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이엘리는 시선을 들어 올리며 생글거린다.
“괜찮아요. 자카리도 자카리 나름 대로 바빴는걸요.”
“뭐, 그거야…… 공작께서도 작위를 이으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긴 하지만.”
자작 부인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마한 귀족가도 새로 가주 직위를 승계하면 챙겨야 할 일이 많다.
게다가 그는 안정적인 승계가 아니라 선대 공작의 죽음 때문에 작위를 이었다.
“이런 행사는 안주인이 준비해야 할 행사잖아요? 그러니까 번거롭게 하긴 싫었어요.”
이엘리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작 부인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딸아이를 응시했다.
“게다가 이미 자카리에게 영지까지 받았는걸요. 이 정도 도움이면 충분 해요.”
“그래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