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그것만으로는 마음에 차지 않으신 다면, 원하는 모든 보석을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마치 커다란 은혜를 베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던 황제의 말투. 번뜩이던 그 시선.
‘다만 그 팔찌는 벗어 주셨으면 하는군요.’
재수 없는 자식. 그 당시를 회상하던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카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엔……”
“아, 응?”
이엘리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이엘리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젠장. 그 자식, 이엘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래, 한번 보고 결정하자.”
한숨을 삼키며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자카리의 가슴에 고개를 기댔다.
“저기, 자카리. 화난 거 아니지?”
“내가 왜 너한테 화를 내.”
찢어 죽일 자식은 감히 너에게 질척거리는 그 자식이지. 자카리는 사납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개자식이 이따위로 굴다니.’
자카리는 입 안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자카리는 걸어오는 싸움은 거절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황제가 보내온 화려한 페리도트 팔찌는 가느다란 금 사슬로 엮은 팔찌 위로 보석을 정교하게 박아 넣은 것이었다.
진귀한 보석에 더해, 세공비가 엄청났을 것 같았다.
“……”
자카리의 기분은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제 아내가 가진 눈동자 색깔과 꼭 닮은 페리도트의 빛깔은, 마치 황제가 이엘리에게 얼마만큼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반증하는 것 같았다.
“역시 이 팔찌, 돌려보내는 게 나을까?”
대답 없이, 팔찌만을 돌려 보던 자카리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내뱉듯 말했다.
“아니.”
“하지만.”
“우리가 이걸 돌려보내는 것 자체 가 황제에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 질 수 있으니까.”
자카리는 황제가 정신적으로나마 자신이 승리했다고 여길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아마 이 팔찌를 돌려보내면, 황제는 ‘그녀가 자신을 의식했기에’ 선물을 돌려보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지.’
자카리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손가락 안에서 가느다란 사슬 이 찰랑찰랑 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이엘리에게 이 팔찌를 그대로 착용하게 할 수도 없고.’
그녀의 일에 한해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보석은 보통 연인이나 남편에게 선물한다. 황제는 이 선물을 통해 자신이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이엔.”
“응? ”
“그 팔찌, 착용하도록 해.”
자카리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뭐라고?”
“이왕 황제가 귀하신 선물을 내렸으니 그 명예로움을 온전히 누려야 지. 대신……”
사실 황제가 선물을 내렸다는 것 자체는 가문의 명예였다. 만약 그 선물을 거절한다면 오히려 공작가가 치졸하게 보일 터.
자카리의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났다. 그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내가 어떻게든 그 팔찌를 초라하게 만들 수 있을 물건을 선물할 테니까.”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당황한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물었다. 자카리는 묘한 호승심을 머금은 눈동자로 말을 잇는다.
“황제의 선물을 돌려보내는 치졸함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 선물이 주목받지 않게 하려면.”
“저기, 자카리?”
“그 팔찌를 압도하는 보석을 내가 선물한 이후, 넌 그걸 함께 착용하 면 되는 거야.”
“……”
자카리의 기백에 밀린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자카리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내 생각에는 티아라가 좋을 것 같아.”
“티, 티아라?”
“그래.”
티아라를 포함한 왕관 형태를 가진 머리 장식은 고귀한 여성들에게만 허락되는 물건이다.
원칙적으로는 황족의 직계 여성과 공작가의 안주인, 그리고 공녀까지만 허락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원칙일 뿐, 타국의 왕녀들도 제국에 들어올 땐 그런 머리 장식은 자제하는걸.’
물론 공작가의 세력은 웬만한 왕가에 비견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공작가는 리펜베르크 제국의 작위를 가 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팔찌에 대응하는 물건으로 자카리는 티아라를 선택했다. 그건……
‘아무래도 자카리, 황제의 속을 어떻게든 긁어 놓고 싶은 것 같은데.’
이엘리는 자카리를 흘끗 곁눈질했다. 하지만 말린다 해도 그가 제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뭐, 네 마음대로 해.”
그녀는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호승심이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기대해도 좋아, 이엔.”
“내가 아무리 기대한다 해도 넌 그 기대를 훌쩍 뛰어넘겠지.”
이엘리는 불퉁하게 대답했다. 자카리는 두 눈을 곱게 휘었다.
그녀는 투덜거리며 말을 잇는다.
“이미 넌 이번 결혼식 준비에서도 날 몇 번이나 놀라게 했는걸.”
“그렇다면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게 노력해야겠는걸.”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허리를 숙여 이엘리의 뺨에 짧게 키스를 남겼다.
“그럼 난 먼저 가 볼게.”
“벌써?”
“응. 준비할 게 좀 있어서.”
“그래, 뭐.”
이엘리는 붉어진 뺨을 숨기면서 조그맣게 대답했다.
느닷없는 입맞춤에는 이미 익숙해 졌지만, 제멋대로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 없다. 아 정말, 언제 저렇게 자라서.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이엘리와 헤어진 자카리가 제일 먼저 불러낸 사람은 바로 집사였다.
느닷없는 공작의 소환에 집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집사를 앞에 두고 자카리는 폭탄 발언을 했다.
“아샤의 눈물을 사용할 생각이야.”
“……아샤의 눈물이요?”
기겁한 집사가 저도 모르게 자카리에게 되물었다. 자카리는 뚱한 표정으로 집사에게 말했다.
“왜, 문제 있나?”
당연히 문제가 있지요! 집사는 그렇게 항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아샤의 별’은 공작가에 대대손손 전해져 내려오는 가장 귀한 보석 중 하나다.
요정 아샤가 홀린 눈물을 은룡이 얼음으로 굳혀 만들었다는, 낭만적인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분홍색 다이아몬드였다.
“아샤의 눈물을 어디에 사용하실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엘리가 쓸 티아라에 장식할 생각이야.”
“……”
당당한 대답을 들으며 집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공작가의 가주가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은 알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자카리는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황제가 이엘리에게 팔찌를 선물했더군.”
“……예,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집사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황제가 그들의 안주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건 집사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심정까지 뒤틀리는데, 공작의 심정은 어떨 것인가.
“집사도 잘 알다시피 그 팔찌를 되돌려 보낼 수는 없지.”
“각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건 헤센바이츠의 자존심 문제니까. 그렇다면……”
자카리는 슬쩍 시선을 기울였다. 싸늘하게 빛나는 그의 시선이 집사의 얼굴을 더듬어 내린다.
“황제가 선물한 보석을 압살할 정 도의 다른 보석을 이엘리에게 선사 하면 되는 게 아닌가.”
“각하.”
집사는 어떻게든 자카리를 말리려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헤센바이츠에서도 전설적인 보석을 고작 자존심 싸움에 사용하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여전히 단호했다.
“사람은 가끔씩, 자신이 이성적이 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지르게 되는 일이 있지.”
공작은 이엘리에 대한 자신의 지극 한 소유욕을 인정했다. 집사는 가만히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샤의 눈물은…… 가장 유명한 세공사를 불러와서 티아라로 세공하도록 해.”
“……티아라 말씀이십니까?"
“그래. 결혼식 당일 그녀의 머리에 씌울 수 있도록.”
자카리는 문득 이엘리를 떠올렸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자신을 구원해 주었던 그녀.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받은 수많은 것들 중 일부도 되갚지 못했다. 자카리는 곧장 말을 이었다.
“그날 하루만큼은…… 이엘리를 이 세상의 주인처럼 만들어 주고 싶어.”
자카리가 티아라를 선택한 것에 집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 아들의 작위 계승을 걱정하여 온건한 태도를 보였던 전대 공작과는 다르게, 자카리는 황가에게 호전 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는 절대 제 마음을 꺾지 않으시겠지.’
이엘리에 관련한 일이라면 절대 물러나지 않는 자카리 아닌가. 집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아 참.”
그때 자카리가 문득 입을 열었다. 막 방을 빠져나가려던 집사가 슬며시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예?”
“티아라의 모양은……”
자카리는 잠시 고민하는 낯을 했다. 턱을 관 자카리가 집사를 향해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연다.
“화관이 좋겠군.”
“화관이요?”
“그래. 아샤꽃을 엮어 만든 화관 말일세.”
아샤꽃송이를 닮은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 아샤꽃만큼 이엘리에게 어울리는 장식도 없었다.
“말씀 전해 두겠습니다.”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인 집사가 방을 빠져 나갔다.
자카리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자카리도 신년 무도회 때 이엘리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이미 들
었다.
“……”
감히 나의 그녀에게. 자카리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짜증스레 입술을 짓씹었다.
이엘리는 시험적으로 황제가 선물해 준 팔찌를 차 보았다.
희고 가느다란 손목 위, 찰랑거리는 금제 사슬과 엮은 연녹색 페리도트는 꽤 잘 어울렸다.
자카리는 매우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엔.”
“응?”
“……예쁘네.”
그녀에게 치졸해 보이고 싶지는 않아, 차마 ‘당장 그거 벗어’라곤 말하지 못하는 자카리였다.
“하지만 난 네 선물이 더 기대되는 걸.”
그러나 눈치 빠른 이엘리는 냉큼 팔찌를 벗어 버렸다. 자카리를 향해 웃는 미소가 어여쁘다.
“그렇지 않아도 너에게 줄 티아라는 이미 준비하고 있으니까.”
“……으응……”
이엘리는 머쓱한 얼굴을 했다. 황제의 팔찌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 이었는데 어찐지 조금 뜻이 곡해된 것 같다.
자카리는 이엘리의 뺨을 어루만지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달콤하게 속삭인다.
“빨리 네가 그 티아라를 쓴 모습을 보고 싶어.”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가의 전설적인 보석을 사용한다는 건 좀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자카리가 날 얼마나 생각해 주는지 알 것 같아.’
이엘리는 그 점이 행복했다. 살포 시 뺨을 붉히는 그 모습이 귀여워 자카리는 웃었다.
그괴고 며칠 후,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때. 그녀는 자카리에게 티아라 하나를 선물 받았다.
“……정말로 이거 받아도 돼?”
그녀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건 너무 화려하잖아.
제국의 황녀인 안네로제도 이런 티아라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자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널 위해 만든 거니까.”
“하지만……”
이엘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손에 들린 티아라는 아샤꽃을 형상 화한 화관 모양이었다.
“이걸 머리에 쓰면…… 적어도 성 한채는 머리에 이고 있는 기분이겠는데?”
백금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세공한 티아라였다.
꽃잎은 분홍색 수정으로 표현했으며, 티아라의 중앙엔 ‘아샤의 눈물’ 이라 불리는 다이아몬드가 빛을 발했다. 잎사귀는 에메랄드로 만들었다.
“그게 뭐가 어때서?”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어차피 자카리가 이런 식으로 나을 땐, 웬만해선 말도 듣지 않는다.
“마음에 안 들어?”
그때 자카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카리는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을 잇는다.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새로 맞추도록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깜짝 놀란 그녀가 마구 고개를 저었다. 티아라 때문에 손이 무거워, 차마 손은 흔들지 못했다.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너무 예뻐 서……!"
“그렇다면 다행이고.”
자카리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저렇게 잘생긴 건 반칙이야. 이엘리는 새침하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 고마워. 이렇게 예쁜 물건을 받을 줄은 몰랐어.”
그녀는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마 이엘리가 가진 모든 물건을 통틀어 봐도 이 티아라보다 아름다운 물건은 없을 터다.
자카리는 당연한 얼굴을 했다.
“네가 사용할 물건이니까.”
“음……”
“네 물건은 뭐든지 최고여야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