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96)

94 화

“이미 국혼을 통해 눈이 높아진 귀족들이 방문하기엔, 북부는 번거로운 장소일 거예요.”

그녀의 말에 집사는 마음이 무거워 졌는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여상히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공작가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건, 황제 페하에게 밉보일 수 있는 여지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초대를 통해 불러 모으는 게 아니 라, 다른 귀족들이 이 결혼식에 오 고 싶도록 만들어야죠.”

이엘리는 단순명쾌하게 말을 맺었다. 집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녀는 빙그레 눈웃음 쳤다.

“전 소수의 친분이 있는 사람들만 이 참석할 수 있는 결혼식을 만들고 싶어요.”

“소수의 친분이 있는 사람들만이 참석한다고요……?”

“네. 이 결혼식에 초대받는 사람은, 공작가의 호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도록요.”

그녀는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 집사를 마주 보았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집사에게 말을 잇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공작가의 결혼식에 먼저 참석하려고 하겠죠.”

집사는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이엘리는 사악한 소악마처럼 웃었다.

“제국 유일의 공작가와 특별한 친분을 가진 가문이라고 여겨지는 건……”

목소리가 느른하게 깔렸다. 이엘리는 턱을 된 채로, 흘끗 집사를 곁눈질하며 작게 소곤거렸다.

“……귀족들에게도 꽤 구미가 당기는 일 아니겠어요?”

그 말에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트란셀 부인까지 내심 깜짝 놀랐다.

저런 식으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 질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하면, 황가의 국혼에도 밀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어쨌거나 공작가의 결혼식이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될 정도로 특별하기만 하면 되잖아요?”

이엘리의 물음에 집사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결연한 얼굴이 되어 그녀에게 답한다.

“그럼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

“그래요. 그 문제는 그렇게 해결하도록 하고…… 아 참,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이엘리는 살며시 제 고개를 기울였다. 그 이후, 한 마디 말을 덧붙인다.

“특히 손님을 대접할 때, 음식에 있어서는 소홀함이 없도록 해요.”

“음식이요?”

“네. 결혼식 이후 이어지는 피로연에서, 손님들이 식사에 불만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이럴 때 내가 가진 한국인의 피를 느낄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굳이 그렇게 말하고 마는 것은,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엘리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결혼식장에는 밥 먹으러 가는 거잖아.’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전생을 떠 올려 보면, 남의 결혼식에 참석하며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식사였다.

솔직히 신부가 어떤 드레스를 입었는지는 기억조차 남지 않지만, 음식 메뉴는 남는다.

‘결혼식에 초대받은 사람을 어떻게 대접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음식과 편안한 자리, 즐거운 분위 기. 그게 행사의 인상을 결정한다. 물론 여기는 한국이 아니니 대귀족의 품위를 지켜야겠지만, 이엘리는 개인적으로 저런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여겼다.

“예,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하객들에게 드릴 답례품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작년에 만들어 뒀던 아샤꽃 잼과 차를 모두 꺼내면 얼추 분량은 맞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트란셀 부인은 호기심으로 귀를 쫑긋거렸다.

아샤꽃으로 만든 잼과 차? 꽃으로 만든 잼과 차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좋아요. 뭔가 제게 더 할 말이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요.”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쳤다. 집 사가 방을 나서고, 이엘리는 트란셀 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미안해요.”

“아니예요. 아무래도 하셔야 할 이야기가 많으셨을 테니까요.”

“뭐, 조금은 그렇죠.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이엘리는 미안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부인은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이엘리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방금, 답례품으로 아샤꽃 잼과 차를 준비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아, 그거요? 사실 별건 아니고요.”

이엘리는 눈을 접으면서 웃었다. 제도 사람에게 호기심을 이끌어 내 다니 이만하면 성공이네.

“아샤꽃을 이용해서 잼과 차를 만 든 거예요.”

“그게 가능한가요?”

“네. 하지만 좋은 꽃을 고르고, 설탕의 비율도 섬세하게 맞춰야 해요.”

꽃차와 꽃 점은 전생의 기억을 떠 올린 이엘리가 만든 거였다. 한국에서는 봄이 되면 한창 벚꽃을 이용한 음식들이 쏟아져 나오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그녀는 벚꽃 잼과 차를 좋아했다.

‘모양도 예쁜데다가 맛도 좋으니까.’

이왕 헤센바이츠의 상징화를 이용 해서 만들었으니, 황가를 견제할 겸 이번에 결혼식 답례품으로 내놓을 생각이다. 고개를 끄덕인 부인은 드레스를 디자인한 종이를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그렇군요. 아 참, 웨딩드레스를 몇 가지 디자인해 봤어요. 한번 확인해 주시겠어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이엘리는 그림이 그려진 종이들을 살펴보았다.

꼼꼼히 내려다보던 그녀가 몇 가지 스케치들을 추려 내려놓는다. 그 스케치들은 몸에 달라붙는 형식의 드레스였다.

“음, 전 치마가 풍성한 디자인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공작 부인은 주관이 확실하며 세심한 성미였다.

이엘리가 골라낸 스케치들을 치우면서, 트란셀 부인은 그 정보를 머릿속에 기록해 두었다. 귀한 손님에 대한 정보는 기억해 두는 편이 좋다.

“아무래도 이 결혼에 흠을 잡으려는 사람들도 좀 있을 테니까요…… 제 말씀, 이해하시죠?”

농담처럼 한 마디 덧붙인 이엘리는 씩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부인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드레스의 디자인은 격식을 차리는 쪽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그런 의상은, 다른 분들이 입는다면 다소 고루하다는 평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부인이 이엘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앞의 어린 공작 부인은 유행을 선 도하는 모델이 될 거다.

“……그래도 옷은 입는 사람에 따 라 여러 방향으로 표현되는 법이니까요.”

“그 말, 저에 대한 칭찬으로 알아 들어도 되나요?”

“물론이죠.”

트란셸 부인도 이엘리를 마주 보며 웃었다. 두 사람은 곧 드레스와 기타 장신구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엘리는 주관이 강한 고객이었다. 생글거리면서 제가 할 말은 모 두 다 한다.

“웨딩드레스는 최대한 베일과 어우러지는 쪽으로 하고…… 피로연의 드레스는 어떻게 할까요?”

“그땐 손님들을 맞아야 하거든요. 그러니 너무 무겁지 않고 움직이는 것도 편했으면 해요.”

“알겠습니다. 참고하도록 할게요.”

부인은 그녀의 요청을 부지런히 받아 적었다. 그러던 중, 펜을 손에서 굴리며 부인이 물었다.

“그런데 레이디 헤센바이츠,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네?”

“성의 사람들이 다들 레이디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 같아서요.”

호칭 정리가 되지 않았느냐는 무언의 발언이다. 두 눈을 깜빡이던 이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제가 지금까지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오래 불리다 보니.”

그러고 보면 그 깐깐한 집사까지 그녀를 아가씨로 부른다. 이엘리는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결혼식 전까지는 호칭을 유지하기로 했어요. 저도 부인이라는 호칭은 좀 어색해서요.”

사실 ‘아가씨’라는 호칭 자체는 격의 없는 호칭이긴 했다.

그녀가 어렸을 적 자카리와 처음 결혼했을 때, 전대 공작이 그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을 시절 부르던 호칭이었던 것이었다.

‘지금은 그 호칭에 얼마나 큰 애정이 담겨 있는지 아는걸.’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이엘리를 부르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러니 공작 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넘어가기 전 그 호칭이 주는 온기를 충분히 누리고 싶었다. 이엘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결혼식이 끝나면 아마 호칭이 변경될 거라고 봐요.”

“그렇군요……”

트란셀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오렴.”

이엘리는 목소리를 높이며 입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메리였다.

“아가씨.”

“무슨 일이니?”

메리가 종종걸음으로 이엘리의 곁에 다가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메리 가 조그맣게 입을 연다.

“아가씨 앞으로 결혼 선물이 도착 했어요.”

“내게?”

이엘리는 의아한 낯을 했다. 이상하게 결혼 선물 이야기를 하는 메리의 표정이 불편해 보인다.

“선물에 무슨 문제라도 있니?”

“아니요, 그런 건 아니예요.”

“그렇다면 선물을 보내온 사람에게 문제가 있나 보구나.”

이엘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자갈이 가슴속을 굴러다니는 것처럼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누가 보냈기에 그러니?”

“그것이……”

이건 이엘리가 반가워할 만한 소식 이 아니다. 눈치를 살피던 메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오신 거예요.”

“뭐라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확 구겨 버렸다. 아니, 결혼식까지 치른 황제가 여기서 왜 나와?

황제의 결혼 선물을 뜯어본 이엘리는, 아무래도 이 선물에 대해 자카리와 논의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 혼자서 받거나 받지 않거나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고가의 물건이었다.

‘아, 자카리다.’

그리하여 이엘리는 자카리를 찾아 나섰다. 자카리는 기사들에게 무언 가 보고를 받고 있었다.

‘바쁜 일이라도 있나?’

보고를 받는 자카리의 표정은 그녀가 지금껏 알지 못하던 표정이다. 헤센바이츠의 공작이 가질 법한 냉 철한 얼굴.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서 이엘리는 그 자리에  멈칫 멈춰 섰다.

하지만 자카리는 이미 그녀가 왔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자카리가 빙그레 웃었다.

“이엔.”

“자카리.”

벌써 알고 있었네. 머쓱한 얼굴이 된 이엘리는 그의 곁에 다가섰다.

기사들이 인사를 건넸다.

“레이디 헤센바이츠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예요, 경들. 다들 잘 지냈 죠?”

“물론입니다. 아 뭐, 공작 각하께서 좀 괴롭히시기는 했지만요.”

유들유들한 말투에 자카리는 미간을 구겼다. 저 자식들, 이엘리 돌아 가기만 하면 봐라.

대번에 날이 서는 자카리의 눈을 보며 기사들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이엘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야.”

자카리는 선량한 얼굴로 미소를 지 어 보였다. 휘하 기사들을 하도 굴 리는 바람에, 자신이 '귀신 공작’으로 통한다는 것까지 그녀가 알 필요는 없지 않나.

자카리는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그보다 이엔, 네가 여기까지 오다니……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응, 그게.”

이엘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이걸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황제 폐하가 보낸 선물이 도착했거든.”

“황제에게서 선물이라고?”

자카리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보통 황제는 결혼을 하는 귀족에게 축사와 함께 선물을 내린다.

하지만 그들은 황제의 축복 자체를 원하지 않았으니, 굳이 선물을 보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뭐, 좋게 생각하면 영광이라고 여겨야 하나.”

자카리의 표정이 하도 사나웠기에 이엘리는 그를 달래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엘리도 황제의 이번 행보 가 마땅찮은 건 사실이었다. 자카리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입을 연다.

“그래서 뭐가 왔는데?”

“그게…… 페리도트로 장식한 팔찌야.”

“팔찌라고?”

자카리는 또다시 정색하고 말았다.

보통은 이런 선물은 양쪽 부부에게 동시에 내린다. 하지만 황제는 오직 그녀에게만 선물을 내렸다. 그건 명백히 자카리를 견제하는 의도를 가 지고 있었다.

“선물을 내린 것도 아니꼬운데, 하필이면 팔찌야?”

자카리의 입술이 제멋대로 비틀렸다. 황제가 고른 선물은 팔찌였다. 이엘리와 자카리가 나눠 착용했던 그 팔찌를 엄연히 의식한 것 아닌가.

한편 이엘리는 신년 무도회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레이디. 그 팔찌를 제게 주시겠습니까?’

황제의 느른한 목소리가 귓전에 쟁쟁했다. 기분이 싸해졌다. 등골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대신 레이디의 격에 걸맞은 다이 아몬드 팔찌를 드리도록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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