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화
이엘리는 결혼식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결혼식을 위해 엄청난 예산이 배정되었고, 집사 또한 이엘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제도에서부터 불러온 의상사와 보석상들 또한 공작성을 들락거렸다.
연회 준비 또한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와중 침모들은 약간 기가 죽은 상태였다.
“역시 이건 포기해야겠죠?”
이엘리의 웨딩 베일을 만들던 침모 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자신들이 만 들던 베일을 쓸어내렸다.
“사실 그렇죠…… 아가씨께서는 이 제 공작성의 안주인이 되실 분이니까요.”
“우리가 만든 웨딩 베일을 사용하 시는 건, 아가씨의 지체에 누가 될 지도 몰라요.”
침모 하나가 말끝을 흐렸다. 온갖 정성을 다해 짠 새하얀 웨딩 베일이 물결처럼 흐트러진다.
“그래, 뭐 다른 분도 아니고…… 아가씨이시니까요.”
“지금까지 많이 힘드셨기도 하고요.”
“맞아요. 역시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에 어울리는 물건들을 갖추셔야 죠.”
침모들은 애써 아쉬운 마음을 감추었다. 새로 작위를 이은 자카리가 제 아내를 얼마나 아끼는지 침모들도 잘 알고 있었다.
제도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의상사를 직접 불러왔으니 아마 새로 웨딩 드레스를 맞출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드레스에 어울리는 웨딩 베일도 따로 제작할 테지.
“그야 아가씨께서는 당연히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신 분이니까요.”
“결혼식 당일에도, 분명 아가씨께 서는 무척 아름다우실 거예요.”
침모들은 아쉬운 마음을 애써 달래며 서로에게 웃어 보인다.
‘어쩔 수 없지.’
이엘리는 다정하면서도 공정한 성품 덕분에 공작성에서도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이엘리가 돌아오자마자 공작성의 분위기가 확연하게 부드러워졌다. 침모들 또한 그들의 아가씨를 아꼈다.
“그래도 좀 아쉽긴 하네요, 열심히 만들었는데.”
그때, 어린 축에 드는 침모 하나가 서운한 마음을 솔직하게 꺼냈다.
“……”
“……”
짧은 침묵이 돌았다. 어린 침모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아가씨가 결혼식의 필수품 인 웨딩 베일을 그들에게 맡겨 준 게 기뻤다.
게다가 아가씨는 그들을 믿는 모습을 보여 줬었다. 베일을 장식하기 위한 보석을 건넨 것만 해도 그랬
다.
‘이런 보석들을 저희에게 직접 맡기셔도 정말 괜찮으신가요?’
'당연하지. 실제로 베일을 만드는 건 침모들이잖아?’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던 아가씨의 얼굴. 침모는 사실 하급 사용인에 가깝다.
그리고 대부분의 보석은 하급 사용인들에게 맡기는 일이 드물었다. 손 버릇이 나빠진다는 이유에서 였다.
“……베일을 장식할 때, 진주와 다이아몬드도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고 하셨죠.”
“더 필요하면 언제든 편하게 말해 달라고……”
공작성의 차기 안주인이 자신들을 믿고 존중한다. 사실 하급 사용인에 게는 과분한 호의였다.
“다른 귀족 가문에서는 솔직히 이러지 않잖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우리들의 손에 보석이 닿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침모들은 부드러운 낯이 되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눴다. 그때 하녀 하나가 방 안에 쏙 들어왔다.
침모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하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가씨의 직속 하녀인 메리였다.
“메리?”
“아가씨께서 웨딩 베일이 완성되었는지 여쭤보라고 해서 왔어요.”
“웨딩 베일? 그, 완성되긴 했는데.”
침모들은 서로 슬며시 눈치를 살폈다.
어차피 제도에서 유명 의상 디자이너에게 드레스와 베일을 따로 맞출 텐데, 이 베일이 무슨 소용이 있담? 하지만 메리는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얼른 주세요. 아가씨께서 보 고 싶어 하셔요.”
“뭐? 우리가 만든 웨딩 베일을?”
“그럼요. 그럼 뭘 더 보겠어요?”
침모들은 얼떨떨한 낯이 되어 웨딩
베일을 조심스럽게 상자에 담았다. 메리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아가씨께서 침모분들도 다들 데려오라고 하셨거든요.”
“……우리를?”
“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메리가 빙그레 웃었다. 메리는 큰 비밀을 말해 주는 것처럼 소곤거렸다.
“아가씨께서는 이 웨딩 베일에 어 울리는 웨딩드레스를 맞추고 싶다고 하셨어요.”
느닷없는 발언에 침모들은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메리 가 즐겁게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얼른 따라오세요.”
“하, 하지만.”
“아가씨께 웨딩 베일을 보여드리고, 설명도 해드려야 하잖아요?”
그렇게 말한 메리가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침모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메리의 뒤를 따랐다.
이엘리는 방에서 침모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곁에는 제도에서 불러온 의상사 또한 함께였다.
“아, 다들 어서 와.”
이엘리는 웃는 얼굴로 침모들을 반겼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침모들이 이엘리를 바라본다.
“웨딩 베일은 다 완성된 거야?”
“예, 그게…… 완성되기는 했습니다만.”
침모들은 어색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었다. 이엘리의 얼굴이 등불을 켠 것처럼 반짝 밝아진다.
“고마워, 다들 고생했겠네.”
“아닙니다.”
깜짝 놀란 침모들이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엘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침모들은 조심스레 베일을 앞에 펼 쳐 보였다.
하얀 안개처럼 쏟아지는 베일을 보며 그녀가 탄성을 올렸다.
“와.”
새하얀 베일 위로는 섬세한 아샤꽃무늬와 함께 진주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이엘리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의상사를 향 해 그녀가 자랑스럽게 입을 연다.
“어때요, 트란셀 부인."
“그것이……”
“이 웨딩 베일, 정말 예쁘지 않나 요?”
제도에서도 콧대 높기로 유명한의 상사, 트란셸 부인은 약간 분한 얼굴로 웨딩 베일을 봤다.
“예쁘죠?”
“……그렇군요.”
부인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제국 유일의 공작 부인이 입게 될 웨딩드레스를 맡는 건 부인에게도 큰 명예이자 기회였다.
그래서 만사를 제치고 내려왔는데, 이엘리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우리 침모들이 엄청나게 예쁜 웨딩 베일을 만들어 줬거든요.’
'예?’
‘그래서 전 부인에게, 웨딩 베일과 어울리는 드레스를 의뢰하고 싶어요.’
드레스 하나만 맡는 건 사실 자존 심이 상한다. 항변하는 부인에게 이엘리는 난처하게 웃었다.
'미안하게 됐어요. 하지만 공작성의 사람들이 저만을 위해 만들어 준 물건인걸요.’
‘그래도 결혼식 때의 완벽한 모습을 위해서라면……’
'아뇨. 드레스의 아름다움도 중요 하지만, 제게는 그들이 제게 준 마음이 훨씬 더 소중해요.’
그때의 이엘리는 무척 단호했다. 이엘리는 웨딩 베일을 버리느니 차라리 드레스를 맞추지 않겠다 고집을 부렸고, 공작 부인의 웨딩드레스를 포기할 수 없었던 부인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트란셀 부인은 전문가의 눈으로 웨딩 베일을 관찰했다.
결혼하는 당사자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일까, 침모들이 만들어 낸 웨딩 베일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부인이 입술을 열었다.
“그럼 이 웨딩 베일에 어울리는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면 될까요?”
“그렇게 해 주면 고마울 것 같아 요.”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의 눈초리가 된 트란셀 부인이 웨딩 베 일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아샤꽃무늬를 자수로 넣었고, 레 이스 장식도 있네요. 보석은 진주와 다이아몬드라.”
마치 품평이라도 하는 것처럼 트란 셀 부인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솔직히 제도의 유행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아요.”
요새의 웨딩 베일은, 등 뒤로 길게 떨어지는 쪽보다는 짧게 쳐서 얼굴 만 가리는 쪽을 선호한다.
하지만 헤센바이츠는 제국 유일의 공작가니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예법 에 맞추는 게 나았다.
‘그리고 헤센바이츠 공작가 정도라면…… 유행을 선도할 수 있는 가문이기도 하니까.’
트란셀 부인은 흘끗 이엘리를 돌아 보았다.
아샤꽃송이처럼 화사한 미모의 아 가씨. 제국 최고의 두 남자, 황제의 공작의 마음을 동시에 가져간 유일 한 레이디.
부인의 시선이 반짝 빛났다.
‘저번 폐하의 즉위식 이후로, 제도에서도 짧게나마 북부의 드레스 양식이 유행했었지.’
그 유행이 어디서 왔는지, 이런 부분에 민감한 트란셀 부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제 명예를 위해서라도 트란셀 부인은 그녀를 무조건 최고의 신부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부인이 말했다.
“고위 귀족일수록 고전적인 쪽을 선호하니까요.”
“그런가요?”
“네. 이제 어떤 드레스를 만들어 내느냐가 중요한데……”
예스러운 방식을 모두 갖추는 편이 좋지 않을까. 부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전통적으로 제국은 푸르게 보일 정도로 새하얀 드레스를 선호한다. 마 침 웨딩 베일도 눈처럼 흰 빛깔이다.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웨딩 베일을 드레스에 맞추시는 편이……!”
놀란 침모들이 입을 모았다. 이엘리는 생글거리며 웃었다.
“아니, 난 이 웨딩 베일을 쓰고 결혼식을 올릴 거야.”
“하지만……”
“침모들이 이 베일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내가 더 잘 아는 걸.”
그 말에 침모들은 멍하니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이엘리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트란셀 부인과도 이미 합의한 사실이니까 다들 신경 쓸 필요 없어.”
“맞아요. 공작 부인께서 이미 제게 신신당부를 하셨답니다.”
트란셀 부인 또한 어깨를 으쓱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침모들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음…… 너무 고집부리는 것 같아 서 미안하네요, 트란셀 부인.”
이엘리는 머쓱한 얼굴로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던 부인이 말했다.
“글쎄요, 제국 유일의 공작 부인께 서는 이 정도 고집은 부리셔도 된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수많은 귀부인과 귀족 영애들을 상대해 왔던 트란셀 부인이었다.
제도의 귀부인들에 비하자면 그녀가 보이는 저 정도 고집은 그저 애교처럼 느껴진다. 웃는 그녀를 보며 부인은 생각했다.
‘어째서 레이디 헤센바이츠가 공작성에서 사랑받는지 알 것도 같네.’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공평하고 다정하게 대한다. 한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꼭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이 자, 대부분의 안주인들이 갖고 있지 못한 미덕이었다. 부인이 싱긋 미소 지었다.
헤센바이츠 공작성에 머물게 된 트란셀 부인은, 공작가의 안주인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드레스의 디자인을 모은 책자를 들 고 그녀를 찾아온 부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요, 이건 꼭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이엘리가 집사와 말씨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란셀 부인을 발견한 이엘리는 미안한 낯을 했고, 부인은 고개를 저어 괜찮다는 뜻을 밝혔다. 원래 결혼식은 챙겨야 할 것이 많은 법이다.
‘기다릴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
‘고마워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그녀는 다시 집사를 돌아본다. 집사는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귀빈들을 적게 받는다니요,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어째서인가요? 이건 저와 자카리의 결혼식이잖아요.”
이엘리는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두 눈을 가늘게 뜬 모습은 고집을 꺾을 기미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자카리는 결혼식에 대한 모든 권리를 제게 위임했는걸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려 북부의 주인인 헤센바이츠 공작 부부의 결혼식 아닙니까.”
하지만 집사 또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집사는 열정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의 국혼을 넘어설 결혼 식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그보다 못 해서는 안 됩니다.”
“……”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하긴, 공작성의 사람들은 황가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조용하게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는 집사를 보고 있자니 조금 우습긴 하다. 이엘리는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저도 황가의 결혼식보다 공작가의 결혼식이 모자라기를 바라는 게 아니예요.”
무슨 뜻이냐는 것처럼 집사가 이엘리를 흘끗 바라보았다.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황가보 다 귀빈을 더 많이 끌어모으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
정곡을 찔렸는지 집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는 마치 모든 사람들에게 제국혼을 과시하기라도 할 것처럼, 화려한 결혼식을 추진하고 있다했다. 분명 귀족들은 모두 그쪽에 신경이 쏠릴 터였다.
“북부는 제도와 거리가 좀 멀죠. 물론 황제 폐하가 우리보다 국혼은 먼저 치르지만……”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의 결혼식까지 공작가와 경쟁하려 하는 황제라니.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게 도대체 뭐람, 정무나 잘 처리 할 것이지. 이엘리는 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