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화
“난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치를 생각이니까.”
“뭐라고?”
깜짝 놀란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자카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그걸 원하실 거야."
“그, 그래도.”
“들어 봐, 이엔.”
자리에서 일어난 자카리가 이엘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느새 그녀는 자카리의 품 안에 폭 파묻힌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순간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서 그녀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우리의 결혼식은 헤센바이츠의 강대함을 증명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거야.”
“강대함을 증명하는 방식?”
“그래. 이 결혼식은……”
자카리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돌돌 감아 말았다. 빙그레 웃는 눈이 지나치게 곱다.
“헤센바이츠의 새로운 가주와 안주인이 탄생한다는 것을 알리는 거니까.”
그녀가 자카리를 탐색하듯 올려다 본다. 연녹색 눈동자가 가늘어지는 가 싶더니, 그녀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아.”
이엘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조그만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을 자카리는 가만 지켜보았다.
“그도 그럴 게 이 결혼식은 아마 다른 귀족들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그렇지."
“네 말이 맞아. 이 결혼식, 외부에 가장 먼저 내보이는 공작가의 공식적인 행사잖아.”
이엘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는 한숨을 삼켰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아마 내가 이런 합당한 이유를 대지 않았더라면 넌 내가 준 그 물건들을 극구 거절했겠지.’
세상 모든 것들을 쥐여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녀다.
내심 그녀에게 온갖 물건들을 안겨 주고 싶어, 일부러 이런 핑계를 만 들었다.
그때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시간이 좀 모자랄 것 같은 데.”
“시간?”
“응. 이왕 공식적인 행사로 나아갈 거라면 완벽하게 준비를 마쳐야 하는데.”
아, 좀 잘못 짚었나. 자카리는 슬쩍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가 무리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당장 하객 목록을 만들고 청첩장을 발송하는 것만도 시간과 품이 한참 들어. 그리고……”
“이엔.”
자카리가 길어지려는 이엘리의 말을 막았다. 두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향해 자카리가 웃었다.
“우리에게는 시간과 품이 없지만, 대신 예산이 있어.”
“……”
“그리고 예산은 어떤 일의 웬만한 부족함은 얼추 채워 넣을 수 있지.”
자카리는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아, 물론 그러시겠죠.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뭐, 그 말이 맞는 말이기는 했다. 자카리의 성인식을 준비하면서 이미 몸소 체험한 사실이기도 하고.
“예산은 쓰고 싶은 만큼 끌어다 써도 상관없어.”
자카리는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녀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 제든지 말하고.”
“하지만 이런 건 안주인이 해야 할 일이니까.”
연녹색 시선이 결의에 차 빛났다.
이런 행사는 보통 가문의 안주인이 챙긴다.
안주인의 의무이자 권리로, 행사가 완벽하게 끝날수록 안주인의 명성도 높아진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성인식을 끝마쳤을 때도 그랬었어.’
확실히 북부의 귀족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 전대 공작도 그 점을 알아 일부러 그녀에게 성인식 준비를 맡겼을 것이다. 그녀는 애틋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이엔.”
“응, 왜?”
그녀는 슬쩍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잠시 머뭇대던 그는 약간 불편한 얼굴이 되어 입을 연다.
“혹시 말이야.”
“응. 왜?”
“황가의 축사가 필요하다면, 내가 어떻게든 요청을 해 볼 테니까……”
자카리는 주춤주춤 입을 열었다. 그녀의 미간이 형편없이 찌그러지며 톡 쏘아붙인다.
“자카리. 넌 내가 황제와 어떤 일 이 있었는지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해?”
이엘리는 진저리를 쳤다. 자카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솔직히 그라 고 좋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귀족들이 황가의 축사를 받는 것을 명예이자 권리 로 생각하는 건 사실이다.
“알아. 그래도……”
난 네가 나 때문에 모자란 결혼식을 치르는 게 싫어. 자카리는 슬며 시 미간을 구겼다.
이엘리가 원한다면, 어떻게 황가에 압박을 넣든 협박을 하든 축사를 뜯어낼 생각이었다.
“절대 싫어.”
이엘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까지 낀 그녀가 새침하게 말을 잇는다.
“난 이제 헤센바이츠의 사람이라고.”
“그건 당연하지.”
자카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답했다. 그녀는 자카리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게다가 난 황제가 공작가의 일원에게 얼마나 무례하게 구는지 몸소 체험해 봤단 말이야.”
“……”
순간 자카리는 말문이 막혔다. 그랬다. 이엘리는 황제의 손아귀에서 자신에게 돌아온 사람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카리는 대답 대신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우리는 우리끼리 행복하면 돼.”
“……그래.”
“황제 따위 멋대로 살라고 해, 그 재수 없는 자식.”
이엘리는 뾰족한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자카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가 가야 할 길을 명쾌하게 밝혀 준다.
그런 자카리를 앞에 둔 채 이엘리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두고 봐, 황제의 국혼에 꿀리지 않는 결혼식을 치를 테니까.”
자카리는 애매하게 웃었다. 어째 이엘리의 의욕이 이상한 방향으로 발현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처음에는 분명 결혼식에 별생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황가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겠다는 그런 열정이 느껴진달까.
그리고 자카리는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다 하게 해 주고 싶었다. 다만 그가 지금 당장 원하는 건…
“자, 자카리!”
파드득 놀란 이엘리가 고개를 반짝 치켜들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슬쩍 깨문 탓이다.
자카리는 뻔뻔한 얼굴로 어깨만을 으쓱거려 보였다. 이엘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홱 돌렸다.
‘나도 참……’
자카리의 스킨십이 점차 농밀해질 때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어렵 다. 왠지 민망한 기분에 이엘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자카리, 네가 이럴 때마다 나 깜짝깜짝 놀란다고.”
그녀는 부러 불퉁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심장이 쿵쿵 뛰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이엔, 너랑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잖아.”
“뭐어?”
“네가 너무 모자랐어. 모자란 이엘리를 이렇게라도 보충해야지.”
그의 나긋한 목소리가 이엘리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간지러운 감촉에 그녀가 어깨를 굳혔다.
‘아, 이건 좀.’
요새의 자카리는 자신이 얼마나 남성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그 점을 그녀에게 표현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엘리가 그의 행동에 속절없이 휘둘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이러다가 홀릴 것 같단 말이지.’
이엘리는 불만스럽게 자카리를 힐끗거렸다. 눈매를 접은 자카리가 이엘리를 향해 소곤거렸다.
“왜?”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 누구 남편인지 잘생기긴 무지하게 잘생겼네. 양 뺨이 화끈거려 그녀는 홱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자카리에게 하려고 별렀던 말이 있었다. 그녀는 힐끔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자카리.”
“응?”
“나 너에게 미리 해 둘 말이 있는 데.”
자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살짝 핥았 고, 그대로 말을 잇는다.
“나, 황녀 전하께 우리 결혼식의 청첩장은 보내드리려고.”
솔직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녀는 청첩장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고 이엘리는 생각했다.
만약 황녀가 전대 공작이 이미 사망했음을 미리 알려 주지 않았더라 면, 이엘리는 차마 자카리에게 돌아 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뭐 그건 네가하고 싶은 대로 해.”
그는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자카리의 눈치를 살피던 이엘리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화내지 않아?”
“내가 왜 화내야 하는데?”
“하지만 넌 황녀 전하와 친분을 이어 가는 게 불편할 수도 있잖아."
황제는 이번 장례식 때도 황녀를 일부러 내려보냈다.
엄연히 헤센바이츠의 내정에 간섭 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는 행동이었다. 자카리는 그녀의 뺨을 살짝 튕기더니 짓궂게 웃어 보였다.
“이런, 이엔.”
“응?”
“난 네가 나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친분을 포기하는 것은 원하지 않아.”
자카리가 가볍게 답했다. 이엘리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행동반경을 제멋대로 조절하려 드는 사람은 무척 많다.
물론 자카리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저번에 제도에서 황녀 전하와 론 도 영애가 네게 잘해 주는 모습은 이미 지켜보고 있었어.”
그래도 이엘리가 누구와 친밀하게 지내는지, 그런 것까지 꼼꼼하게 살 펴보고 있을 줄 몰랐다.
“론도 후작 가문은 정계에서도 균형 잡힌 태도로 유명하지.”
자카리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곰곰이 생각을 더듬었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론도 영애가 황후로 간택받긴 했지만…… 후작은 딸의 지위에 취할 사람이 아니야."
“그래?”
“후작은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지. 게다가……”
자카리는 론도 후작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후작은 자카리가 제도로 올라갔을 때 처음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황제가 서슬 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그러기는 쉽지 않다.
“지금의 황후 자리는 허울만 좋을 뿐 실속이 없는 자리라는 것도 아니까.”
자카리는 빙긋 웃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명백한 단점에도 눈을 가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다행히도 후작은 균형 잡힌 정치 감각을 가진 쪽에 가깝다.
“솔직히 론도 후작도 제 딸을 황후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을걸.”
“……그래?”
“그럼. 후작 영애도 황후 자리를 별로 원하지 않는 걸 보면 뻔하지.”
자카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엘리가 받은 편지로 미루어 봤을 때, 론도 후작 영애는 이미 황제와 결혼함으로써 제가 얻게 될 이득과 손해를 명쾌하게 계산해 놓은 상태였다.
‘계산을 마친 그녀는, 황제와의 결혼이 그다지 내키지 않을 테지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는 이엘리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오히려 황녀 전하, 그리고 론도 후작 영애와 친분을 쌓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자카리.”
“아마 그쪽들도 그러기를 바랄걸?”
자카리는 헤센바이츠의 공작으로서 냉철한 판단을 내놓았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황제에게 언제 버림받을지 모르는 황녀와, 지위가 불안한 황후.
그런 그들에게 있어 강대한 공작가의 안주인은 친분을 쌓아도 나쁘지 않은 대상이다.
자카리는 이엘리에게 다정하게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건 내 개인적인 정치적 사견일 뿐이고.”
“……”
이엘리는 약간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새삼 이엘리에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그는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이엔.”
“응?”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도 돼.”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이엘리는 슬그머니 자카리와 시선을 맞췄다. 자카리가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어.”
자카리는 담백한 어조로 말을 잇는 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은 사심 따위 없는 온전한 진심이다.
“정치적인 입장이나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런 건 내가 할 테니까. 물론……”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들어 올린 자카리가 쪽 소리 나게 키스를 남겼 다. 이후 빙그레 웃는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나였으면 좋겠지만.”
조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이던 이엘리가 황급히 입을 연다.
“그, 다, 당연히.”
“당연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너라는 건…… 당연하잖아.”
수줍음을 타는 이엘리라. 역시 보기 힘든 모습이다.
그런 그녀가 너무 귀여웠던 자카리는 뺨과 이마에 무차별적으로 입술을 맞췄다.
이엘리는 뺨을 붉히며 자카리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