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화
자카리도 이엘리의 말에 동의했다.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린 데다, 심지어 헤센바이츠의 차기 안주인에게도 기이한 집착을 보이던 황제.
그런 황제의 정실이 된다는 것은, 명예는 있겠지만 애정은 없는 허울 좋은 자리일 것이다. 게다가 황후로 서 짊어져야 할 의무는 어떤가.
“그런데 이엔.”
자카리가 그녀의 목에 짧게 키스하며 입을 열었다. 간지러운 감촉에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까 전부터 너무…… 키스를 자 주 하는 거 아냐?”
“네가 날 계속 어리게 보는 것 같아서.”
자카리의 능글맞은 대답에 이엘리는 새초롬한 낯이 되었다. 자카리가 느른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남자라는 표현을 좀 해 보려고.”
“……그런 노력 따위 안 해도 충분 히 널 남자로 보고 있어.”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그가 나직한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그나 마 다행이네. 그런데……”
“그런데?”
“황제와 론도 후작 영애의 결혼 보다도, 우리의 결혼부터 먼저 생각하는 게 낫지 않아?”
정곡을 찔렸다. 아니 뭐 맞는 말이 긴 한데. 이엘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결혼식, 치르지 않을 거야?”
“하지만 결혼식이 굳이 필요해?”
이엘리가 되묻는 목소리에 자카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또랑또랑한 어조로 말했다.
“게다가 우리 혼인신고도 이미 했잖아.”
“그래도 혼인신고만하고 끝내기에는 뭔가 아쉽잖아.”
“너, 그런 번거로운 행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아니었어?”
이엘리는 자카리의 성인식을 문득 떠올렸다.
자카리는 자신의 성인식 행사에 충 실히 참석하긴 했지만 그건 의무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내심 자카리를 귀찮게 하지 않겠노라 마음 속으로 생각해 두고 있었는데. 어라,
그게 아니었나? 그녀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엔, 난 네가 북부의 안주인으로서 확실히 인정받기를 바라.”
솔직히 난 너만 있으면 별로 상관 없는데. 그렇게 대답하려던 이엘리는 문득 멈칫했다.
자카리의 눈동자가 하도 진지했던 탓이다. 이엘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던 자카리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우린 너무 어렸을 때 결혼해서…… 결혼식 같은 건 거의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녀의 뺨을 커다란 손이 폭 덮는 다. 자카리는 아쉽고 미안한 얼굴이 되어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마땅히 누렸어야 할 모든 것을 빼앗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죄책감 섞인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이엘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자카리는 진심이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결혼식만큼은 화려하게 치르곤 한다. 내심 귀족들 사이에서도 결혼식의 규모로 집안의 자존심을 챙기는데, 빚 대신 결혼한 그녀에게 그런 기회가 있을 리 없었다.
‘이엔은 모든 것을 쥐여 주고도 모자란 사람인데.’
게다가 이엘리가 북부의 안주인임을 확고하게 밝히기 위해서라도, 자카리는 이번 결혼식을 꼭 치를 생각이었다.
때마침 황제가 국혼을 치른다니. 이상하게 경쟁심이 불타올랐다.
“왜 그렇게 심각해, 자카리.”
그때 이엘리는 분위기를 밝게 바꾸려 코를 울리며 웃었다. 그녀가 자카리의 손등을 토닥였다.
“난 괜찮다니까?”
“내가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어. 아, 혹시.”
그녀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입가를 부드럽게 횐 채로 질문을 던진다.
“예쁜 아내의 웨딩드레스 차림이라도 보고 싶은 거야?”
“아, 물론 그것도 맞고.”
“……”
자카리의 단호한 대답에 이엘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자카리는 그녀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어쨌든 결혼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된 것 같아, 이엔.”
“……어쩐지 너야말로 날 어린아이처럼 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까 전부터 계속 머리카락이며 뺨, 이마 따위를 지분거리고 있지않나. 이엘리는 불퉁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 뭐, 네가 행복하다면.’
또다시 그의 품에 안긴 채, 그녀는 시큰둥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솔직히 그 품이 좋기도 했고.
* * *
어쨌든 그가 결혼식에 대해 저 정도로 열의를 보이니, 그녀도 어느 정도 의지를 보이긴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이엘리는 집사를 불러다가 결혼식 예산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결혼식 예산은 크게 잡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 되묻는 집사의 얼굴이 어쩐 지 떨떠름해 보였다. 이엘리는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뭐 못 할 말이라도 한 건가?
“어차피 저와 자카리는 결혼 생활을 오래했는걸요.”
“두 분의 혼인 생활과, 결혼식 예 산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미 결혼한 사람들이 새롭게 식을 올리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그렇게 유난을 떨 필요가 있나요?”
이엘리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돼서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집사는 여전 히 뭔가 애매한 얼굴을 하고 있었
다.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던 집사는 잠시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 그건 공작 각하께서 원하시 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만……”
“자카리가요? 왜요?”
어리둥절해진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집사는 지그시 혀끝을 깨물었다.
공작 각하께서는 이번 결혼식에 엄청난 기대감을 걸고 계시고, 그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는 화려한 결혼 식을 치르고 싶어 한다고 어떻게 말 할 수 있겠는가.
집사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우선 각하께 그렇게 전해 올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하도록 해요.”
이엘리는 약간 어리둥절한 기색이었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집사가 알아서 자카리에게 잘 말해 주겠지.’
그렇지 않아도 갓 공작 작위를 이어받은 자카리는, 여러모로 챙길 일 이 많았다.
고작 결혼식 때문에 자카리를 번거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엘리는 결혼식은 간단히 치르기로 결 심했다.
그나마 이엘리가 자신을 위해 따로 신경 써서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물 건은, 바로 신부가 사용하는 ‘웨딩 베일’이었다.
‘뭐, 웨딩 베일 정도는 결혼식에서 도 필수니까.’
이엘리는 웨딩 베일은 공작성내의 침모들을 불러들여 맡길 생각이었다.
공작성 사람들과 함께 결혼식을 올린다는 의미도 있었고, 호화스러운 결혼식은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미 꼬꼬마 때부터 부부로 살아와 결혼 생활도 할 만큼 했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이엘리는 속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신관을 불러다가 축사나 듣고, 친지 몇몇을 초대하여 식사 정도를 함께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엘리의 생각과 자카리의 생각은 까마득히 달랐다.
“이엔이 그렇게 말했다고?”
집사가 이엘리의 뜻을 전해 올리자, 갓 작위를 이은 대가로 서류의 산에 파묻혀 있던 자카리는 대번 그렇게 물었다.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자카리는 숫제 서류들마저 밀어 치워 버렸다. 집사는 공작님의 관심에서 벗어난 서류들을 바라보며 애통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안 되는데, 저 서류들 오늘 다 봐 주셔야 하는데.’
하지만 ‘이엘리’라는 주제에 한해 서는 세계에서 가장 단호해지는 자카리는, 이제 서류에 집중할 여유조차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안 돼.”
자카리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와 그녀는 이혼했다가 재결합한 지 얼마 되
지 않았다.
그녀의 빈자리가 굉장히 컸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뭐든지 최고만을 주고 싶었다.
‘게다가 내가 이엘리에게 마음고생을 시켰던 것도 있잖아.’
그러므로 자카리는 이번 결혼식을 최대한 호화롭게 치름으로써 두 가 지를 모두 보상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혼식을 간소하게 치르자니, 이건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알았어, 내가 이엔을 직접 만나 보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훌쩍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집사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저 멀리 사라지는 주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 도, 저 서류의 산은 공작 부부가 이 번 결혼식에 대해 합의를 할 때까지 끗꿋이 자리를 지킬 것 같다.
“이엔.”
“응?”
“어째서 보석상을 부르지 않아?”
그리고 자카리는 이엘리를 찾아가 자마자, 다짜고짜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한창 예산안에 골몰하던 이엘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카리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연다.
“그리고 결혼식에 필요한 물건들을 맞추려면 의상실에도 연락을 넣어야 할 텐데.”
“저, 자카리?”
“요새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에 바쁜가 보다 했는데.”
그의 심기가 좀 불편해 보인다.
그리고 이엘리는 그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가 요새 자카리에게 얼굴을 자주 비치지 않아서인지, 보석상과 의상실에 연락을 넣지 않아서인지 좀 궁금해졌다.
“침모들에게 웨딩 베일을 짜 달라는 말 외로는 별말도 안했다며?”
“응, 그렇긴 한데……”
“요새 얼굴도 제대로 못 봐서 서운한데, 결혼식 준비 때문이 아니었다니.”
……아무래도 두 가지 이유 모두 맞나 보다. 아이고, 내 남편. 이엘리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예산 때문에 그래? 그러고 보니 예산을 적게 잡자고 했다고 하던데. 넌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이야. 그런 문제는 고민하지 말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쩐지 자카리의 상상력이 좋지 못 한 방향으로 한껏 뻗어 나갈 것 같아, 그녀는 손을 저었다.
“그야 요새 자카리 네가 바빠 보였으니까.”
“뭐?”
“공작 작위를 이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챙길 일이 많잖아.”
그녀는 자카리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자카리는 뚱한 표정이 되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야.”
“……이엔, 그럴 필요 없어.”
자카리는 굉장히 서운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시무룩한지, 이엘리는 잘못한 것 따위 전혀 없으면 서도 죄책감을 느껴야했다.
자카리는 한숨을 섞어 이엘리에게 중얼거렸다.
“네 얼굴을 보는 게 나에게는 휴식 인데.”
“아, 그래……”
가끔 자카리는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이엘리는 어색 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하긴 뭐, 나처럼 예쁜 아내를 두고 바쁜 것도 좀 힘들겠지.”
이엘리는 분위기를 바꾸려 장난을 쳤다. 하지만 자카리는 진지한 표정을 풀 생각조차 않는다.
“이엔, 넌 날 너무 잘 알아.”
“……”
“요새 네 얼굴을 뜸하게 보는 바람에…… 정말로 힘들었거든.”
자카리의 진지한 대답에 이엘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자카리는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무튼 난 너와의 결혼식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응, 네 얼굴 표정 보니까 왠지 그런 것 같다…… 이엘리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카리와 손가락을 걸었다.
아무래도 그들의 결혼식에 신경은 좀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하잖아?!’
수없이 들어오는 보석이며 옷감을 보며 이엘리는 기겁했다.
지금 이 상황은 이엘리가 예상한 범주에서 한참 벗어났다.
그녀가 생각하던 결혼식의 규모와, 자카리가 생각하던 건 한참 달랐던 것이다.
“자카리, 저것들 다 뭐야?”
깜짝 놀란 그녀가 자카리를 찾았다. 한창 서류를 살피던 그가 그녀에게 눈매를 접어 웃었다.
“왜? 뭔가 모자란 거라도 있어?”
“아니, 오히려 너무 과해서 문제야.”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예고조차 없이 보낸 저 엄청난 물건들은 도대체 무엇인지.
비단이며 보석이며 레이스 등, 온갖 사치품이 넘쳐 난다. 자카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뭐가 과한데?”
“……그렇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양심이 없다는 걸 모르겠어?”
슬쩍 미간을 좁힌 자카리는 탁 소리 나게 서류철을 접은 후, 비딱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전혀 모르겠는데. 이게 뭐가 과 해?”
“황가에서도 저 정도 혼수품을 주고받지는 않을걸?”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그녀도 그와 결혼하며 공작가가 가진 부유함을 피부로 느끼며 살았다.
하지만 그녀가 놀란 건 저 정도 재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련하는 그의 배포였다.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러나 자카리는 여전히 당연하다는 얼굴로 비스듬히 턱을 괸 채 이엘리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