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화
공작의 죽음은 대외적으로는 자살로 처리되었다.
또한 아버지가 만들어 준 ‘암살의 정황 증거’는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황가는 제게 손을 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카리는 제 아버지의 치밀함이 서러웠다.
하지만 모든 일이 정리된 후에도, 죄책감에 시달린 그는 차마 그녀를 찾아가지 못했다.
* * *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이엘리는 침묵했다. 도무지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째서 그가 그토록 힘겨워했는지, 스스로를 끝까지 몰아붙이며 한계를 시험했는지 그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걸 알아.”
“……자카리.”
“그러니 이렇게 멍하니 넋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되지.”
자카리는 힘을 주어 입을 열었다. 이엘리를 바라보는 자카리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서렸다.
“너를 지켜야 하니까.”
“그건……”
“아버지의 말씀이 맞아. 어떻게든 아버지의 유언은 받들 생각이야.”
자카리는 손을 들어 하얀 뺨을 어루만졌다. 새파랗게 불타오르는 시선이 그녀를 똑바로 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 모든 것을 바쳐서 지켜야지.”
“……”
“그 누구도 네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겠어. 황제도, 다른 사람들도……”
자카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죄책감과 부채감에 짓눌려 죽어 가던 그를 먼저 찾아와 준 그녀.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 언제까지나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도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했다.
“네게 내 세계를 줄 거야.”
이슬 맞은 새싹처럼 젖어 든 연녹색 눈동자가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자카리는 힘겹게 웃었다.
“그리고 이엔.”
“응.”
“너도 내 아버지를 용서해 줄래?”
순간 이엘리는 말문이 막혔다. 자카리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다시 더듬으며 속삭였다.
“아버지께서 네게…… 미안하고, 그리고 고마웠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
그녀도 제 아버지의 유언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자카리는 공작이 그녀를 얼마나 아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널 딸처럼 생각했다고……”
“바보야.”
그를 바라보던 이엘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웃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난 처음부터 그분께 화가 나지도 않았는걸.”
“……”
“그러니까 난 괜찮아.”
이엘리는 자카리의 목을 꼭 끌어 안았다. 서로 맞닿는 따스한 체온만이 그들을 위로해 주었다.
“대신 약속해.”
“무엇을?”
“공작님께서 바라신 만큼…… 우리, 행복하게 살자.”
품 안의 이 조그만 아가씨만이 그를 구원하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11. 완벽한 결혼식을 위하여
자카리와 이엘리가 재결합한 이후 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이엘리의 부모님을 불러들이는 거였다.
적어도 이엘리의 부모님을 북부로 모셔 오는 편이 황가에게서 좀 더 안전해질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엘리는 그의 생각에 동의했고, 블랑쳇 부부 또한 이해해 주었다.
“당장 내려오시라고 하기 어려운 건 알지만, 그래도 영지를 따로 마련해 드릴 테니까.”
“으응……”
자카리의 패기 넘치는 말에 이엘리는 애매한 얼굴을 했다.
영지를 따로 마련해 준다니, 역시 대단하지 않나. 역시 저것이 공작님이 보일 수 있는 패기겠지. 그녀는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이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자카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이엘리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냥 네가 대단하게 보여서.”
“내가?”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자카리가 대단하게 보이는 것은 어 쩔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영
지를 하사하는 모습이라니. 그러자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아니, 지금껏 내가 본 사람들 중 네가 제일 대단해.”
“말도 안 돼.”
“아니, 말이 돼.”
자카리는 보드랍게 그녀의 뺨을 쓸어 내렸다. 그녀의 이마에 짧게 키스를 남기며 소곤거린다.
“넌 나와 아버지를 이어 준 유일한 사람이니까.”
“……”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이엘리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저 어린 동생이라고만 생각 했었는데, 요새는 자카리가 확실히 남자로 보인다.
자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영지와 저택을 마련해 드릴 생각이야.”
“하지만 자카리, 그럼 우리 영지는 어떡해?”
이엘리는 내심 걱정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현실적으로 자카리가 그녀의 부모 님을 북부로 데려오려 하는 이유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블랑쳇 영지는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었다.
‘이대로 영지를 팔아 버리거나 하는 것도 좀 아쉬운데.’
이엘리는 아쉬운 표정을 했다. 하지만 자카리는 오히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본다.
“블랑쳇 영지가 왜?”
“그야 부모님을 모셔 오려면 영지를 정리해야 하잖아?”
“영지를 왜 정리하는데?”
자카리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다. 왜 이해를 못 하는 거지? 이엘리는 어물거렸다.
“그거야 영지를 비워 둘 순 없으니까……”
“영지를 비우다니? 관리인을 보내면 되잖아.”
“관리인?”
뜻밖이라는 그녀의 말에, 자카리는 이제야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해한 것 같았다.
쿡쿡 웃음을 터뜨린 자카리가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자카리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블랑쳇 영지는 네 고향이잖아, 이엔.”
“아……”
“내가 설마 네 고향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기라도 할 것 같았어?”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카리가 말을 잇는다. 그녀는 살며시 뺨을 붉혔다.
“으응……”
“영지는 관리인에게 맡겨 두고, 가끔 내려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자카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는 어디까지 날 배려해 주는 걸까. 그녀는 행복한 낯을 했다.
“고마워.”
“아냐,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지.”
자카리는 진지하게 그녀에게 답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견디기 어려웠다.
“네가 내게 왔으니까.”
“……”
“그리고 두 분께서는 널 내게 보내 주셨잖아.”
머쓱함 반, 기쁨 반으로 그녀는 자카리의 품에 고개를 기댔다.
제도에서 온 편지를 읽기 위해 그녀가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 봉투를 잘라 내는 동안, 그는 내내 이엘리
를 안고 있었다.
“누구에게 온 편지야?”
“어…… 론도 후작 영애인데.”
어째서 그녀가 내게 편지를 보냈 담? 이엘리는 의아한 얼굴을 했고, 자카리가 이마를 좁혔다.
“언제부터 두 사람이 편지를 나눌 정도로 친밀해졌어?”
“그냥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지.”
이엘리는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만약 론도 후작 영애가 황녀 전하의 편지를 전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엘리는 공작이 죽었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나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네가 다시 내게 돌아올 일은 없었을 테지.’
그녀는 흐뭇한 마음으로 자카리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자카리는 뚱한 얼굴이 되어 투덜댄다.
“그야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니까.”
“뭐야, 정말. 어린애도 아니고.”
입지 않게 이죽거리니 자카리가 눈을 가늘게 치떴다. 그가 그녀의 귓 가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이엔, 너…… 언제까지 어린애 취 급하려고 그래?”
“잠깐만, 간지러워!”
이상하게 자카리의 숨이 닿는 곳 마다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불퉁하게 입을 열었다.
“난 네 남편이라고.”
그거야 사실이지만…… 이엘리는 힐끔 자카리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자카리도 남자였다. 언제 저렇게 잘생기게 자랐는지, 쓸데없는 파리들도 꼬여선. 그녀는 눈 씹을 모았다.
“누가 그런 거 모른대?”
“그런데 왜 자꾸 아이 취급을 하는 거야?”
“동생 같아서 그런다, 왜?”
왠지 심술이 돋은 이엘리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자카리가 순식간에 그녀를 달랑 들어 올렸다.
깜짝 놀란 그녀가 눈을 커다랗게 뜨자,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시선을 맞추었다.
“이엔.”
“……”
“아직도 내가 동생으로 보여?”
나지막한 저음에 쿵쿵 심장이 뛰었다. 세상에. 귓바퀴부터 뜨겁게 달아 오른다.
자카리에게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그녀는 초조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이 바보야.”
“뭐라고?”
이엘리의 대답에 자카리는 대번 미간을 구겼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도, 동생한테 키스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지?”
자카리는 그제야 만족스러움 반, 민망함 반이 되어 이엘리를 내려놓았다.
그러고서 버릇처럼 그녀의 이마에 쪽, 키스를 남긴다. 부끄러워진 이엘리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이것 좀 놓아 봐. 편지 읽어야 한 단 말이야.”
자카리는 약간 아쉬운 얼굴이 되어 이엘리를 놓아주었다.
이엘리는 달아오른 뺨을 감추려, 부러 소리를 내면서 편지를 꺼냈다. 바스락바스락 종이가 펴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러고 보면 자카리, 요새는 신체 접촉이 좀 늘었네.’
예전에는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쪽이 보통이었는데, 요새는 좀 다르 다. 무엇보다도 키스가 자연스러워졌다.
입술과 입술이 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뺨과 이마 정도는 자연스럽게 한다.
‘그게 싫은 건 아니고……”
이엘리는 흘끗 자카리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그와 눈이 딱 마주친다.
“왜? 뭔가 할 말이라도?”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게 대답한 이엘리가 황급히 편지에 코를 박았다. 자카리의 나지막 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으으, 정말……”
그녀는 애써 편지의 글자를 읽어 나갔다. 하지만 글자가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올 리 없다.
자꾸 등 뒤로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세상에, 나 계속해서 자카리를 의식하고 있잖아?
‘안 돼, 다른 생각! 다른 생각!’
이엘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편지에 집중했다. 바로 그때, 눈에 들어오는 글자가 있었다.
‘어라?’
순간 이엘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편지를 펼쳤다. 편지의 내용은…….
‘저, 결혼해요.’
편지의 서두가 지나치게 강렬하다.
아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결혼 이야기는 없었는데? 이엘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게다가 론도 후작 영애는 황제와 혼담이 오가는 사이 아닌가.
‘도대체 누구랑 결혼한다는 거야?’
무려 황제와 얽혀 이야기가 나도는 영애와 결혼하는 그 간 큰 영식이 누군지 궁금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이엘리는 편지의 뒷문장을 읽어 내렸 고, 경악하고 말았다.
‘무려 황제 폐하께서 제 반려가 되어 주시기로 했답니다.’
“……뭐어?”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놀란 목소리를 흘렸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물었다.
“왜 그래, 이엔?”
“론도 후작 영애가 결혼을 한다는 데…… 그 상대가 황제 폐하야.”
“뭐라고?”
자카리도 깜짝 놀랐다. 물론 두 사람의 혼담에 대해, 귀족 사회에서 아예 추측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 게?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남은 부분을 읽었다.
‘사실 갑자기 황명이 내려오는 바람에 거절할 수도 없었어요. 만민을 보살펴야 할 황후라니, 보잘것없는 제가 해낼 수 있을까요. 전 한 사람의 온전한 애정도 받기 어려울 텐데 말예요.’
분명히 내용은 정중함에도, 어쩐지 론도 후작 영애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거 분명히, 결혼이 내키지 않는 다는 뜻이네.’
이엘리는 한숨을 삼켰다. 후작 영애는 황제가 이엘리에게 질척거리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다.
본디 결혼을 크게 원하던 여인도 아니었으니, 당연히 이혼사가 마음에 들지 않을 터.
“하긴 론도 후작 영애 외에, 신분과 나이 면에서 폐하의 반려가 될 만한 여성도 없지만……”
이엘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황제가 결혼식을 서두르는 모습은 마치, 그녀에게 보여 주기 위함 같았다.
그녀가 자카리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자존심을 다치지 않으려고. 느낌 탓일까.
“하여튼 국혼을 축하한다는 편지는 보내야겠지.”
“뭐, 그래야 하겠지만.”
자카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엘리는 뭔가 마음이 복잡해졌다. 황제와 론도 후작 영애라.
“솔직히 영애께서 황제 폐하와 결혼하는 게 후작 영애에게 행복한 일 일지는 잘 모르겠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