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96)

89 화

“난 이제 곧 죽는다.”

“아버지!”

“예정된 사실을 애써 외면해 봤자 나아지는 건 없어.”

사실 공작이 지금까지 버틴 것 자체가 대단했다.

겨울의 마법은 제힘을 다룰 수 없는 주인을 차근차근 갉아먹었다. 어떻게든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지 만, 그것도 이제 그에게는 한계였다.

“네가 헤센바이츠의 주인이 아니게 된다면, 넌 더 이상 이엘리를 지킬 수 없게 될 거다.”

공작이 냉랭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이엘리. 그 단어에 자카리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네가 헤센바이츠의 주인이 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지.”

공작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자카리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몸이 좋지 않은 것도 언젠가는 황가에게 알려질 거야. 숨기는 것도 이제 한계다.”

”……”

“내 병세를 알게 된다면, 황가는 그것을 빌미로 더 귀찮게 굴겠지. 글쎄, 예상으로는……”

공작은 눈동자를 굴렸다. 뻔히 예 상이 간다. 공작은 자신이 예상하는 미래를 입 밖에 꺼냈다.

“황가에서 어떻게든 너를 밀어내고 새로운 후계자를 들이대려 할 것 같구나.”

“새로운 후계자……”

“아마도 내가 죽기 전에. 후계를 교체할 수 있는 건 가주가 살아 있을 그때까지만이니까.”

공작은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자카리는 이를 악물며 아버지의 말에 귀 기울였다.

“비록 헤센바이츠는 손이 적은 집 안이지만, 그럼에도 방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

“황가는 어떻게든 다른 후계자를 찾아내려 할 거다, 너를 밀어내기 위해서.”

반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공작의 말은 구구절절 맞았으니까. 공작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게다가, 무려 황제 앞에서 폭주했던 공작가의 후계자를 황가에서 받아들일 것 같나?”

“하지만……”

“황가의 압박은 거셀 거다. 그 압 박을 이겨 내고 대처하려면, 네가 공작이 되는 수밖에 없어.”

유리알처럼 새파란 눈동자에 스치는 감정이 어떤 종류인지 자카리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의 아버지가 낯설어 견디기 어렵다. 평생을 서로를 물어뜯으며 살아온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그리고 난 아델의 자식인 너 외의 다른 사람에게……”

손을 뻗은 공작은 자카리의 뺨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접촉은 이것이 거의 처음이었다. 자카리는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아버지의 손은 까슬하게 말라 있었다.

“……헤센바이츠의 공작 작위를 잇게 할 생각은 없다."

“아버지?”

“콜록!”

그와 동시에 공작이 거세게 기침을 토해 냈다.

공작의 입술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 내렸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내려놓는다.

어느새 차를 모두 마셨는지, 찻잔 안은 모조리 비워져 있었다.

“콜록, 콜록! 큭……”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쩔 줄 몰라 창백해진 얼굴로 자카리가 공작에게로 다가섰다. 하지만 공작이 손을 내저었다.

“놀랄 필요 없다. 아까 말했지 않느냐.”

“아, 아버지?”

“난 이제 죽는다고.”

단호한 선언에 자카리의 시선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공작은 회한에 잠 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난 사랑하는 사람에 한해, 단 한 번도 현명하게 행동했던 적이 없다.”

“……아버지.”

“내가 너와 이엘리를 억지로 갈라 놓은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피를 토해 엉망이 된 입술을 손등으로 대충 훔치며 공작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넌 그 애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이게 무슨……”

“이엘리는 내 딸 같은 아이야. 너와 마찬가지로 나도 그 아이를 무척 귀여워했다.”

공작이 느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카리는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공작이 내려놓은 찻잔에 가 닿았다.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차. 그리고 피를 토하는 제 아버지.

“아버지, 설마 독을 드신 겁니까?”

모를 수가 없었다. 자카리는 희게 질린 얼굴로 공작을 마주 보았다. 공작은 부드럽게 미소했다.

“그래.”

“어째서!”

“왜냐하면 네가.... 내 아들이니까.”

아버지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카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넌 내 단 하나뿐인 아들이야.”

공작은 힘을 주어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자카리는 얼어붙었다. 공작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난 네가 그 아이를 잃고 말라비틀어지는 모습을 지금까지 충분히 봐 왔다.”

“아, 버지.”

“억지로 떨어뜨려 놓으면 서로를 정리할 거라고 생각했지. 모두 내 오산이었다.”

가끔은 절대로 정리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공작이 아델라이데에 대하여 가진 감정이 그러하듯, 자카리와 이엘리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러했다. 또한 공작은 그 마음을 외면했었다.

“공작성을 떠나던 그날, 그 애……”

공작은 흐릿한 시야로 그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파리한 얼굴로도 이엘리는 공작에게 말했다.

“……널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어.”

그는 숨을 삼켰다. 포기하지 않는 다. 제가 방문을 닫고 움츠렸던 그 때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널 기다린다고 전해 달라, 그렇게 말했었지.”

“그건……”

“그러니 네가 정말로 그 아이를 소 중하게 생각한다면…… 되찾아 오거라.”

자카리가 멍하니 공작을 바라보았다. 자카리의 눈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그가 낮게 속삭였다.

“아버지의 목숨을 제물로 이엘리를 찾아오라는 말씀이십니까?”

”……”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자카리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공작은 잠시 침묵했다.

아버지로서 제대로 된 애정을 단 한 번도 준 적이 없는데도, 자카리는 아직도 자신을 아버지로 생각해 준다. 가슴이 시렸다.

“그건 날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랬기에 공작은 부러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아들의 죄책감을 조금이 나마 덜어주기 위해서.

“……”난 단 한 번도 내 사랑을 끝까지 지켜 본 적이 없었으니까.”

공작은 서서히 목이 아팠다. 온몸 이 욱신거렸다. 자신이 삼킨 독이 혈관을 타고 뻗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너만큼은 네 사랑을 끝까지 지키는 모습을 보고 싶다.”

공작이 손을 뻗어 아들의 손등을 움켜쥐었다. 공작의 악력은 죽어 가는 사람답지 않게 억셌다.

“나 대신 행복해지도록 해라, 자카리.”

”……”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의 모든 것을 바쳐서 지키는 거야.”

콜록! 다시 한 번 기침이 터졌다. 공작의 입에서 쏟아지는 핏방울이 카펫 위로 제멋대로 쏟아져 얼룩졌다. 선명한 붉은 빛깔을 보면서 자카리는 현실감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지켜 보겠다. 그리고……”

”……”

“내가 죽는 이유는 자살이야. 알겠나.”

새파란 눈동자가 자카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서로를 꼭 닮은 눈동자가 상대방을 마주 본다.

“네가 날 죽인 게 아니야. 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거다.”

“아, 버지.”

“그러니 내 죽음에는 너의 책임이 없어.”

공작은 자신의 죽음의 이유를 명백히 했다. 자카리가 느낄 죄책감을 없애기 위한 발언이었다.

“또한 외부에는 내 죽음을 자살로 알리도록 해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공작은 빠른 말씨로 말을 이었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으나, 말해야만 했다. 죽음이 공작의 목전에 와 있었다.

당장이라도 제 목을 잡아채 숨을 끊어 버릴 것 같았다.

“이 자리에  네가 함께 있었으니, 네가 날 해쳤다는 의심을 하는 사람 도 분명히 있을 거다.”

공작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작위를 승계시킬 거라면, 모든 문제의 여지를 없애야 했다.

“그때는 내게 죄를 뒤집어씌워라.”

”예?”

“널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들에게 내가 널 죽이려했다고 말 해.”

자카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버지가 날 죽이려했다니? 하나 공작은 확고한 어조였다.

“내 병은 철저히 비밀로 해 왔다. 외부인들에게는 내가 죽음을 택할 이유가 없노라 여길 터.”

“아버지, 그건……”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공작이 느닷없이 자살을 택하는 건 역시 모양새가 이상하지.”

공작이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잇는 게 고통스러웠지만, 최대한 멀쩡한 척하고 싶었다.

자신 때문에 평생 죄책감을 이고 살아왔으며, 살아가야 할 아들이 눈 앞에 있었다.

“내 죽음의 근거가 필요하다면, 내 가 널 미워하여 널 먼저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하거라.”

그래, 자신의 아들이었다. 앙금처럼 가라앉은 오래된 미움을 걷어 내니 투명한 애정이 남았다.

“내가 널 암살하려했다는 정황증 거는 모두 만들어 놨어. 그러니 걱정말이고……”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너의 깨끗한 작위 승계를 위해서다.”

공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시야가 흐리다 했더니, 자카리의 모습이 두 세 겹으로 겹쳐 보였다.

“지금껏 우리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으니, 아마 사람들도 대부분 납 득할 것이다.”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까지 예상하고 계신 것일까. 그 의문이 자카리의 가슴속을 할퀴어 댔다.

“아델이 죽은 이후부터 난 항상 죽고 싶었다. 다만 내게는 가문을 지 킬 의무가 있었고……”

“더 말씀하지 마세요!”

잠시 침묵하던 공작이 자카리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새빨간 피가 묻어 났다. 아버지는 웃었다.

“지금껏 네가 소공작으로서 살아왔던 그 모습은 아주 훌륭했다.”

“아, 아버지.”

“넌 앞으로…… 훌륭한 공작이 될 거다.”

더 이상 공작은 균형을 잡지 못했다. 바람에 휘말린 나무처럼 휘청거린다.

“좀 더 온건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 해 미안하구나.”

”……”

“이엔에게도 전해 다오. 미안했다고, 그리고 고마웠다고……”

새파란 눈동자가 흐려진다. 자카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를 부축해 쓰러지지 않게 도왔다.

“……널 내 딸처럼 생각했다고.”

자카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공작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아델.”

숨을 헐떡이던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삶의 끝, 마지막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은 이.

“감히 널 아직도 사랑하는 나를, 용서해……”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전해야 할 모든 말들을 쥐어짜 낸 공작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공작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자카리는 고요한 아버지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차라리 절 미워하시려면.. 끝까지 미워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공작이 보인 딱 한 번의 애정. 그 애정에 평생 속박당하게 될 것이다.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아버지.”

공작이 자카리를 증오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근간엔 채 지워내 지 못한 애정이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공작이 자카리를 대놓고 홀대했기에, 자카리가 성장하는 동안 황가는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

“저보고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받아 들이라고……”

사람들은 공작이 아들에게 영지의 모든 일을 맡김으로써 아들을 학대 한다 여겼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 해 그는 공작령을 훨씬 자세히 알게 되었고, 수월히 영지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

비록 배려의 영역을 넘어서서 학대에 가깝게 변해 버렸지만, 아버지의 그 속내를 유추하지 못할 자카리가 아니었다. 미움을 걷어 내고 보니 보였다. 아비가 안배해 두었던 수많은 배려들이.

“함께 죽어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

이엘리를 만나기 전이라면 함께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에겐 그녀가 남아 있었다.

한참 침묵하던 자카리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가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지킬 시간이었다.

광! 방문이 부서져라 열렸다. 자카리는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밤늦은 시간의 소란 때문인지, 공작가의 사람들이 헐레벌떡 집무실 앞으로 몰려들었다. 자카리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작은 주인님, 이게 무슨……!”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자카리가 낮게 속삭였다.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그의 눈동자에 새파랗게 날이 섰다.

“이제 내가.... 헤센바이츠의 새로운 가주야.”

사람들은 얼어붙었다. 그렇게 선언하는 그의 낯에는 온기라고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