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96)

88 화

그는 이마를 어루만지는 손을 마주 잡았다. 동시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새하얀 햇빛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눈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탄성 섞인 목소리가

울린다.

“아, 드디어 깼네!"

그에게 손을 잡힌 채 이엘리는 환 하게 웃었다. 자카리는 눈매를 접으며 마주 미소를 지었다.

“설마 계속 옆에 있었던 거야?”

“그럼, 너 하루 종일 잤다고.”

이엘리는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자카리의 안색을 살피던 그녀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몸은 좀 어때?”

“몸은……”

이엘리의 한쪽 손이 이마를 짚었다. 반대편 손으로 제 이마를 짚어 체온을 가늠하며 말한다.

“뭐, 다행히도 이제 열은 없는 것 같네.”

그녀가 휴,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아름다운 얼굴이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일그러진다.

“그럼 이제 혼날 시간이지.”

”……이엔?”

느닷없는 태도 변화에 자카리는 얼빠진 얼굴로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이엘리는 팔짱을 꼈다.

“너, 누가 그렇게 함부로 아프라고 했어?”

“응?”

“듣자 하니, 장례식 직전까지 계속 잠도 제대로 안 잤다며.”

이엘리는 뾰족한 목소리로 자카리를 질책했다. 이후로 손을 들어 자카리의 뺨을 콱 꼬집는다.

“그렇게 무리하니까 아프지, 정말.”

“아야, 아파.”

“당연히 아파야지, 아프라고 꼬집은 거니까.”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카리는 얼얼한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의외로 손이 매웠다.

“미안해.”

“이제 너한테 미안하다는 소리 듣는 것도 지겹네, 정말.”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카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한참 앓고 일어나 보니 머릿속이 또렷했다. 가슴을 짓눌렀던 수많은 감정도 약간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엔.”

“응?”

“네게 할 얘기가 있어.”

이엘리는 흘긋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진지했다. 그가 입을 연다.

“아버지께서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이젠 너도 알아야 한다 고생각해.”

선대 공작의 죽음. 자카리가 내내 언급을 피하고자 했던 그 이야기다. 그녀가 어깨를 굳혔다.

“아버지께서는 자살하셨어.”

그건 알고 있었다. 이엘리가 놀란 건, 다음 말 때문이었다.

“황가의 간섭 없이, 내게 안전하게 작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엘리가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되묻는다.

“지, 진짜야?”

“그래. 내 아버지답지?”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마음속의 혼란을 애써 감추고 있는 얼굴이었다.

“너도 잘 알다시피 보통의 귀족들은 작위를 이으려면 황제의 인가를 받아야 하지.”

이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헤센바이츠 공작가가 지금껏 황가 앞에서 몸을 낮추지 않았나. 자카리가 작위를 잇는 데 문제가 생길까 봐.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황제의 인가를 받지 않고도 작위를 이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게 뭔데?”

“가주가 급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그리고 그 가주에게 합법적인 후계자가 단 한 명일 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선대 공작이 어째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 했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그때는 황제의 인가 없이 작위를 승계하는 것이 가능하지.”

“……설마.”

이엘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싸늘한 고요가 흘렀다. 자카리는 그녀의 말을 긍정해 주었다.

“그 설마가 맞아.”

“그, 그렇다면……”

“아버지께서는 내게 작위를 물려주시기 위해 일부러 목숨을 끊으신 거야.”

자카리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칼날처럼 서늘한 기억이었다.

*  * *

공작이 죽음을 맞이했던 그날, 공작은 저녁 늦게 자카리를 제 방으로 불러들였다.

오랜만에 차 한 잔 함께 하자는 전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차 담을 나눌 정도로 사이가 좋은 부자 가 아니었다.

다소 의아한 얼굴이 된 채 자카리는 공작의 방에 들어섰다. 공작이 그를 맞았다.

“왔느냐.”

“예, 아버지.”

공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맞아들였다.

차담을 나누자는 말은 사실이었는 지, 공작은 직접 차를 타 주었다. 한때 이엘리가 공작을 위해 준비했 던 리엘론 차였다.

‘이엔.’

갑자기 가슴을 쿡 찔러 오는 그녀 생각에 자카리는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넌 잘 지내고 있을까. 순식간에 밀 려드는 그리움에 자카리는 약간 혼 란해졌다. 그때 공작이 찻잔을 밀어 주었다.

“마시거라.”

“……감사합니다.”

자카리는 찻물로 입술을 축였다. 두 부자 사이로 냉랭한 침묵이 흐른 다.

공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골똘 한 얼굴로 찻잔을 감싼 채다. 잠시 후, 공작이 슬쩍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본다.

“새로 즉위한 황제는 헤센바이츠를 경계하고 있다.”

찻잔의 표면을 어루만지던 공작이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경계가 이렇게 심한 이유는 무엇인지 아느냐?”

“글쎄요. 제 생각으로는, 새로운 황제가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카리가 미세하게 시선을 들어을렸다.

공작은 제 아들의 성마른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북부의 세력이 여전히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 여깁니다.”

“맞아. 그래도 아예 후계자 수업을 헛되이 들어 넘긴 것만은 아니로군.”

공작이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후, 아주 가벼운 목소리로 아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이 나쁜 헤센바이츠의 두 사람을 어떻게든 갈라놓으려 들겠지요.”

두 사람은 가볍게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목소리와 달리, 실제로 그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특히 이엘리라는 완충재가 없어졌으니, 이간질을 하는 것도 이전보다 훨씬 쉬울 테니까요.”

아들의 담담한 대답을 듣던 공작은 비스듬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가 그대로 턱을 괴며 묻는다.

“그렇다면 묻겠다.”

”……”

“그들의 이간질에 휘둘리기 전, 황제의 경계를 풀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 있다.”

공작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아버지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자카리는 미간을 좁혔다.

“또한 완벽하게 공작 작위를 승계 할 수 있으면서도……”

빙해처럼 푸른 시선이 자카리를 탐 색하듯이 바라보았다. 공작은 여상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북부의 동정심과 결집력을 한 번에 얻어 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

“그렇군요.”

“그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나?”

자카리는 잠시 침묵했다. 공작은 명백히 그를 시험하고 있었다. 잠시 후 자카리가 입을 연다.

“……황가와 사이가 나쁜 북부의 구심점, 즉 공작가의 두 사람 중 하나가 사라져야겠지요.”

그의 대답에 공작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바늘 하나조차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아들의 얼굴.

“지금은 공작가의 직계 혈통이 둘이나 살아 있으니까요.”

패륜에 가까운 발언이었음에도 공작은 만족스러운 눈빛을 했다. 공작은 선선히 대답을 했다.

“똑똑하구나, 정답이다.”

”……”

자카리는 묘한 얼굴을 했다. 공작이 자신을 이렇게 대놓고 칭찬하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 아닙니까.”

“하지만 네가 그 방법을 떠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공작은 비스듬히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자카리가 작위를 계승하는 것은 요원했다. 황가에서 이리저리

핑계를 대서라도 인가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자카리는 이미 황제 앞에서 폭주한 전적도 있었고, 황가와 사이도 좋지 않았다.

트집을 잡으려면 그 이유가 무궁무진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왜 하시는 겁니까?”

“슬슬 네 작위 계승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 된 것 같거든."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그는 미간을 좁혔고, 차의 향을 음미하던 공작은 한 모금 차를 마셨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에 한해 서만큼은 그리 현명하지 못하군."

이후 여유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카리는 어깨를 굳혔다.

공작은 저를 쏘아보는 형형한 시선을 마주했다.

헤센바이츠의 혈통에게서 물려져 내려오는 새파란 눈동자를 보며 공작은 미소했다.

“자카리.”

“예.”

“아직도 이엘리를 포기하지 못했 나?”

느닷없는 질문에 그는 입술을 지그 시 깨물었다. 이엘리. 그 이름만큼 파괴적인 이름도 없었다.

“……제가 그녀의 곁에 머무른다 하여, 이엔이 행복할 가능성은 무척 낮습니다.”

“그 말은 즉,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다는 뜻이군.”

”……”

정곡을 찔렸다.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계속해서 뜻 모를 질문만 하는 아버지가 짜증스러웠다.

"제가……”

공작은 묘한 눈빛으로 자카리를 응시했다. 무어라 말을 고르려던 자카리는 긴 한숨을 쉬었다.

“……이엔을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자카리가 신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아한 동작으로 차를 마시던 공작이 불쑥 입을 연다.

“나도 그랬다.”

“예?”

“나도 평생 아델을 포기할 수 없었어.”

”……”

한 모금 차를 마신 공작이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공작의 눈동자에는 열은 회한이 서려 있다.

“그래서. 아델이 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저버렸을 때.”

“……아버지.”

“난 평생 널 용서하지 않기로 맹세 했었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새삼스레 어머니에 대하여 말하는 아비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압니다. 제가 어떻게 아버지의 용서를 바라겠습니까.”

자카리는 희미하게 조소했다. 목이 타는지 공작은 다시 한 번 차를 마 신 후 이후 말을 잇는다.

“하지만.”

뭔가 할 말이 더 남았나. 자카리는 비딱한 시선으로 공작을 마주 보았다. 공작이 작게 웃었다.

“용서는 하지 못해도, 죽음의 끝에 서…… 잊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예?”

“증오를 정리하고 놓아 버리는 것, 그 정도는 아델도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한다.”

공작의 말에 자카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공작은 말끔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많이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는지.”

공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아버지가 내게 무언가를 해 준다고? 그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이제 와서? 그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신경 써 줄 정도로 다정한 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이 해묵은 증오를 이제야 놓아 버릴 마음이 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널 미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공작은 엄지로 찻잔의 매끄러운 윗면을 쓸었다.

리엘론 차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사실 이 아쉽진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과업을 해치운 후련함이 느껴졌다.

“내가 죽는 순간은 내가 선택하겠다고.”

“잠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지금 도대체..

“네가 말했었지. 황가의 견제를 피 하려면 공작가의 직계 혈통 중 하나 가 사라져야 한다고.”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인 공작이 자카리에게 말했다. 공작의 푸른 시선이 우아하게 휘었다.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한다면, 역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사라지는 게 맞지 않나.”

“무슨 그런 말씀을!”

자카리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마치 스스로가 죽을 것을 예견하는 것처럼, 공작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화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공작이 작게 속삭였다.

“기억하거라, 자카리.”

자카리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자 신을 바라보는 공작의 눈동자가 진지했다. 그가 곧장 말을 잇는다.

“내가 선택한 것들이 모여 자신의 인생이 만들어지는 거야.”

공작의 눈동자 깊은 곳에 묘한 열 기가 담겨 있다. 공작은 나직한 목소리로 힘을 주어 말했다.

“내가 이쯤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넌 끝내 공작가의 작위를 이을 수 없게 될 거다.”

“공작가의 작위 따위, 이제 필요 없습니다!”

자카리는 날카롭게 언성을 높였다.

사실이었다.

그가 한때나마 공작 작위를 얻으려 했던 이유는 오로지 이엘리 때문이었다.

이엘리를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그녀는 이제 제 곁에 없다.

“아니, 필요하게 될 거다.”

하지만 공작은 냉정하게 선언했다. 자카리의 눈이 잘게 떨렸다. 공작은 당연하다는 양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