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96)

87 화

‘이건 좀 심각한 것 같은데.’

그녀가 미간을 좁히면서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그와 결혼 생활을 하던 내내 잔병치레 한번 해 본 적 없던 자카리였다.

아무래도 빨리 침대에 눕히는 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때.

“이런 말 하면, 넌 분명 화를 내겠지만.”

“무슨 말?”

자카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지쳤다. 가슴속에 고여 썩어 가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차라리 아버지 대신 내가 가는 편 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자리에서 멈칫한 이엘리를 보며 자카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살아 있는 것보다 아버지가 계시는 편이 더 나았어.”

“뭐?”

“그런데도 난 아버지를 말리지 못 했지……”

온몸에 힘이라고는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물 먹은 솜처럼 온몸 이 노곤했다.

머리는 이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 지 못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마치 늪처럼 자카리를 끌어당기는.

“그거 알아, 이엔?”

자카리의 시선에 기이한 빛이 서렸다. 이엘리는 어깨를 굳혔다. 자카리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아버지는 오로지 나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거야.”

자카리의 목소리가 천천히 흐트러졌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돌렸다.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결국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지.”

“너…… 그게 무슨.”

“내가 아니었더라면, 아버지는 그런 죽음을 선택하실 필요가 없었 어.”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했는데, 자꾸만 목소리가 덜덜 떨려서 나온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나의 부모님을 모두 죽 인 것이나 다름없어.”

“그런 말 하지 마, 그건……”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나 때문에 돌아가셨어.”

이엘리는 어떻게든 자카리를 설득하려 했지만, 자카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없었더라면 그렇게 돌아가시 지 않아도 됐을 거야. 오랫동안 그를 매도해 왔던 절망이 다시 그를 덮쳤다.

“나와 얽히는 사람은 모두 좋지 못 한 결과를 맞고 말아.”

마치 원죄를 고백하듯 자카리는 그렇게 속삭였다. 그때 이엘리가 와락 자카리를 끌어안았다.

“이엔, 이거 놔. 젖잖아.”

“좀 젖으면 어때!”

앙칼진 목소리에 자카리는 어깨를 굳혔다. 저를 쏘아보는 연녹색 눈동자가 온통 젖어있었다.

“울지 마, 네가 왜 울어.”

자카리는 온통 쉬고 갈라진 목소리 로 이엘리에게 말했다.

내 슬픔은 내가 감당하면 족해. 너를 울리고자 말한 게 아니었는 데…… 이엘리가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자카리 너, 이렇게 슬퍼하고 있는데.”

”……”

“그런데도 전혀 울지 않잖아.”

자카리는 순간 막막해졌다. 이엘리는 언제나 그랬다.

예전 황제의 오페라에서도, 지금 이 자리에 서도. 그를 위해 순수하게 울고, 화를 내 주는 유일한 사람. 그녀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너 대신 울어 줄 거야.”

“이엔.”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건조한 눈동자 안쪽, 깊게 할퀴어진 채 남아 있는 상흔을 응시했다. 바다색 눈동자는 사막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그가 흐느끼듯 속삭였다.

“이엔…… 난 어쩌면 좋지?”

“자카리.”

“나는, 아버지를, 나 때문에, 모든 게……”

온통 젖은 이엘리의 눈동자가 그를 비춘다. 봄비에 젖은 새싹처럼 연연한 눈동자.

그 안의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자카리는 그를 억지로 버티게 했던 마지막 선이 부스러지는 걸 느꼈다.

“아니야.”

”……”

“네가 마음이 힘든 건 알겠지만, 모든 것을 네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어.”

하지만 이엘리는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속에 담긴 온기가 제멋대로 난도질당한 마음을 덮어

주었다.

“자카리, 날 봐.”

”……”

“혼란스럽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렇다면 나만 봐.”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자카리의 양 뺨을 그러쥐었다. 빙해처럼 얼어붙 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강제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게 한 후, 이엘리는 한 음절 한 음절 또박 또박 입을 열었다.

“내가 네 옆에 있어.”

“……이엘리.”

“절대로 네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 여기에 있어.”

변하지 않는 진실을 이야기하듯 이엘리는 그렇게 말했다. 연녹색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그런데도 아직도 무서워?”

이엘리가 물었다. 그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아직도 무섭냐고?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소중한 사람들은 모두 나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났어.’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자그마한 아가씨는, 제 삶을 모두 주어도 모자랄 이엘리였다.

“나는……”

자카리는 무언가 말하려했다. 그 러나 그녀는 그가 말하도록 두지 않았다.

이엘리는 곧장 자카리의 입술을 삼켰다. 열에 들뜬 입술 위로 촉촉한 입술이 가닿았다. 그가 얼어붙었다.

”……읏.”

자카리는 차마 그녀를 밀어내지 못했다. 오래 사막을 헤맨 여행자가 물 한 모금을 얻듯, 자카리는 그녀의 호흡과 체온을 간절히 갈구했다.

서로 어루만지고, 두드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깊숙이 들어간다. 이엘리는 그의 목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이엔.’

그들의 키스는 다친 동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할아 주는 것에 가까운 접촉이었다.

서로의 아픈 곳을 감싸고 어루만지는 교감. 잠시 후 이엘리가 입술을 떼어 냈다. 자카리가 그녀를 응시했다.

“봐, 자카리.”

숨을 헐떡이며 그녀가 말했다. 올 곧은 눈동자가 자카리를 빤히 바라 본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난 여기에 있어.”

“....이엔 ”

“바로 네 앞에, 네 눈이 닿는 곳에 있어."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엘리를 바라보는 자카리의 눈동자가 바람맞은 호수처럼 떨렸다.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하지만……”

“몇 번이고 말했잖아, 난 절대로 너를 떠나지 않는다고.”

이엘리의 말에 자카리는 말문이 막혔다. 절대로 너를 떠나지 않는다. 꿈처럼 달콤한 말이었다.

“넌 너 때문에 모든 사람이 널 떠 난다고 말하지만……”

”……”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내가 증명해 보일 테니까.”

자카리의 목을 휘감은 채 이엘리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가 숨을 삼켰다.

거짓말. 그럼에도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떻게 든 이엘리의 말을 믿어 보고 싶었다.

“자카리, 나 믿지?”

이엘리의 눈동자가 봄날 햇살처럼 반짝거렸다. 자카리는 도무지 그 시선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응, 믿어.”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자,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짓는다. 그러고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됐다.

“너, 몸이 뜨거워.”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보여, 너!”

그녀가 잔뜩 미간을 좁혔다. 자카리는 이엘리를 따라 웃었다.

너무 오래 밖에 있었던 데다 비까지 흠뻑 맞았다. 온몸을 덮치고 물어뜯는 추위조차 남이 느끼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걱정해 주니까…… 기뻐.”

진심이었다. 그와 동시에 자카리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자카리의 무릎이 힘없이 꺾이며, 몸이 축 늘어졌다. 그의 이마가 불 덩어리처럼 뜨겁다. 이마를 짚던 이엘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자카리? 자카리!”

자신을 간절하게 부르는 그 목소리 가 마지막이다. 안도감과 동시에 정 신이 까무룩 멀어졌다.

 그날 이후 자카리는 호되게 앓았다. 피로가 한창 쌓여 있기도 했고, 정신적으로도 몰려 있었던 탓이다.

게다가 비까지 흠뻑 맞았으니 쓰러 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

그의 신체 중 가장 먼저 감각이 돌아온 부분은 청각이었다. 주변 공기가 따스했다.

시야는 보드라운 커튼 같은 어둠으로 가려져 있는데, 사람들이 낮게 대화하는 소리가 소곤소곤 귓전을 간지럽힌다.

“자카리가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 리는 건가요?”

울 것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이엘리였다. 이엔, 넌 왜 그런 목소리를 하고 있어. 그는 그들의 대화에 애써 집중했다.

처음에는 웅얼거리는 것 같던 목소리가 천천히 형태를 찾는다.

“근래 가주님께서는 제대로 잠을 주무시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맞지만……”

“게다가 선대 가주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드셨겠지요.”

조곤조곤 설명하는 사람은 바로의 사였다. 의사는 이엘리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워낙 신체가 강건하시니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너무 걱정 마시지요.”

“그래도 이렇게 오래 눈을 뜨지 않은 적은 없었는 걸요."

“이런, 아가씨. 아직 다섯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무시고 계실 뿐이예요.”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따뜻한 물 수건이 이마와 뺨 언저리를 닦아 내는 게 느껴진다.

자카리는 눈을 뜨고 싶었다. 눈을 떠서 이엘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 피곤해.’

물 먹은 솜처럼 온몸이 노곤했다.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다. 어떻게 눈을 감고 있는데도 졸릴 수 있을 까. 이런저런 생각하던 자카리는 수 면의 늪에 발을 잡혔다. 그는 속절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자카리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겹겹이 쌓인 꿈의 층위로 과거의 기억들이 제멋대로 들락거렸다.

지금 꾸는 꿈은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이엘리를 만나기 전, 자신을 억누르던 그때.

‘소공작님은 조금 무섭지 않아요?’

공작성에서 드물게 열렸던 연회였다. 끼리끼리 어울리던 아이들이 재잘거리면서 떠들어 댔다.

‘헤센바이츠의 겨울의 마법은 온 세상을 모두 얼려 버릴 수 있는 힘 이라면서요?’

'그리고 소공작께서는 은룡의 가장 순수한 피를 타고나신 분이라잖아요.’

아이들의 눈에는 여러 가지 빛깔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들과 동갑내기인 소년이 강인한 기사들조차 이루지 못한 무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세우는 것에 대한 질 투.

일반인과 다른 이에 대한 공포. 전 설 속에서 나올 법한 강력한 마법의 재림.

아이들은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이었다.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전공도 수없이 세우셨다고, 우리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에이, 야만족뿐이겠어요? 그 끔찍한 마수들도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 간대요.’

자카리는 조소했다. 제 힘은 사람의 목숨을 단번에 빼앗고, 마수들을 순식간에 얼린다.

손가락만 갖다 대도 만물은 부스러진다. 모두가 괴물이라 입을 모은다.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힘이었다.

‘……그래,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나 때문에 불행해지니까.’

바스락. 나뭇잎이 밟혔다. 별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던 아이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소, 소공작님?’

‘으.....’

제멋대로 떠들어 대긴 했지만, 압 도적인 일화의 대상을 눈앞에서 보는 건 역시 두려웠나 보다.

‘…무, 무서워.’

‘괴물……’

자카리의 존재 자체는 사람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아이 들은 곧 울상이 되었다.

‘세상에, 소공작님을 앞에 두고 너희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다들 이리 와!’

그때 귀부인들이 황급히 이쪽으로 달려왔다.

아이들을 치마폭에 감싼 귀부인들은 자카리에게 꾸벅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소공작님!’

'아이들이 어리고 잘 몰라 실언한 거예요, 부디 자비를…….’

눈앞의 아이들은 자카리와 동갑내기였다.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아이들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감싸여 있었다. 그들은 부모님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었고, 사랑받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

사는 세계가 다르다. 가끔씩 회의감을 느낀다. 난 언제쯤 당신들의 세계에 편입될 수 있을까.

“……리.’’

그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카리는 반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온기가 가득한 세상. 외롭지 않은 세상.

항상 바라 왔던 그 세상의 문을 열어 주는 유일한 사람이 그를 부르 고 있었다.

“……자카리.”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 익숙한 감촉.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치워 주고 뺨을 쓸어내린다.

“아, 정말.”

약간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 사람은. 그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나의 이엘리.

“언제까지 잘 생각이야?”

조그만 목소리로 이엘리는 투덜거렸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자카리는 깨어날 때임을 느꼈다.

“내가 이렇게 널 기다리고 있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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