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화
비록 공작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공작의 평온한 얼굴은 마치 그녀에게 ‘당연하다’라고 대답해 주는 것 같았다.
이엘리는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 고, 공작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편히 잠드세요.”
조그맣게 속삭인 이엘리는 망자에 게, 그리고 상주인 자카리를 향해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다.
“공작님의 영면을 바랍니다. 가장 깊은 평안 속에 영원히 머무르시기를.”
“감사합니다. 그대의 기원이 내 아버지를 안식 속으로 이끌어 주실 겁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잠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묵직한 고요가 호흡을 버겁게 했다. 그녀를 의식해서인지 지금껏 멀쩡한 척 낯빛을 가다듬던 자카리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관을 앞에 두자, 그도 더 이상 평온을 가장할 수 없 게 되었다. 자카리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엔.”
눈앞의 자카리는 헤센바이츠의 새로운 공작이었지만, 동시에 아버지를 잃은 어린 청년이었다.
‘자카리는 아직 갓 성년을 지났을 뿐인데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몸, 애써 감정을 짓누르려 애 쓰는 파리한 낯.
푸른 눈동자 안 가장 깊은 곳에 침잠한, 흰 눈처럼 창백한 슬픔. 목이 멘 이엘리가 입술을 짓씹었다.
“자카리.”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자카리는 충동적으로 이엘리에게 손을 뻗었다. 그대로 이엘리를 와락 끌어안는 다. 이엘리는 자카리를 보듬어 주었다. 자카리가 상처 입은 맹수처럼 낮게 속삭였다.
“잠시만……”
”……”
“아주 잠깐이면 되니까……”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손을 뻗은 그녀가 자카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자, 자카리의 목 깊은 곳에서부터 짐승 같은 신음 소리가 기어올랐다.
”……윽.”
하지만 이번에도 자카리는 울지 않았다. 다만 나지막이 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억누를 뿐이다.
“아버지.”
그녀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자카리는 낮게 속삭였다. 손에 쥔 국화 가 형편없이 뭉그러졌다.
“죄송합니다……”
바닥 깊은 곳에서부터 긁어 올린 사죄였다. 무엇이 그리 미안한지 알 수 없지만, 우는 방법조차 잃어버린
청년의 목소리는 처절하기만 했다. 가슴이 뻥 뚫린 상실감이 그를 괴롭게 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로……”
자카리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를 괴롭히는 상실감은 지나치게 깊고 지나치게 어두웠다.
“……죄송합니다.”
눈물 한 점 없이 새뜻한 눈동자가 죽은 아비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하지만 이엘리는 그 시선 안에 숨겨
져 있는 깊은 슬픔과 고독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도.
‘자카리.’
그랬기에 그녀는 그저 그에게 한껏 몸을 붙이고 자신의 체온을 나눠 주었다.
오래된 추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얼음 갑옷으로 마음을 두른 청년에 게, 그 갑옷이 조금이나마 녹길 바 라며.
길고 긴장례식도 이제 마지막 절차만 남았다. 바로 공작의 관을 공작가의 가묘에 묻는 과정이었다.
“공명하고 정의로웠던 헤센바이츠의 공작이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긴 추도사가 이어졌다. 공작은 객 관적으로 훌륭한 군주에 가까웠다.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의 표정만 봐 도 알 수 있었다.
그저 슬픔을 꾸며 내는 것과, 실제 로 그 슬픔을 느끼는 건 다르다.
“공작님의 치세 아래 공작령은 유래 없는 번영을 누렸으며, 공작령의 시민들 또한……”
추적추적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다. 비단과 꽃으로 감싼 공작의 관 이 깊게 파인 구덩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사람들은 우산을 쓴 채 공작의 관 이 땅에 파묻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평온한 안식을 맞이하시길.”
추도사가 끝났다. 공작의 관 위로 흙이 뿌려진다. 자카리는 홀린 듯 공작의 무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내심 걱정스러운 얼굴로 새로운 공작을 곁눈질했다.
“솔직히 선대 공작께서 이렇게 급작스럽게 떠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마 현 공작께서 작위를 무사히 승계했다는 건 다행이지만요.”
“부디 새 공작께서도 황가와 큰 충돌 없이 계셔야 할 텐데……”
그의 말대로 자카리는 몇 번이나 황가와 본격적으로 충돌했던 전적이 있었다. 사제가 말을 맺었다.
“이로써 테론 헤센바이츠, 선대 공작께서는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 길, 편히 가시기를.”
장례식이 모두 끝났다. 자카리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파리한 얼굴이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폈다. 온갖 감정으로 들끓는 시선이다. 이윽고 자카리는 입을 열었다.
“모두들 제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자카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이다. 차갑게 식은 공기 속, 하얀 입김이 부서져 흩날렸다.
“돌아가시는 길은 집사가 살펴 드릴 것입니다."
자카리에게 마주 예를 갖춘 사람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이엘리는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상하게 그 뒷모습이 메마른 겨울 나무 같았다. 금방이라도 부러져 버릴 것 같은.
”자카리……”
“난 괜찮아, 이엔.”
자카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엘리는 자카리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잠시만 혼자 있게 해 줄래?”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의 눈동자는 그저 고요했다. 얼어붙은 바다와 꼭 닮은, 시린 그 눈동자.
“너무 늦게 오지 마, 알았지?”
“그래.”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엘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멀어지는 자카리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이엘리가 걱정할까 싶어, 우산까지 받쳐 들고 차분하게 걸음을 옮기던 자카리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밭은 숨이 목의 안쪽을 아프게 찔러 댔다.
“헉, 허억, 헉……”
자카리는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우산은 이미 어딘가에 내동댕이친 지 오래, 차가운 빗줄기가 화살처럼 온
몸에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 게만큼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주 고 싶지 않았다.
“…하아.”
이엘리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려 아무렇게나 달린 결과, 그는 넓은 정 원의 한구석에서 문득 이성을 되찾았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온몸은 차갑게 식었다. 자카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여긴?”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인적이 드물다는 점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자카리는 앙상한 나무 아래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아니, 정확히 말 하자면 무너졌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아버지.”
자카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마지막 시간이 제 멋대로 쏟아져 내렸다.
“아버지……”
언제나 냉랭했던 그의 아버지. 차라리 그를 밀어내려면 끝까지 밀어 내지, 끝의 끝에서 아버지의 애정이랍시고 보여 준 그 행동들.
자카리는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의 말이 귓속에 쟁쟁했다.
‘공작 각하께서 돌아가셨는데 눈물 한 방울 보이시지 않네요.’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은 부자였다지만, 저건 좀 심하지 않습니까.’
자카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그저 사이가 나쁜 부자로 끝까지 선을 긋는 게 나았을 텐데.
“차라리 마지막까지 제가 아버지를 미워할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 두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생각이 아버지에게로 치달았다. 이엘리를 다시 만나며 애써 괜찮은 척 했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해일처럼 온갖 감정이 몰아쳐 들어온다.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괴로울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자카리는 조소했다. 그 조소는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쿡쿡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던 자카리가 나 무에 툭 머리를 기댔다. 지독히도 피곤했다. 독약처럼 고인 죄책감이 그를 좀먹었다.
* * *
이엘리는 초조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났는데 자카리는 공작성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그래도 몸이 차가워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자카리가 왜 돌아오지 않지?’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이 추운 날씨에 외부에 이렇게 오래 머무르는 건…….
'몸이라도 상하면 어떡하려고……”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렇지 않아도 식사와 수면이 한참 모자라,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던 자카리였다.
게다가 공작성 사람들 중 자카리의 행방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안 되겠어, 찾아보러 가야겠어.’
우산을 챙겨 든 그녀가 방을 나섰다. 마치 안개처럼 흩날리는 빗발이 시야를 보얗게 물들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야가 온통 흐렸다. 자카리는 얕게 숨을 몰아쉬었다. 눈이 뜨겁다.
‘분명 이엔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어렵다. 그는 쓰게 웃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감마저 기껍게 느껴지다니.
하나 피로감에 뒤섞여 아버지의 생각이 흐려지는 게 기뻤다.
‘돌아가야 할 텐데……”
그는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 사박사박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자카리는 눈을 깜빡였다.
“.....이엔 ”
불쑥 튀어나온 우산이 시야에 들어 왔다. 연연한 새싹을 닮은 녹색 우 산이었다. 우산은 곧바로 자카리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그의 몸을 쉴 새 없이 두드리던 차가운 빗방울이 사라졌다.
“세상에, 자카리. 여기서 뭐해?”
희고 가녀린 손이 자카리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걱정이 가득 찬 목소리가 자카리를 질책했다.
“날씨도 추운데, 이렇게 비를 맞으면 온몸이 차가워지잖아!”
”……”
“우산은 어디에 버려두고, 이렇게 구석진 곳에서 혼자서 뭐해?”
자카리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엘리는 우산을 한껏 기울여 자카리의 머리 위에 씌웠다.
“걱정했잖아, 일찍 돌아온다더니 두 시간이나 돌아오지 않고……”
“이엔.”
자카리가 그녀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지독하게 낮았다. 이엘리가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난 괜찮아.”
“뭐?”
이엘리는 기가 막힌 낯을 했다. 하지만 자카리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일 따름이었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이엘리는 손수건부터 들었다. 온통 젖은 얼굴을 닦아 주며 그녀가 화를 냈다.
“괜찮다니, 흠뻑 젖었으면서! 넌 지금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그냥, 네 얼굴을 보니까 반가워 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스스로를 보니 아무래도 조만간 말실수를 할 것 같다. 자카리는 더 말하는 대신 공작성으로 돌아가기로했다. 자카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만 돌아가자.”
“……자카리?”
이엘리는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자신은 괜찮았지만, 이엘리는 이런 빗속에 내버려 두면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한 그녀였으니 감 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지 않은가.
“날씨가 차갑잖아. 감기라도 걸리 면 어떡해.”
“넌 온통 젖어 놓고, 지금 내 감기를 걱정하는 거야?”
“난 원래 건강하니까.”
그렇게 대답하던 자카리는 순간 눈 앞이 빙글 도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를 물었다. 안 돼.
하지만 몸은 그의 의지를 완벽히 배반했다. 극도로 적은 수면과 비로 인해 차가워진 몸 탓이었다.
“자카리!”
깜짝 놀란 이엘리가 자카리의 몸을 부축했다. 하지만 자카리는 손을 내 저어 그녀를 밀어냈다.
“괜찮아, 발을 헛디뎠을 뿐이야.”
“너 정말……”
이엘리는 자카리에게 바싹 붙어서 우산을 들이댔다. 자카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 앞에서는 절대로 무 너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는 부러 허리를 곧게 펴고 그녀를 향해 웃었다.
“……됐으니까 얼른 돌아가자. 너 얼굴이 무척 창백해, 알아?”
그렇게 말한 이엘리가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의 손을 맞잡았고, 곧바로 경악한 얼굴을 했다.
“이런, 너 손이 뜨겁잖아.”
“그래?”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을 치듯 자카리는 맞잡은 손을 흔들어 댔고,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처음 그를 발견했을 때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지금의 그는 무척 불안정해 보인다.
‘게다가 안색도 안 좋아.’
체온도 이상하게 높은데, 오래 비를 맞은 얼굴은 백지장처럼 희었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너, 아무래도 몸 상태가 굉장히 안 좋은 것 같아. 빨리 들어가자.”
”……”
“열이 나고 있잖아. 진짜 앓아누울 지도 모른다고.”
이엘리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자카리가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쓸어내린다.
비가 내려 차갑게 식은 뺨 위로 뜨거운 손바닥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