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96)

85 화

“가족장으로 치르는 장례식인데, 무려 황녀가 조문을 위해 내려올 줄 은 몰랐지. 아무래도 황제가 꽤나 몸이 달았었나 보지.”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의 목소리는 다소 냉소적이었다.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이엘리는 작게 고개만을 끄덕였다.

“어쨌거나 장례의 규모를 키울 생각은 없어서, 네 생각보다 성대하지는 않을 거야.”

자카리의 푸른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아버지를 언급할 때마다 가슴 깊은 곳이 따끔거렸다.

“아버지께서도 장례식은 최소한만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시기도 했고……”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신 아버지였다.

새로 작위를 이을 자카리에게 부담이 될 것을 염려했는지, 장례의 규모는 최대한 작게 하라 미리 집사에게 언질을 해 둔 모양이었다.

‘아버지.’

그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은 지 독한 죄책감과 부채감, 그리고 채 지우지 못한 애정이었다.

‘전 당신을……’

마음이 제멋대로 헝클어진다. 자카리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이엘리가 자카리의 손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퍼뜩 놀라 그녀를 내려다보니,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였다.

“그렇게 세게 깨물면 입술이 상한다고.”

”……”

“이제 귀빈들까지 맞이해야 할 텐데, 입술이 터진 채로 나갈 수는 없잖아.”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살짝 쓸어 내리던 이엘리가 한숨을 삼켰다. 다행히 피를 내지는 않았다. 망연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자카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별말씀을.”

이엘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엘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자카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혼자 이 무게를 견딜 수 있었을 지, 자신이 없었다.

그들은 곧장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장례식의 모습은 호사에 찌든 수도의 귀족들이 보면 너무 소박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모양새였다.

하나 그녀는 오히려 이 풍경이 가 장 진실 된 장례식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모두 공작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모두 고인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엘리는 이 자리에  모인사람들이 순수하게 공작을 추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존경받는 군주였던 것이다.

“이리 와, 이엔.”

“응.”

두 사람이 홀 안에 발을 들이자, 마치 돌멩이가 물에 던져진 파문처럼 속삭임이 일었다.

“설마, 레이디 블랑쳇?”

“레이디께서 여기는 어떻게……”

하긴 사람들이 놀랄 만도했다. 관계가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던 현 공작의 전 아내가 느닷없이 공작성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공작은 그녀를 예전처럼, 즉 아내였던 때처럼 대하고 있었다.

“설마 공작성에 다시 돌아오신 걸 까요?”

“하지만 두 분께서는 이혼하셨잖아요.”

사람들은 낮게 소곤거렸다. 그녀는 검은 드레스를 차려입고, 검은 베일 로 분홍색 머리채를 감쌌다.

명백히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한 모습이었다. 그때 자카리가 주변을 차갑게 한 바퀴 휘돌아봤다.

”……” 

”……”

그와 눈을 마주하자마자 수군대는 음성들은 자취를 감췄다. 이엘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

자카리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엘리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탓이었다.

하지만 공작에게 말을 걸 정도로 용기 있던 사람은, 그 용기를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했다.

“레이디 블랑쳇께서도 이번 장례에 참석하십니까?”

“레이디 블랑쳇이 아닙니다.”

자카리는 냉랭한 어조로 답했다. 흠칫 어깨를 굳히는 상대방에게 자카리가 비뚜름히 웃었다.

“레이디 헤센바이츠입니다.”

그 차분한 얼굴을 보며 상대방은 얼어붙었다. 자카리는 곧장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도 모두 알다시피, 전 이 제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가주입니다.”

”……”

“그 말은 곧, 누군가의 허락 없이도 제 반려를 제가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자카리의 새파란 눈동자에는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자카리의 말이 맞았다. 작위를 계 승한 자카리는 더 이상 선대 공작의 허락 없이도 혼인 관계를 이룰 수 있었다.

“이혼은 이미 과거의 일입니다.”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이엘리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이엘리는 가만히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녀는 제 단 하나뿐인 반려이자, 헤센바이츠의 공작 부인이며, 북부의 안주인입니다.”

선고처럼 말이 떨어졌다. 장례식장 에 충격이 뒤섞인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그 와중 자카리의 얼굴만이 홀로 평온했다.

“이전에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요.”

이엘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압 도적인 고요함.

그 누구도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자카리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선언했다.

“또한 헤센바이츠의 유일한 안주인은 마땅한 예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 사람들을 헤치고 집사가 앞으로 나섰다. 곧 이엘리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인다.

“레이디 헤센바이츠, 북부의 안주인이자 공작 각하의 적법하며 유일한 반려를 뵙습니다.”

공작성 사람들의 대표 격인 집사가 그렇게 인사를 올리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나눈다. 그때 지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황녀 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이예요, 레이디 헤센바이츠.”

사람들은 숨을 삼켰다. 이 자리에는 수많은 귀빈들이 모여 있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귀빈은 역시 황녀였다.

그런 황녀가 이엘리에게 ‘레이디 헤센바이츠’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건.

‘황녀 전하께서 레이디를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인정하신다는 뜻이지.’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 줄이야.’

사람들은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눈치를 살폈다. 한편 황녀는 그저 반가운 얼굴이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이엘리는 정중하게 황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황녀가 즐거운 목소리로 이엘리를 반겨 주었다.

“공작과 레이디가 함께 돌아온 것을 보니, 두 사람은 다시 재결합하 기로 한 거군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전하.”

뭔가 어색한 기분에 이엘리는 희미 하게 웃어 보였다. 황녀는 그녀의 손을 꼭 맞잡으며 말했다.

“정말 축하해요. 저도 정말 기뻐 요.”

“감사합니다.”

“사실 레이디 외의 다른 분을 ‘레이디 헤센바이츠’라고 부를 마음이 안 나더라고요.”

황녀는 장난스럽게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상황을 정리했다.

“드디어 공작과 공작 부인 두 분 다,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온 것 같네요.”

그제야 이엘리는 주변의 모습이 어떤지를 살펴볼 정도의 여유를 되찾았다.

자카리는 물론이고 황녀까지 이엘리를 대놓고 인정해 주어서일까, 방 안의 분위기는 이제 그럭저럭 부드러웠다.

“정말 반갑습니다, 레이디. 레이디께서 이렇게 돌아오실 줄 몰랐습니다.”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놀라지 않았을 텐데요.”

“경황이 없어 그러지를 못했네요.”

이엘리는 웃는 얼굴로 공작성에 머무르고 있던 수많은 귀빈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자카리도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좀 해야 할 텐데.’

이엘리는 흘끔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자카리는 내내 그녀의 곁에 붙어있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할까 경계하고 있는 것 같다. 잠시 후 이엘리가 작게 속삭였다.

“자카리.”

“응?”

“우리도 이만 공작님을 뵈러 가는 게 좋겠어.”

“……그래.”

자카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리는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자카리가 새로 작위를 승계한

것은 알지만, 그래도 아직 자신의 시아버지에게 ‘선대’라는 호칭을 붙이기가 꺼려졌다.

‘…마지막 인사라.’

아직 공작의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바윗덩이를 삼킨 것처럼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망자와의 마지 막 인사를 위해 공작의 관을 모신 너른 홀 안으로 들어섰다.

‘조용하네.’

망자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일까, 귀빈들이 모인 응접실과는 다르게 홀은 고요했다.

'공작님께서 이런 장례식을 원하셨다고 했었지.’

가족장을 택했다 하더니, 온갖 허례허식도 모두 치워 버린 모양이었다.

붉은 주단과 군데군데를 밝힌 고급 초, 북부에서 유독 값비싼 하얀 국 화 장식 외엔 큰 사치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리 와, 이엔."

“아, 응.”

이엘리는 자카리의 곁에 다가갔다. 자카리는 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가 아비의 모습을 훑는다.

“……아버지.”

자카리는 낮게 속삭였다. 그녀가 가만히 자카리의 어깨를 어루만지자, 자카리가 숨을 삼켰다.

“먼저 꽃부터 바쳐야지, 자카리.”

“그래.”

하지만 입으로는 그렇게 대답하면 서도, 자카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홀 린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자카리?”

”……”

그의 침묵에 이엘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자카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가 말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면, 나부터 꽃을 바칠게.”

“……아버지도 아마 그 편을 더 기뻐하실 거야.”

자카리는 쓰게 웃었다. 공작이 그녀를 딸처럼 생각하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아버지가 진심으로 웃었던 건 오직 그녀가 곁에 있을 때 뿐이었다.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글쎄, 난 공작님께서 네 꽃을 받기를 더 바라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우리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야.”

“너야말로 공작님과 네 관계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지.”

이엘리는 불퉁한 얼굴을 했다. 아마 자카리와 공작 모두 인정하지 않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상당히 소중하게 여겼다.

비록 애증이 섞인 관계일지라도 기 반에 깔린 감정은 애정이었다.

‘공작님께서는 자카리 외의 다른 사람을 제 후계로 생각하지 않았지.’

공작 정도면 새로이 재혼을 해도 됐을 테고, 다른 후계자를 내세우려 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은 그러지 않았다. 자카리 또한 공작을 싫어하면서도 아들 노릇은 충실했다.

‘뭐, 두 사람은 부정할 테지만.’

망자의 관에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곁에 놓여 있는 화병에서 흰 국화 한 송이를 뽑아 들었다. 비로드와

모피, 새하얀 국화로 감싸인 테론의 모습은 마치 깊게 잠든 것처럼 편안 해 보였다.

“공작님.”

손에 든 꽃을 그의 몸 위에 조심 히 올려놓고 차갑게 식은 이마에 입 맞춘 이엘리가 속삭였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 

“하지만 공작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좀 주셨어야지요.”

마치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는 것처럼 이엘리가 공작에게 속삭였다. 자카리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생전 이엘리를 보면서 공작이 지었던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치 어린 딸을 대하는 것처럼 다정한 눈 빛을 하고 있던 아버지.

이엘리는 공작의 이마를 가만히 쓸어 내렸다.

“몸 건강하시라고 말씀드렸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가세요?”

”……”

“그때 뵈었던 모습이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이엘리의 목소리 끝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북부를 떠나며, 그녀는 공작에게 무어라 말했던가.

“……그렇게 차가운 얼굴로 이별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엘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을 닦아 내며, 이엘리는 잠긴 목소리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제가 공작성을 떠나던 그날, 공작님께서는 자신을 원망하느냐고 물으셨죠.”

”……”

“공작님이 무슨 마음으로 그러신지 알았는데도, 원망한다고 말씀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툭툭 끊겼다. 공작이, 그리고 자카리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였다. 그녀가 다칠까 두려워서. 스스로를 향한 가 없는 애정이 고마웠다.

“그리고 멋대로 돌아온 것도 사죄 드릴게요.”

”……”

“하지만 저, 자카리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이미 말씀드렸었으니까요.”

이엘리는 눈물 고인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 잠든 공작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엘리가 물었다.

“이젠 공작님께서도 저희를 축복해 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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