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화
“우리는 끝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알았지?”
서로를 마주 보던 두 사람은 이윽고 마주 웃어 보였다.
서글픔과 행복함,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 갖가지 감정이 뒤섞인 미소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엔.’
그녀의 따스한 체온에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녀의 온기를 만끽하던 자카리는 문득 생각했다.
‘나 혼자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 걸까.’
아버지의 죽음.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버거웠다. 하지만 끝없는 죄책감과 부채감에 시달린다 해도, 그 죽음에 대한 벌을 받는다 해도……
지금은 이엘리의 애정을 온전히 누리고 싶었다.
‘……아버지’
그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든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내기를 바라며.
이엘리는 간단한 상황을 적은 편지를 부모님에게 부쳤다. 자카리는 걱정스레 질문을 던졌다.
“설마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말씀도 안 드리고 온 거야?”
“응. 뭐, 괜찮아. 너를 다시 만나는 게 훨씬 더 급했는걸.”
“하지만 무척 걱정하셨을 것 같은 데.”
“그야 좀 걱정하긴 하셨겠지만……”
이엘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솔직히 부모님께 아무 말도 없이 나온 건 좀 양심에 찔리긴 했다.
“뭐, 편지는 부쳤으니까. 나중에 화를 좀 내시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되는 거 맞아?”
“어쩌겠어, 일은 이미 벌어졌는걸.”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이엘리는 제 방에 들어섰다.
방의 전경은 그녀가 살던 때와 전 혀 다르지 않았다. 두 눈을 동그랗 게 뜬 이엘리가 자카리를 돌아보더 니, 만면에 방긋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 방이 그대로네?”
“그게……”
“설마 내가 공작성을 떠난 이후에도 이 방은 전혀 정리하지 않은 거야?”
자카리는 다소 머쓱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뺨을 긁적거리던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너에 관한 것들은 모두 정리 하지 않았어.”
“어째서?”
“그건.”
자카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그녀에 관련한 모 든 것들은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켜켜이 쌓인 추억마저 망가질 것 같아서, 두려워서.
“아마도 나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럴 거라고 생각해.”
이엘리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뼈 있는 농담을 던졌고, 자카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긍정했다.
“이제 내 소중함을 알았겠지?”
“물론이야.”
자카리가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엘리는 이쯤에서 자카리를 구박하는 걸 멈추기로 했다.
“공작성 사람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었는지 모르겠네.”
“글쎄. 근무 환경이 예전에 비해 좀 힘들어졌을 것 같기도 하고……”
“어째서? 월급이나 복리 후생 같은 건 변한 것도 없잖아.”
의아한 얼굴로 이엘리는 자카리를 돌아본다. 자카리는 머쓱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게…… 근무처의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분위기라니?”
“솔직히, 네가 떠난 이후의 공작성의 분위기는 좀……”
자카리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엘리가 떠난 이후 공작은 내내 병석 에 누워 있었고, 자카리는 계속해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아픈 공작 과 예민한 소공작를 모시는 삶이 어땠겠는가.
‘아무래도 사용인들이 좀 고생스러 웠겠군.’
그 당시에는 이엘리를 잃은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마 주변까지 살 피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미안하긴했다.
자카리는 사용인들에게 포상금을 챙겨 주리라 남몰래 마음먹었다.
“장례식은 내일 치르는 거지?”
“맞아.”
자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럽게 자카리의 낯을 살피던 이엘리가 질문을 던졌다.
“너, 괜찮은 거지?”
“응, 괜찮아.”
하지만 괜찮다는 그 말과는 다르게, 자카리의 표정은 여전히 괴로워 보였다.
아버지. 그녀가 느닷없이 돌아옴으로써 잠시 멀어졌던 감정들이 순식 간에 자리를 채운다.
자카리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감정은 단순히 아버지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만이 아니다.
슬픔의 안쪽, 채 드러내지 못한 아픔이 도사리고 있었다.
* * *
장례식 전날, 이엘리는 공작성의 사람들을 다시 만나 보았다. 모두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맞아 주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아가씨를 다시 뵙게 되어서 기뻐 요.”
이엘리는 공작성 사람들에게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내심 감동을 받은 이엘리가 부드럽게 웃었다. 특히 그녀의 곁에 선 메리는 눈물까지 눈에 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메리는 펑펑 울었었는데, 이번에도 메리를 또 울리게 되네. 이엘리는 뭉클한 마음이 되어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잘 돌아오셨어요, 아가씨.”
“고마워, 메리. 이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못 물었네, 잘 지냈지?”
“그게, 잘 지냈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왜?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놀란 이엘리가 메리에게 질문을 했다. 메리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아니예요, 그런 건 아니고.”
“그럼?”
“그냥 새삼스럽다 싶어서요.”
메리가 이엘리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이엘리를 향 해 메리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실은 아 가씨가 계시지 않았을 때 공작성 분위기가 정말 어두웠거든요.”
메리는 미간을 좁혔다. 마치 어른에게 일러바치는 아이처럼 메리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다.
“선대 가주님께서는 계속 앓아누워 계셨고, 가주님께서도 어찌나 기세 가 흉험하셨는지요.”
“아, 그랬구나.”
“하루하루 외다리 나무를 건너는 기분이었다니까요.”
메리가 어깨를 움츠리며 질색을 했다. 이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입을 연다.
“그리고 선대 가주님께서 너무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것도 그렇고요.”
“……그렇구나. 다들 무척 놀랐겠어.”
“그렇죠, 특히 가주님의 상심이 무척 크셨어요.”
이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서로를 미워했다 한들, 어쨌 든 두 사람은 피를 나눈 부자였다. 그 상심이 작을 리 없다.
“게다가 선대 가주님께서 돌아가신 모습을 가장 먼저 발견하신 건 현 가주님이셨거든요.”
“자카리가?”
“네. 그때, 현 가주님께서 선대 가 주님이 돌아가셨음을 저희에게 알려 주셨지요.”
메리는 당시 자카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칼로 얼음을 깎아 만 든 양 서늘했던 그 얼굴.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말은 오직 그 말뿐. 감정을 말끔하게 도려낸 것처럼 자카리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하지만 파리한 낯 위로는 미처 지우지 못한 눈물이 말라붙은 채였다.
“다들 현 가주님께서 선대 가주님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것 같다며 입방아를 찧지만……”
너무 오지랖을 부리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메리가 힐끗 이엘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이엘리는 제 말을 진지하게 귀담아들을 뿐이다. 잠시 머뭇거리 던 메리가 말을 이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메리.”
“왜냐하면 전, 가주님께서 그렇게 슬퍼하시던 얼굴은 처음 보았거든 요.”
메리는 진지한 얼굴로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그 당시 가주님의 얼굴은 역시 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들어 대긴 하지만, 그건 그때의 가주님 얼굴을 보지 못해서예요.”
“자카리가 그렇게 슬퍼했니?”
이엘리는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메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예. 아무래도 선대 가주님께서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렇구나.”
“그래서 다들 가주님을 안쓰러워 했어요. 물론 이후에 가주님께서 굉장히 예민해지시기는 했지만……”
메리의 말을 듣던 이엘리는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아마 당시의 자카리는, 아버지를 잃은 그 순간부터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날카롭게 날을 세웠을 것이다.
‘역시 내가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이엘리가 한숨을 삼켰다. 지금도 무척 힘들겠지.
다만 저 때문에 힘들었던 그녀에게 부담이 될까 속내를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던 그의 모습이 선연했다.
‘실제로 공작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이엘리의 수심이 깊어졌다. 그 어 두운 얼굴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메 리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하지만 이건 아가씨의 탓이 아니니까요.”
“메리.”
“아가씨는 그때 남부에 내려가 계셨는데, 선대 가주님께서 돌아가셨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어떻게든 이엘리를 위로하려는 메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메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가씨에게 이혼을 요구하신 건 가주님이셨으니까요.”
“하지만……”
“솔직히 이번에 아가씨께서 돌아오신 것 자체가, 가주님을 크게 배려 하신 거예요.”
메리의 음성이 단호했다. 워낙 그 목소리가 확고하여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메리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아가씨께서는 절대로 죄책감 따위 가질 필요 없으세요. 아셨죠?”
“그래, 고마워.”
이엘리는 픽 웃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메리도 따라 웃었다.
그녀가 떠난 지 시간이 한참 지났 음에도, 공작성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의 편이 되어 주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이 따스해졌다.
선대 헤센바이츠 공작, 테론이 떠 나는 날은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공작령에서는 드문 겨울비였다. 마치 선대 공작이 떠나는 것을 서글퍼 하는 양, 눈물처럼 빗방울들이 쏟아졌다.
‘……이렇게 공작님을 보내는구나.’
아침 일찍 일어나 장례식에 참석하 기 위해 몸단장을 하던 이엘리는 멍 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의 그녀는 까만 베일이 달린 모자를 써 얼굴을 가리고 검은 드레스를 입었다.
‘이 정도면 공작님을 배웅하기에 적절한 차림일까.’
그녀는 서글픈 기분에 젖어 들었다. 그녀가 공작성을 떠날 때까지 만 해도, 시아버지를 만날 때의 마지막 옷차림이 상복일 거라곤 생각 하지 않았다.
시아버지의 모습이 눈 안에 아른거렸다.
‘공작님.’
서늘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자카리와 꼭 닮았던 공작. 하나 제게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달콤한 레몬차를 그녀가 만들어 왔다는 이유로 기꺼 이 마셔 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스스로의 다정함을 어떻게 표현해 야 할지 잘 모르시는 분이었지만……’
마지막 떠나실 때, 자카리와의 관계는 어땠을까.
설마 돌아가실 때까지도 서로 모난 말만 내뱉으며 상처를 준 것은 아닐 까. 내심 걱정스러워진 그녀는 살며 시 눈을 내리감았다.
‘그래도 보고 싶어.’
가실 때만큼은 편안하게 가셨으면 좋았으련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돌 아가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적어도 얼굴은 보여 주시고 떠나시 지. 복잡한 마음이 뒤섞였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아가씨를 데리러 오셨어요.”
메리가 작게 이엘리에게 일러 주었다. 이엘리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방문 앞에 자카리가 서 있었다. 그의 낯빛은 파리했다. 아마 그도 마음이 어지럽겠지. 그는 애써 웃었다.
“이엔, 데리러 왔어.”
“자카리.”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자카리가 슬쩍 손을 내밀었다. 이엘리가 자카리의 손을 꼭 맞잡았다.
“잠은 좀 잔 거야? 얼굴이 피곤해 보여.”
“괜찮아. 좀 피곤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엘리보다도 자카리 쪽이, 공작을 보내면서 더욱 마음이 힘들 것이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자카리의 눈 밑 아래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낯을 문질렀다.
“그래도 네가 신경 쓸 정도까지는 아니야.”
“그렇게 남 얘기하듯이 말하면서 운해.”
“남 얘기처럼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무어라 말하려던 그는 지그시 입술을 다물었다. 살짝 시선을 내린 자카리가 작게 소곤거렸다.
“그냥 네가 날 걱정할까 봐 그랬 어, 미안.”
“미안할 건 없지만, 가끔은 내가 널 마음껏 걱정할 수 있도록 해 줘.”
설핏 웃은 이엘리는 자카리와 손가락을 얽었다. 희미하게 웃은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말했다.
“장례는 가족장을 택했어.”
“그래?”
“응. 귀빈은 최소 인원만 부르고 간소하게 치르려고 했거든.”
자카리는 비가 쏟아지는 유리창 너머를 흘끗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빗줄기 위로 얼비친 두 사람의 모습은, 자카리가 그녀의 온기에 온전히 기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