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화
“그러니까, 네 마음이 편해지면.”
”……”
“그때 이야기해.”
그 말에 자카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엘리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자신을 배려한다. 그 배려가 너무 따스해서,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기대고 마는 그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런 자카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엘리가 불쑥 말을 뱉었다.
“그것보다 자카리, 넌 정말 바보 같아.”
저 홀로 고통을 견디기만 했던 자카리. 지금만큼은 정말 밉다.
“……미안해.”
“웬만하면 내게 사과할 필요 없다 고 말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안 되겠다.”
안쓰러움과 분노가 엉켜 가슴을 헤 집었다. 이엘리는 사나운 눈빛으로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무슨 짓을 하건, 내가 널 용 서하지 못할 일은 없어.”
지금 가장 상처 입은 사람은 분명 자카리일 것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자카리를 보듬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 그런데도, 알고 있는데 도…… 목소리가 날카롭게 나왔다.
“하지만 그런데도, 너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화가 나.”
“이엔.”
“날 억지로 떠나보냈으면 너 혼자 서 행복하게 살기라도 했어야지.”
이엘리의 목소리가 점차 격해졌다. 적어도, 날 위해서라도…… 이런 모습으로 살진 말았어야지.
“한미한 자작 가문의 여식 따위, 차라리 말끔하게 잊어버리고 떵떵거리면서 지내지 그랬어.”
그 말에 자카리는 침묵했다. 그를 눈에 담은 연녹색 시선이 잘게 떨렸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홀로 이렇게 아파할 거였으면서 왜 억지로 날 보냈어? 어째서 나와 이혼한다고 했어?”
“그건…… 널 보내는 게 옳은 일이니까."
가만히 시선을 들어 올린 자카리가 이엘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빙하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솔직히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
“뭐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난, 널 보내는 게 맞는 일이라고 여겨.”
자카리의 표정은 고요했다. 그녀와 함께 보냈던 시간 속, 다채롭던 표정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그런데 이렇게 한심하게, 또…… 네게 매달리고 말아.”
자카리는 쓰게 미소 지었다. 이엘리는 울컥, 이름 모를 감정이 치솟는 걸 느꼈다. 유리창 너머 희게 쏟아지는 달빛. 조각상처럼 침묵하고 있는 나의 기사. 넌 왜 아직도 이렇 게나 바보 같니.
“너에게는 사죄할 것만 잔뜩 쌓였어.”
“실망이네, 네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엘리는 냉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카리는 물끄러미 그녀의 시선을 맞받았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 형수처럼 이엘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새파랬다. 말을 잇는 그녀의 목소리 가 점차 떨려 왔다.
“나, 너와 이혼한 이래로 널 참 많이 원망했어.”
“알아. 나라도 그랬을 거야.”
힘이라고는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그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던 이엘리는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연녹색 눈동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자카리는 그 시선을 괴로운 눈으로 마주 보았다.
찰싹!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이엘리가 있는 힘껏 자카리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
자카리는 고개가 꺾인 채 그대로 침묵했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이엘리의 손까지 아파 왔다.
“……정말 미안해, 이엔.”
“당연히 미안해해야지. 내가 얼마 나 힘들었는데?”
말을 쏘아붙인 이엘리가 쌔근째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자카리는 침묵했다. 저를 미워해도 된다고 한 건 자신이었는데, 그녀가 정말로 절 미워한다 생각하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
“그렇게 네 멋대로, 내 의견은 듣지도 않고 나와 이혼한다고 하고!”
내내 고요했던 이엘리의 목소리에 점차 날이 섰다. 치미는 감정에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날 위해서 그런 거라고? 날 위해 서였다면 먼저 나와 대화부터 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 분노에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분노는 정당했으니까.
“내가 싫다고 했잖아!"
“이엔.”
“널 떠나기 싫다고, 그러니 내 곁 에 있어 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엘리가 이런 식으로 홍분하며 화를 내는 건 그조차 처음 봤다. 자카리는 덜컥 두려워졌다.
“너 혼자서 판단하고, 너 혼자서 행동하니까 속 시원했니? 이대로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
얼마나 화가 났으면 내게 이러나. 다시 내 얼굴을 보지 않는다고 말하면 어떡하나. 그녀가 저를 영영 증오하는 것. 그녀에게는 괜찮다 말했 지만…… 실은 괜찮지 않았다. 미움 받기 싫었다.
“게다가 난 선대 공작 부인도 아닌 데, 왜 자꾸 내가 그분처럼 될 거라는 걱정을 하는데?”
이엘리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녀는 자카리를 빤히 노려보았고, 자카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안해.”
”……”
“정말 미안해, 이엔. 난……”
무어라 말하려던 자카리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마치 눈물을 삼키는 것처럼 이엘리의 호흡이 가쁘다. 이엘리는 다시 울고 있었다.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눈물이 뜨거웠다.
‘내가 널 또 울리고 말았어.’
스스로가 미워 견딜 수 없다. 손가락에 닿는 촉촉한 눈물의 감촉을 느끼며 그는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흰 뺨 위로 넘쳐흐르는 투명한 눈 물이 온통 얼굴을 적신다. 이엘리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네가 내게 돌아왔다는 게 기뻐.”
“이, 이엔.”
“게다가……”
이엘리는 코를 울렸다. 손을 들어 아무렇게나 눈가를 닦아 낸다. 그 이후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기다리겠다고 먼저 약속한 건 나였으니까.”
”……”
손을 뻗은 그녀가 자카리의 양 뺨을 그러쥐었다. 시선을 맞춘 그녀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공작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이엔.”
“그럼 너 혼자 공작님의 장례식을 치러야 하잖아. 역시 그건……”
이엘리는 말끝을 흐렸다. 공작이 죽었다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을 자카리는 홀로 견 뎌야 했을 터다. 비록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해도, 두 사람은 단 하나 뿐인 부자였다.
‘분명 아버지를 잃은 고통이 작지 않았을 텐데.’
뺨 위를 미끄러지는 작고 보드라운 손가락. 자카리는 입술을 당겨 물며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많이 힘들었지?”
“나는……”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아니야. 나 때문에 아파했던 네게 내 고통까지 얹어 줄 생각은 없는데.
‘그런데.’
이엘리의 온기가 닿는 순간 단단하게 세워 뒀던 마음의 벽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이엘리는 이해한다는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카리의 속눈썹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네가 나에게 이렇게 해 주면.’
새싹 같은 연녹색 눈동자는 여전히 다정하기만 하다. 자카리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 눈동자.
‘……난 이번에도 또 네게 기대려들 텐데.’
그때 이엘리는 자카리를 꼭 끌어안았다. 느닷없는 포옹에 자카리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자카리, 괜찮아. 나에게는 기대도 돼.”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 라도 한 양, 이엘리는 그렇게 말했다.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이엔.”
“난 절대로 널 떠나지 않을 테니까.”
이엘리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끝부터 다시 한 번 천천히 젖어 들었다.
“그리고 공작님께서도…… 우리가 함께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을 거라고 생각해.”
자카리는 침묵했다. 그의 아버지, 테론 헤센바이츠. 돌아가신 아버지와 했던 마지막 대화는 이엘리에 관 련한 것이었다. 그녀를 데리고 오겠다는 자카리의 말에, 아버지는 작게 웃어 주었다.
“난 너와 함께 공작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싶어.”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엘리는 서글픈 낯으로 눈웃음을 쳤다.
“그렇게 해 줄 거지?”
“……그래.”
자카리는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엘리는 그런 자카리의 품에 고개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울지 않네.”
“아무리 울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배웠으니까.”
자카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제 예전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녀와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그는 고통을 홀로 삭히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그리고 이엘리는 그런 그가 안타까웠다.
“울고 싶으면 우는 것도 괜찮아.”
“아니야, 이제 난.”
자카리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이엘리의 귓가를 간지럽힌다.
“다시 한 번 지켜야 할 사람을 되찾았으니까.”
그건 차라리 맹세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에게 남은 단 한 사람, 이엘리. 이미 자신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던 그녀만큼은 온전히 지켜 낼 것 이라는 맹세. 오로지 기댈 곳은 그녀밖에 없기에.
“그러고 보니, 자카리.”
그때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가 부러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자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일 년, 지났어.”
”……”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자카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엘리는 생글생글 웃었다.
“소원 팔찌를 끊어야 할 시간이야.”
“아, 소원 팔찌.”
자카리는 문득 제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이엘리가 직접 만들어 줬던 실팔찌. 그녀가 떠난 이후로 몇 번 이고 풀어내려 했지만, 도저히 풀
수 없어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녀가 속삭였다.
“그래도 기쁘네.”
“뭐가?”
그녀는 자카리의 손목에 걸린 실팔찌를 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지며 다정한 어조로 답한다.
“우리가 이별 했었는데도, 네가 이 팔찌를 풀지 않아 주었다는 것.”
순간 자카리는 말문이 턱 막혔다. 잠시 머뭇거리던 자카리가 어색한 낯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걸 풀 수 있을 리 없잖아.”
“응?”
“네가 남긴 것인데, 어떻게 감히 풀어 버릴 수 있겠어.”
이엘리가 떠난 이후로, 그는 그녀가 남긴 아주 조그만 것들에 기대 살아갔다. 이 팔찌도 그랬다. 그녀가 직접 만들어 손목에 감아 준 물건이었다. 아마 평생 풀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 거야?”
“응, 그런 거야.”
“그렇구나.”
이엘리는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웃었다. 자카리는 고개를 숙여 이엘리와 톡 이마를 맞댔다.
“그 말 기억해?”
“무엇을?”
“팔찌를 나눠 찬 사람과 함께 팔찌를 끊으면……”
속눈썹을 들어 올린 그녀가 속살거렸다. 그녀는 자카리의 목에 팔을 감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었잖아.”
“알아. 네가 내게 이 팔찌를 선물 해줄 때, 그런 말을 해 줬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이 팔찌, 끊어 버리자."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한 행복을 약속한다고 하는 소 원 팔찌. 작은 반짐고리를 뒤적거리 던 그녀가 자수를 할 때 쓰는 쪽가 위를 가져왔다.
“손목, 이리 줘 봐.”
자카리는 말없이 손목을 내밀었다. 긴장한 그녀가 쪽가위를 손목과 팔 찌 사이로 밀어 넣었다.
“아파?”
“아니, 전혀.”
자카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소원 팔찌가 뭐라고, 팔찌 하나를 끊는 게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이엘리는 숨을 들이쉰 채 팔찌를 잘랐다. 톡, 소리와 함께 팔찌가 끊어졌다.
“아.”
조그만 사파이어 구슬들과 실이 후드득 떨어졌다. 팔찌의 잔해를 주운 자카리가 허리를 폈다.
“쪽가위 이리 줘.”
“여기.”
이엘리는 냉큼 쪽가위를 건넸다. 자카리의 커다란 손이 이엘리의 가느다란 손목을 감쌌다.
거의 뼈밖에 남지 않은 손목을 보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추궁하듯 말했다.
“너 왜 이렇게 말랐어?”
“누가 마음고생을 실컷 시켜서 그렇다, 왜?”
”……”
이엘리의 새초롬한 답에 자카리는 말문이 막혔다. 그에게 손목을 맡긴 채 그녀가 생글거렸다.
“왜, 양심에 찔리니?”
“……역시 나 때문이구나.”
“당연하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한테 잘해.”
이엘리는 얼른 팔찌를 끊으라는 것처럼 손목을 흔들어 보였다.
가녀린 손목이 금방이라도 부러져 버릴 것 같아, 자카리는 황급히 이엘리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신중한 동작으로 팔찌에 쪽가위를 갖다 댄다. 톡. 팔찌가 끊어졌다. 쏟아져 내리는 보석 구슬을 보던 이엘리가 말했다.
“이제 같이 팔찌를 끊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