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96)

82 화

“넌 항상 그러더라. 언제나 날 위 한다는 명목으로 네 멋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

“그리고 자카리, 네 그런 행동은 전혀 기쁘지 않아.”

작게 중얼거리는 이엘리의 목소리 끝에 희미한 분노가 서렸다. 이엘리도 사람이었다.

멋대로 그녀를 밀어내려한 그의 행동이 화가 나지 않을 리 없다. 크게 심호흡을 한 그녀가 말했다.

“저번에는 깜빡 속아서 널 떠났지 만…… 이번의 난 네게 속지 않을 거고.”

닫혀 있는 방문에서는 여전히 대답 이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은 전해졌을 거라 믿었다.

“자카리. 정말로 이 문 열어 주지 않을 거야?”

그 질문이 시발점이었다. 자카리는 더 이상 스스로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쪼 그려 앉은 그대로 이엘리는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그를 불렀다.

“자카리.”

자리에서 일어난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다가섰다. 불에 덴 것처럼 자카리는 화들짝 물러났다.

“오지 마.”

“싫어.”

그러나 이엘리는 오히려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섰다. 거리가 가까워 진다. 연녹색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 물이 고인 모습이 보였다.

자카리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제발, 이엘리. 울지 마.’

자카리는 필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울면 난 미칠 것 같아져. 비틀비틀 걸어 자카리의 코앞에 선 그녀가 그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그녀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정말 나빴어.”

이엘리의 뺨 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카리를 빤히 보던 이엘리가 내뱉듯이 말했다.

“이왕 거짓말을 할 거라면 날 완벽 하게 속여줬어야지.”

감정이 북받친다. 그 앞에서는 끝 까지 감정을 다스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그렇게 냉정하게 날 떠났으면, 그래서 날 끝까지 속이고 싶었으면.”

그렇게 말한 이엘리가 턱을 들어 올렸다. 자카리의 파리한 낯. 아까 전 냉정함은 흔적도 없다.

“어떻게든 네가 날 미워한다고 착 각하게 만들었어야지.”

“이, 엔.”

“네 낯빛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 하면서, 말만 그렇게 하면 다야?”

그녀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상한 마음이 봇물처럼 터진다.

“봐 봐. 지금도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하지만, 이엔. 난.”

목을 조르는 것 같던 감정이 풀려 났다. 막혀 있던 호흡이 터졌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너를, 그러니까 난……”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카리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이엘리는 그의

가장 내밀한 진심을 아무렇지도 않게 꿰뚫어 본다. 이엘리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난 네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더라도 네 진심을 알아볼 수 있어.”

”……”

“그런데도 날 속일 생각이야, 자카리?”

이엘리는 차분한 얼굴로 자카리를 올려다본다. 그 순간 자카리가 이엘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엔.”

품 안에 폭 안기는 이엘리의 무게 가 지나치게 가벼워서 마음이 아팠 다. 그가 낮게 속삭였다.

“네가 내게 돌아온다고 한 거야.”

“응.

“난 몇 번이나 네게 날 떠날 기회를 줬어.”

흰 이마에 헝클어진 은빛 머리카락 이 달빛을 머금어 창백하게 빛났다.

새파란 눈동자가 이엘리를 내려다 본다. 나의 구원. 나의 기적. 애써 외면하고 밀어내면서도 차마 멀어질

수 없었던.

“나, 이젠 널 못 보내.”

“그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는 숨을 삼켰다. 이 온기가 너무 그리웠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엔……”

자카리의 목소리 끝이 흐트러졌다. 그럼에도 건조한 목소리에는 물기라고는 없었다.

마치 우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 안쓰러웠다. 이엘리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이렇게 미안해할 거라면 처음부터 그러지 말지 그랬어.”

이엘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자카리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사죄하고 싶었다.

“이엔, 내가 널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알아.”

”……”

“그러니까 네가 날 용서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녀의 손을 붙든 자카리가 손바닥 안에 뺨을 기댔다. 이엘리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이기적이었어. 널 무척 괴롭게 했지. 그러니까 날 평생 원망해도 괜찮아.”

자카리는 빠른 말씨로 말을 이었다. 죄를 고해하는 죄인처럼 간절한 시선이 보였다. 그가 말을 맺었다.

“대신 네가 먼저 내게 돌아왔으니까.”

”……”

“제발 날 떠나지만 말아 줘.”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툭 기댔다. 여신을 경애하듯 정중한 동작이었다.

“너에게 이런 말 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는 건 알아, 널 먼저 떠나 보내려한건 나였으니까.”

“자카리."

“온 힘을 다해서, 널 잊어 보려고 노력했는데도……”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자카리는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이엘리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널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뿐 이었어.”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일상적인 시간을 지날 때마다. 오직 떠오르는 사람은 이엘리 한 명뿐이었다.

상처 입은 짐승이 제 상처를 핥는다. 상처가 덧날 것을 알면서도 그러고 만다.

“……자카리.”

이엘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그녀는 자카리의 가장 내밀한 진심을 마주하고 있었다.

“우리의 관계를 정리하는 게, 널 보내 주는 게…… 네가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 생각했는데.”

이엘리는 침묵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자카리의 눈가가 점차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직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 하지 않는데도……”

자카리의 눈동자에 고통이 차올랐다. 그런 그를 보면서 이엘리는 알았다. 그녀 못지않게 자카리도 힘겨웠을 것이다. 자카리는 낮게 흐느끼 듯이, 토막토막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내 앞에 나타난 그때부터.”

”……”

“내 얼굴을 보니까. 네 목소리를 들으니까. 너를 만지고.... 끌어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카리는 그녀의 어깨에 깊숙이 고개를 파묻었다. 이런 마음을 고백하는 것 자체가 미안했다.

“이제 너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

신음 같은 목소리다. 차마 이엘리의 눈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 다. 죄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난 제대로 감정도 조절하지 못하 고, 널 앞에 두고 폭주까지 했던 전 적이 있는데도.”

 ”……”

“네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무지 널 포기할 수 가 없어.”

자카리는 지난 시간을 다시 떠올렸다. 두 사람이 이혼한 후로 그는 계 속 그녀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명 목은 이엘리의 보호였지만, 실은 그녀의 소식조차 알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아서 였다.

“이엔, 난 있잖아.”

이엘리는 말없이 자카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자카리는 오래 묵혀둔 고뇌를 꺼냈다.

“네가 내 어머니처럼 될까 봐 겁이 났어.”

이엘리를 곁에 두면 저 때문에 그녀가 다칠 것 같았다. 어머니처럼 영영 잃게 될까 두려웠다.

“네 말대로…… 어머니와 넌 다른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악몽 속에서 언제나 모습을 드러내는 어머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그를 매도하는 어머니. 만약 그 악몽에 그녀까지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그게 두려워 이별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두려운 건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래서 널 억지로 보냈는데도……”

자카리는 더 말을 이으려다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가는 걸 막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를 놓지 못해 번민하던 시간. 자카리는 솔직한 마음을 토해 냈다.

“네가 내 곁에 없으니까 죽을 것 같았어.”

”……”

“참고 또 참았는데. 내가 널 보냈 으니, 너의 부재는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자카리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견딜 수 없어도 견뎌야 한다 여겼다. 하나 그조차 오만이었다.

“내게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줄 몰랐어.”

“……자카리.”

“널 잃어도, 아버지를 잃어도…… 적어도 살아갈 수는 있을 줄 알았는 데.”

이엘리는 망연히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무릎을 꿇은 자카리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모두 내 착각이었어.”

온 세상에게서 버림받아 홀로 남은 어린아이.

눈과 얼음으로 짜 올린 차가운 세 상에 살던 소년. 그녀 나이 열셋, 자카리를 처음 만났던 그때의 고독 함이 다시 자카리를 집어삼킨 채였다.

“다시 네게 돌아와 달라고 빌까. 하지만 내게 감히 너에게 애원할 그런 자격이 있을까.”

자카리는 쓰게 미소 지었다. 제 마음을 토로하는 것 자체가 해선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안다.

“너를 보냈던 그 시간 동안 이따위 생각만을 했어. 우습지?”

그를 빤히 바라보던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우습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우스운 게 뭔지 알아?”

지금껏 충분히 힘겨운 시간을 홀로 견뎠을 이엘리였다. 게다가 그녀를 긴 외로움 속에 빠뜨린 건 다름 아닌 그였다. 그런데도 사람은 어찌나 이기적인지, 자꾸만 이엘리에게 애 원하게 된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을 때.”

자카리의 눈동자가 과거를 되짚었다. 이엘리는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 공작의 죽음을 자카리가 먼저 언급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카리의 목소리는 이제 잔뜩 쉬어 갈라져 있었다.

“난 그때조차 아버지께…… 널 포기하겠다는 대답을 하지 못했어.”

”……”

“너와의 이별을 멋대로 통보한 주제에. 널 상처 입힌 주제에, 난, 나는……”

자카리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기 시 작했다. 이엘리는 입 안의 보드라운 살을 깨물었다.

자카리를 잃고 홀로 지새웠던 기나 긴 시간이 떠올랐다. 무심결에 창밖을 내다보며 그를 기다리던 그 시 간. 언젠가 네가 내게 돌아와 주지 않을까, 내게 미소 지어 주지 않을 까. 기대하던 순간들.

물끄러미 자카리를 바라보던 이엘리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

”……”

“공작님께서 왜 죽음을 선택하셨는지 그 이유가 알고 싶어.”

그 말에 자카리는 어깨를 굳혔다. 이엘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님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놓으셨다고 들었어.”

“이엔.”

“공작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놓으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 만약 돌아 가신 거라면, 내내 몸이 편찮으셨기에 병이 깊어지셔서 그랬던 거라고 여겼어. 그런데 어째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신 거야?”

내내 공작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이유가 마음에 걸렸었다. 자카리의 얼굴이 대번 어두워진다. 이엘리가 한숨을 삼켰다.

“게다가 내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당장 병세가 악화될 것 같진 않았거든. 그래서 이런 소식을 들을 거라 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이엘리는 말끝을 흐렸다. 문득 황녀가 보내온 편지가 떠오른 탓이다. 그 편지에는 공작이 자살했다고 적 혀 있었다. 하지만 공작이 자살할 이유가 없지 않나, 역시 병사를 착 각한 것이 아닌가.

“그 이유는……”

한편, 반사적으로 이유를 말하려던 자카리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공작의 죽음. 이엘리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에게 비밀을 만들 생각은 없지만, 아직 자카리의 마음 도 복잡했다.

“이유가…… 있어.”

“이유?”

”응.”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의 눈빛은 복 잡했다.

‘내가 내 힘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괴물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자카리의 입 안에 쓴맛이 가득 괴었다. 은룡의 힘을 물려받은 서리 악마. 그런 괴물을 위해 아버지께서 어떤 일까지 감내 하셨는지, 자카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는……”

자카리가 멍하니 입술을 열었다. 마음속은 엉켜 버린 실타래처럼 온통 엉망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진실을 말해야 할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이엘리가 입을 열었다.

“힘들면.”

자카리가 괴로운 눈으로 이엘리를 마주 보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나중에 말해 줘도 돼.”

“…이엔 ”

“난 여기에 있고, 언제든 네 이야 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

그렇게 말한 이엘리가 자카리의 손을 맞잡았다. 손에서 손으로 옮겨 오는 온기가 숨 막히게 따스하여,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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