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화
‘제발 그런 표정 하지 마, 이엔.’
덜덜 떨리는 손끝을 감추기 위해, 자카리는 손을 들어 제 반대편 손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내가 어째서 너에게 동정을 받아 야 하지?”
한껏 빈정거리던 자카리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그녀에게 쏟아 내는 날카로운 말들은 모 두 자카리 자신을 공격하는 칼날이었다. 마음이 얇게 저며지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문제는 완벽하게 처리되었 어. 네가 걱정할 일도, 동정할 일도 없으니까.”
아니야. 네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불완전하기만 해. 난 그저 너만 있으면 되는데. 난…….
“난 네 동정 따위 필요 없어.”
차라리 감정 따위 모조리 거세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런 고통은 느끼지 않아도 될 텐데.
“이엔, 난.”
”……”
“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어.”
제멋대로 난도질당한 마음에서 피처럼 감정이 흘러내린다. 자카리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돌아가.”
“제발 내 말 좀 들어 줘, 난 널 동 정해서 돌아온 게 아니야……!”
“아니, 네가 아무리 말해 봤자 소용없어.”
그는 돌아섰다.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다.
그녀의 말을 조금만 더 듣다 보면, 정말로 그녀를 붙들며 남아 달라고 애원할 것 같았다. 그는 피가 나도 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는 안 되니까.’
한편 이엘리는 마음이 급했다. 이대로 자카리를 보내게 되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자카리, 네가 뭔가 오해한 것 같아. 나는……!”
보다 못한 이엘리는 다급하게 자카리의 손목을 붙들었다. 자카리는 그녀의 손을 확 뿌리쳤다.
“이거 놔!”
“앗!”
이엘리가 짧게 비틀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그가 이엘리를 외쳐 부른다.
“이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이엘리를 부축한 자카리는 순간 멈칫했다.
새파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엘리는 제 팔을 붙든 자카리를 아 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작게 달싹거렸다.
“자카, 리?”
”……”
물기가 어린 연녹색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카리는 억 지로 자신을 설득했다.
‘더 이상 흔들려서는 안 돼. 난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으니까……’
내팽개치듯 팔을 놓은 그가 그곳을 벗어났다. 마치 어린아이가 도망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 * *
자카리는 당장 집사부터 소환했다. 집사가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자카리는 차갑게 질문했다.
“이엘리에 관련한 문제를 차후 문책하겠다고 했었지.”
“그러셨습니다, 각하.”
“어째서 내 허락조차 없이 공작성에 이엘리를 들여보낸 건가?”
“죄송합니다.”
집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죄송하다는 말과는 달리 표정은 그저 담담했다.
“하지만 그분은 선대 가주님께서 귀애하셨던 분이십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기에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아마 아버지께 서는 이엘리가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일하게 아낀 사람이었으니.
“비록 지금은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일원이 아니시지만, 그래도……”
주름진 눈매 안, 색소가 열은 시선이 자카리를 마주 본다. 집사는 침 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선대 가주님의 장례에 참석하 시어 마지막 인사를 할 권리가 있으시다 생각했습니다.”
“그걸 왜 집사의 마음대로 판단하 나!”
“지금 제가 내린 판단이, 현 가주 님의 판단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자카리는 덜컥 굳어 버렸다. 집사는 여전히 차분한 낯이다. 오히려 집사가 되물었다.
“그렇다면 가주님께서는 정말로 그 분을 공작성안에 들이지 않으실 작 정이셨습니까?”
”……”
말문이 막혔다. 온몸이 떨린다. 심호흡을 하던 자카리는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
다시 꾸벅 허리를 굽힌 집사가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자카리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자카리는 스르륵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양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는다.
“내가, 널, 어떻게 보냈는데.”
지독하게 낮고, 갈기갈기 찢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목소리가 낯 설어 그는 픽 웃어 버렸다.
“어떻게 넌 그렇게 간단하게 내게 돌아와서……”
아까의 만남을 다시 상기한다. 눈 앞에서 있는 이엘리를 보는 순간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다.
찰나의 선잠 속에서만 스치듯 지켜 볼 수 있었던 그녀. 그녀를 떠올리는 것조차 죄스러웠는데.
“……이엔.”
솔직히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게 기뻤다. 저열한 기쁨에 자카리는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자카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그는 알았다. 아버지를 잃어 서글 픈 와중에도, 이엘리를 잠깐이나마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약간은 기 대했다는 것. 그게 서러웠다.
“구제 불능, 쓰레기 자식.”
자카리는 스스로에게 낮게 욕설을 퍼부었다. 고개를 툭 떨어뜨린 그가 눈물을 꾹꾹 참아 냈다.
“아가씨!”
응접실에 멍하니 서 있던 이엘리는 문득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눈에 눈물을 가 득 담은 메리가 서 있었다.
“메리?”
“세상에, 아가씨!”
메리가 종종걸음으로 이엘리에게 달려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설마……”
“……이번 일은, 역시 내가 방문 했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이엘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공작이 죽었다. 어쨌든 헤센바이츠의 이름을 가지고 긴 시간을 이 성에서 살 아왔다.
자카리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이엘리는 공작과의 마지막 인사는 할 작정이었다.
‘물론 자카리도 어떻게든 설득할 생각이지만.’
이엘리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카리가 그녀를 계속 밀어내고 있지 만 그건 아마 진심이 아닐 것이다.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를 밀어냄으로써 오히려 더 괴로운 쪽은 아마 자카리 아닐까.
“요새 자카리는 어떻게 지냈어?”
“하루 종일 일에 파묻혀 계시죠, 뭐.”
이엘리의 물음에, 메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식사조차 거르시는 경우가 많으셔서, 집사님께서 걱정이 크세요.”
“식사를 거른다고?”
“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예민해지신 것 같아요.”
”……”
이엘리는 침묵했다. 아무래도 자카리를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술을 당겨 물던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 메리. 그럼 나 가 볼게.”
“네? 가 보시다니, 어딜……”
“자카리 만나러.”
“네에?”
방금 전에도 만나시지 않았나? 하지만 그런 의문을 표할 새조차 없이, 이엘리는 이미 응접실을 빠져나간 상태였다.
뒤에 남겨진 메리는 잠시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아가씨가 오셨으니, 잘 해결되면 좋을 텐데.”
지금 상황에서 그나마 지금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은 이엘리뿐이었다.
자카리는 이미 극도로 식사량과 수면량을 줄인 상태였기에, 공작성 사람들도 자카리의 몸이 상할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메리 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이엘리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식사까지 거를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니.’
안 되겠다, 다시 한 번 부딪쳐야겠어. 저대로 자카리를 내버려 둘 순 없잖아.
이엘리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비록 자카리가 그녀를 거부하긴 했 지만, 겨우 이 정도로 물러날 생각 이었으면 애초에 공작성에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그녀는 집사를 마주쳤다.
”아, 집사님?”
이제 이엘리는 공작가의 일원이 아니기에 집사에게 공대를 사용해야했다. 집사도 멈칫했다.
“레이디.”
집무실 쪽에서 걸어오던 집사는 정 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머뭇거리던 이엘리가 물었다.
“저, 죄송하지만 자카리는 어디에 있나요?”
“가주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아, 집무실에……”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자카리가 드디어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자카리가 사용하고 있는 집무실은 대대로 헤센바이츠 공작들이 사용하는 장소였으니까.
“레이디.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면구합니다만……”
“네?”
“……가주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던 집사가 이엘리에게 말했다. 잠깐 멈칫하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어떻게든 자카리를 설득할 생각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집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선대 공작마저 세상을 떠난 이상, 자카리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오로지 이엘리뿐이었다.
멀어지는 이엘리의 뒷모습을 집사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집사의 부탁을 받은 이엘리는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자카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쨌든 얼굴을 보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해.’
그녀를 밀어내던 자카리. 일부러 냉정한 말을 골라 내뱉던 자카리. 하지만 그런 모습들이 진심일 거라 고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도망치 던 모습이 진심에 가까웠다.
‘어떻게든 자카리의 얼굴을 다시 봐야 해.’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며 집무실로 향했다. 저 멀리 커다란 마호가니 문이 보인다.
그 문을 바라보며 이엘리는 묘한 감회에 젖었다. 그러고 보면 한때 저 문을 열면, 선대 공작이 있었는 데.
‘그러고 보면…… 공작님께서는 정말로 돌아가신 거구나.’
테론 헤센바이츠.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증오했던 아버지와 아들.
‘공작님, 제가 자카리를 설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엘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커다 랗게 심호흡을 한 이엘리가 결연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대답 조차 없는 조용한 방문 앞에 서서, 이엘리는 자카리를 불렀다.
“자카리.”
”……”
“너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지금은 자카리와의 대화가 최우선이다. 이엘리는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 안쪽에 주저앉아 있던 자카리는 입술을 깨물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엘리가 집무실까지 찾아올 줄은 몰 탔다.
“우리 할 얘기가 많잖아.”
”……”
“그러니까 문 좀 열어 줘. 응?”
간절한 그녀의 말에 자카리는 작게 온몸을 옹송그렸다. 마치 그러면 자 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라고 믿는 것처럼 그는 숨을 삼켰다. 이엘리의 말을 더 들어서는 안 된다.
‘안 돼. 제발 참아, 자카리.’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눈을 꽉 내리감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싶었다.
‘흔들리지 마.’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득 끌어안고 싶었다. 네가 너무 소중하다, 진심을 다해 고백하고 싶었다.
‘그녀를 붙들어 두는 건 네 이기심임을 잘 알잖아.’
자카리는 막막한 기분을 느꼈다. 햇살 가득 머금어 살랑대는 아샤꽃가지 같은 아가씨.
몇 번이고 그녀를 찾아가려했다. 눈물로 그녀의 발등을 적시고 제발 돌아와 달라 애원하려했다.
‘그럼에도 널 찾아가지 않았던 건……’
내 옆에 네가 머무른다면 네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자카리는 멍하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무리 사랑하면 뭐하나.
자신 때문에 그녀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면 모두 끝이었다.
“있잖아, 자카리.”
그때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엘리는 문 앞에 주저앉아 방문에 살며시 고개를 기댔다.
“내가 정말로 모를 줄 알아?”
”……”
자카리는 침묵했다. 방문을 사이에 둔 채 나란히 등을 맞대고 앉아, 이엘리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 흔들릴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귀를 막을 수 없었다.
“너랑 함께 보냈던 시간이 얼만 데.”
”……”
“넌 거짓말을 할 때면 오히려 표정이 전혀 없어져.”
이엘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자카리는 언제나 그랬다.
남을 속이려 할 때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라 오히려 가면처럼 무표정을 덮어 버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인다. 그 눈동자의 서글픔이.
“게다가 아까 그렇게 도망친 주제에, 아직도 내가 싫다고 우기려고 하는 거야?”
”……”
“아까 전의 넌 나를 똑바로 바라보 지도 못하고 있었어.”
단호한 목소리에 자카리는 호흡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이엘리는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