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96)

80 화

‘아, 부모님께 말씀을 안 드렸네.’

워낙 정신이 없었다. 이엘리는 잘근 입술을 깨물다가, 차가운 유리창에 살짝 머리를 기대었다.

‘공작령에 도착하면 편지를 부치 자. 지금은 자카리가 더 급하니까.’

자카리. 눈을 감으면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고독했던 청년. 얼음과 눈으로 짜인 세상에서 살아와, 애정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서툴렀던 청 년. 그녀가 사랑할 수밖에 없던 사람.

'자카리, 조금만 기다려.’

저번에는 순순히 물러났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울고 화내고 다투는 편이 자카리를 홀로 두

는 것보다 훨씬 낫다. 난 널 놓지 않을 거야. 이엘리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마차를 타고 북부로 내려가니 과거 생각이 났다. 그녀 나이 열세 살, 자카리와 혼인하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고 공작령으로 내려가던 때. 번 화한 도시를 보면서 놀라움에 젖었던 어린 시절.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애 모습이 떠오르네.’

이엘리는 쓰게 웃었다. 잔뜩 경계 하면서도 다가오는 애정을 차마 거부하지 못하던 어린 소년.

‘우리…… 그때보다도 훨씬 더 멀어진 건 아닐까.’

처음 만났던 때가 차라리 낫지 않나 이엘리는 자괴감에 빠지려는 스스로를 속으로 질책했다.

‘아냐, 우울한 생각 하지 말자,’

그녀는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손을 들어 뺨을 짝 소리 나게 친 그녀가 눈에 날을 세웠다.

'난 자카리를 되찾으려 다시 돌아 온 거니까.’

저 멀리 공작성이 보였다. 색유리처럼 빛나는 하늘 아래로, 공작성은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선대 가주를 잃은 헤센바이츠 공작성은 죽음 같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새로이 가주가 된 자카리는 상처를 입은 맹수처럼 바짝 날을 세웠 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어진 과제를 처리해 나갔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만 견뎌야 하는 게 아니다. 가문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아버지의 장례식 준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귀빈들께서는 모두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예. 문제 될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신경 쓰고 있습니다.”

집사는 차분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자카리는 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눈을 문질렀다.

“그래. 그렇다면 장례식은 모레쯤 치르도록 하지.”

자카리는 냉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었다. 집사는 그런 자카리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번에 새로 작위를 이은 자카리는, 마치 스스로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를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렇게 무리하실 필요 없으신데.’

자카리는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한 공작을 떠올리며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의무라도 건네 받기라도 한 것처럼 공작의 사후 일 처리에 대해 미친 듯이 매달리고 있다.

‘선대 공작 각하의 죽음에 대해, 애도조차 표하지 않는다고 주변에서는 말이 많지만……’

집사는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곁에서 오래 모셔 왔기에 알 수 있었다. 자카리가 왜 저러는지.

‘공작께서는 충분히, 선대 공작 각하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계시 다.’

다만 자카리는 제가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아버지가 남긴 모든 일들을 필사 적으로 해결하려 할 리 없다.

헤센바이츠의 완벽하고도 유일한 공작으로 인정받는 것. 그는 그것만 이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자 과제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하아.”

자카리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피로한 시선으로 집사를 바라보던 그가 손을 대충 내저었다.

”그만 물러가도록.”

“하나만 보고를 드리고 물러가겠습니다."

“뭐지?”

자카리는 흘끗 시선을 들어 올렸다. 우아한 눈매 아래로 옅은 그늘 이 져 있다. 집사가 말했다.

“각하를 찾아오신 분이 계십니다.”

“도대체 누가? 대부분의 귀빈들은 모두 참석하지 않았나.”

자카리는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귀빈들 중, 황녀를 떠올리던 자카리의 입매가 비틀렸다.

‘무려 황녀를 직접 조문을 핑계로 내려보내다니, 황제가 꽤나 몸이 달았나 보군.’

자카리가 이엘리와 이혼한 이후, 황제는 어떻게든 헤센바이츠에 황녀를 보내려 들었다.

하지만 선대 공작, 테론 헤센바이츠의 죽음마저 이런 식으로 이용하려는 건 역시 무척 치졸했다.

‘…..아버지.’

그는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제 죽음마저도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을 선택했던 아버지. 아버지를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가끔씩 울컥거리며 무언 가가 치밀었다.

“레이디 블랑쳇입니다.”

“뭐라고?”

순간 자카리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집사는 젊은 공작을 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레이디 블랑쳇께서 공작 각하를 찾아오셨습니다.”

귀빈들을 맞이할 채조차 무표정한 얼굴이었던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그가 물었다.

“어디, 그녀가 어디에...?”

“응접실에 계시도록 해 두었습니다.”

”……”

이엘리. 애써 지워 내려 했던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눈앞에 떠올랐다.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가 어떻게 공작성에 들어온 거지?”

“제가 레이디를 안으로 모셨습니다.”

“자네가?”

“예, 

집사는 담담한 얼굴이다. 집사를 한참 쏘아보던 자카리는 성난 맹수처럼 낮게 그르렁거렸다.

“……차후 이 문제에 대해서 따로 문책하겠네.”

“예, 공작 각하.”

자카리의 말에 집사는 고개를 조아렸다. 자카리는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막막함을 맛보았다.

‘아버지.’

전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자카리는 두 눈을 꾹 내리감았다.

그녀를 만나야 할까, 아니면 얼굴 조차 보지 말아야 할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기뻤다.

”……”

저열한 기쁨에 환멸감이 든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고 마는 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응접실 안에 앉은 이엘리는 살짝 시선을 들어 올려,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긴 여행길을 거쳤는지 다소 지쳐 보였다.

드레스는 제멋대로 구김이 가 있었 고, 긴 머리카락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이엘리…?”

자카리는 멍하니 그렇게 중얼거렸다. 홀린 듯 그녀를 보면서, 자카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거짓말. 이거 꿈이지?’

꿈에서조차 잊지 못했던 그녀가 눈 앞에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조금 말랐다. 하지만 아샤꽃잎처럼 화사한 분홍색 머리카락 과, 새싹처럼 연연한 연녹색 눈동자는 그대로다.

‘이엔.’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홀린 것처럼 그녀에게 다가가려했다. 그러던 중 퍼뜩 정신을 차린다.

‘안 돼. 이엔에게 다가가면……’

새파란 눈동자가 잘 갈린 칼날처럼 날을 세웠다. 자카리는 이를 드러낸 맹수인 양 도사렸다.

“자카리.”

머뭇거리던 이엘리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자카리를 불렀다. 순간 현실감이 와락 되살아난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자카리는 부러 싸늘한 목소리를 내어 이엘리에게 질문했다. 멈칫한 이엘리가 대답했다.

“나, 널 만나러 왔어.”

“미안하지만 그럴 필요 없었어.”

자카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카리의 냉정한 태도는 이미 예상하고 온 거지만, 그래도 열렬히 사랑하는 상대가 제게 차갑게 구는 게 아프지 않을 리 없다.

“그러니까 당장 돌아가.”

“자카리!”

이엘리는 다급하게 자카리를 불렀다. 그는 흘끗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 나는.”

반년의 세월이 지났을 뿐인데, 그녀가 알던 그는 예전과 전혀 달랐다. 해사했던 분위기는 말끔히 사라 진 지 오래였다. 살짝 키가 자라고 눈매가 깊어졌다.

설원 같은 은발, 얼어붙은 바다처럼 푸르게 가라앉은 눈동자. 그는 칼로 얼음을 깎아 만들어 낸 것 같은 청년이 되어있었다.

“돌아가지 않을 거야.”

“어째서?”

자카리가 차게 물었다.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 어째서 돌아가지 않는 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네 곁에 있고 싶으니까.”

자카리의 눈동자가 짧게 떨렸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자카리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내 곁에 있고 싶다고? 하, 정말. 웃기지도 않아.”

잠시 침묵하던 자카리가 비죽하게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이엘리는 달래듯 자카리를 불렀다.

“진심이야. 난 네 옆에 있고싶……”

“이엔, 넌 네 마음만 중요해?”

그녀의 말을 탁 끊어 낸 자카리가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말문 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자카리가 그녀에게 저렇게 날카로운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그는 그녀에게 환하게 웃어 주었기에, 저런 얼굴을 한 자카리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빙하처럼 냉랭 한 눈동자가 이엘리의 가슴을 저며 내는 것 같았다.

고통스럽다. 이엘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모르겠어? 난 널 만나고 싶지 않았어!”

자카리는 피를 토하듯 외쳤다. 그녀를 대하는 수많은 거짓들 중, 지금 이 말은 진심이었다. 너를 다시 만나면 속절없이 흔들릴 것을 아니까. 다시 한 번 그녀의 온기에 기대 고 싶어지니까.

“이엔, 도대체 너 왜 그래?”

자카리는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굴었는지 기억하면서도 이러는 거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난 괜찮으니까……”

“뭐가 괜찮아!”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여기서 내게 괜찮다고 하면 안 돼. 소중 한 널 형편없이 밀어내 버린 나를 미워해야 해.

“정말로 내가 너에게 한 짓을 기억 하는 거, 맞긴 한 거야?”

흐트러진 은발 아래, 새파랗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본다. 자카리가 말했다.

“난 널 버렸어, 이엔.”

날 용서하지 마. 넌 나 같은 사람 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서, 넘치는 사랑을 받고 살아야 한단 말 이야. 그렇게 생각하던 자카리는 지 그시 입술을 깨물고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로 이엘리가 다른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

이기적인 자식. 자카리는 속으로 자신을 실컷 비웃었다. 만약에 그녀가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난 아마 미쳐 버렸을지도 모르는 데.’

하지만 이엘리는 자카리의 진짜 속 내를 모른다. 또한 설령 자신이 미쳐 버린다 해도, 그는 그녀 앞에서 만큼은 제 마음을 들켜서는 안 됐다. 모든 것은 그녀를 보호하고 지 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넌 내게 돌아와서는 안 됐어.”

자카리가 짓씹듯 말을 토해 냈다. 이엘리는 자카리와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날 말끔히 잊어버리고, 널 사랑하고 존중하는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살았어야지. 그게 나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복수였을 텐데.”

복수? 순간 그녀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연녹색 시선이 불타오른다.

“내게 복수하고 싶었다면 그게 가 장 현명한 방법이었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 복수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어!”

“아아, 그래?”

자카리는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얼굴에 번지는 차가운 미소에, 그녀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그도 아니라면 설마 그건가.”

냉랭한 목소리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묻는다.

“너, 날 동정해?”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그렇지 않고서야 내게 돌아올 리 없잖아.”

그렇게 쏘아붙이던 자카리가 지그 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얼음으로 만든 유리 조각이 심장을 갈기갈기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모를 리 없었다. 이엘리가 자신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 쯤은.

‘그리고 내가 너의 진심을 매도하고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널 보낼 수 없을 테지. 어째서 난 원만 한 방법을 모르는 걸까.

“그래, 물론 내가 아버지를 잃은 건 사실이지.”

“자카리."

“내가 천애 고아가 되니 마음이라도 동했나? 불쌍하고 가여워 보였 어?”

하지만 이렇게 말해야했다. 어떻게든 이엘리를 보내야했다.

그러지 않으면 분명 그는 다시 그녀의 다정함을 이용하려 들것이다. 이엘리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합리화를 하면서.

‘그것만큼은 안 돼.’

자카리는 괴롭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엘리의 얼굴을 마주 보는 그 순간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연녹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이고, 서리를 맞은 아샤꽃잎처럼 무너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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