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96)

79 화

‘공작님이 돌아가셨던 그때, 자카리는 혼자 있었을 텐데.’

비록 두 부자가 서로를 그리 좋아 하지 않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죽 음에 충격을 받지 않을 리 없었다.

자카리. 지금 어떤 기분으로 공작성에 있는 걸까.

‘지금도 공작성을 혼자 지키고 있겠지……’

생각만 해도 막막했다. 지금 그가 어느 정도의 슬픔과 절망을 느끼고 있을지 감이 안 잡힌다.

‘도대체 자카리는 어디로 간거지?, 

날 찾아오지 않았을 뿐, 차라리 편안하게 잘 살고 있다면 좋았을 텐데.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레이디 블랑쳇. 괜찮으세요?”

이엘리의 안색이 창백했다. 그럴 만도 하다. 후작 영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물론 레이디께서도 많이 놀라셨겠 죠. 이해해요.”

”……”

말문이 턱 막혔다. 공작의 서거, 홀로 남은 자카리.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신경이 날카롭다.

“단단히 마음 붙들고 계세요. 조만 간 공작가에서도 따로 연락이 오겠지요.”

이엘리는 작게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런 이엘리의 파리한 낯을 보면서 후작 영애는 생각했다.

‘그 소공작께서 이대로 레이디를 두고 보실 리가 없어.’

그건 거의 예감과 같았다. 저번 황제의 즉위로 인해 처음 만났던 소공작 부부의 모습을 기억한다.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다는 양, 오로지 이엘리에게 고정 되어있던 그 시선.

‘소공작께서는 레이디를 포기하지 못하실 거야.’

이엘리를 바라보던 소공작의 열렬한 눈동자, 강렬한 애정과 집착. 모를 수가 없다.

또한 그녀의 아버지도 같은 판단을 내린 듯했다. 소공작 부부의 이혼 소식을 들은 론도 후작은 말했다.

‘아마도 뭔가 사정이 있으셨겠지.’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래. 하지만 이혼 후 재결합이라는 결과도 있을 수 있지 않니?’

거의 확신하는 목소리였다. 후작 영애 또한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했다. 아직 상황은 확정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재결합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소공작이 공작위를 계승하지 않았나.

“……가야겠어요.”

“네?”

그때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깜짝 놀란 후작 영애가 그녀를 돌아본 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저, 자카리를 만나러 가야겠어요.”

“하지만, 레이디 블랑쳇……”

“어떻게든 얼굴을 봐야 해요. 자카리는 지금 혼자 있을 테니까요.”

아무도 자카리의 곁에 남아 있지 않아.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자카리가 온 세상에서 버림받아도, 그녀만큼은 자카리의 곁에 있어 주기로 결심했다. 하물며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소공작님과 레이디의 마음은 같은가 보네.’

상대방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게 부부가 꼭 닮았다. 론도 후작 영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요.”

“……론도 후작 영애.”

“어차피 말린다 하더라도 제 말을 들으실 것 같지 않으니까요.”

그 말에 이엘리는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잠시 후, 해사한 미소의 끝이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뵈어요.”

“몸조심하세요.”

론도 후작 영애는 짧은 인사말로 이엘리를 보내 주었다. 이엘리는 테라스 밖으로 빠져나갔다.

 황녀는 헤센바이츠 공작령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 탑승해 있었다. 황녀의 마음은 꽤 복잡했다.

‘이 소식을 레이디에게 미리 전했 던 게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마음고생이 깊어 보이는 이엘리였다. 과연 제가 잘한 행동을 한 건지 알 수 없다. 여러 가지고민에 매몰된 채, 황녀는 손톱으로 창틀을 톡톡 두드렸다. 머리 가 지끈거렸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보다 이렇게 내려가는 게 의미가 있나.’

솔직히 황녀가 당장 내려가 봤자, 장례식에 참석할 수조차 없었다. 장례를 주관할 새로운 공작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니까.

그럼에도 황제가 부득불 조의를 핑계로 그녀를 내려보내는 건.

‘아직도 헤센바이츠와의 혼담을 포 기하지 않으신 거지, 오라버니께서는.’

황녀의 입술에 비웃음이 서렸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스스로의 욕심으로 멋대로 밀어붙이는 황제의 태도가 한심해서다.

황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동 해야 할 거리가 멀었다.

 이엘리는 황급히 무도회장을 가로 질렀다.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이엘리를 곁눈질했다. 예의를 지켜 좀 더 머물러야 한다거나, 그런 생각들 은 이제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진지 오래였다.

‘빨리 자카리에게 가야 해.’

이엘리의 온몸을 지배하는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어떻게든 빨리 자카리의 곁에 당도 해야 한다. 지금 그가 어떤 심정을 한 채, 아버지의 죽음을 홀로 견디 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레이디 블랑쳇.”

그때 이엘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퍼뜩 자리에  멈춰 선 그녀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요?”

이엘리는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제는 빙그레 눈웃음을 쳤다. 그 이후, 입을 열었다.

“들여오너라.”

그와 동시에 시종들이 커다란 꽃다 발을 든 채 걸어왔다.

이엘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확 쏠리는 것을 느꼈다.

꽃다발을 받아 든 황제가 그녀를 향해 느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전의 마상 시합에서 아샤꽃가지는 드리지 못했지만.”

“페, 폐하.”

“그 대신 꽃다발을 준비했습니다.”

황제는 그녀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새빨간 장미 꽃송이만 골라 빼곡하게 담아 만든 화려한 꽃다발이다. 어찌나 향이 짙은지 머리가 어 지러워질 지경이었다. 황제가 장미 한 송이를 뽑았다.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꽃은 물론 아샤꽃입니다만……”

”……”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붉은 장미 도 꽤나 잘 어울리는군요.”

그녀의 머리에 장미꽃을 꽂아 준 황제가 달콤하게 웃었다. 그녀는 어깨가 떨리는 걸 느꼈다.

“어떻습니까?”

“……저는.”

사위는 고요했다. 연회장 안의 사람들은 모두 황제와 이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의 말을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고민했다.

‘어쩌지?’

당연히 꽃다발은 거절할 생각이다. 하지만 무어라 말하며 거절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꽃다발을 준비하 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그가 단단히 마음먹었 다는 증거였다.

“그러니까... 폐하의 호의는 무척 감사하지만.”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 황제는 묘한 얼굴로 이엘리를 응시했다. 이엘리는 주먹을 당겨 쥐었다.

“아직 제가 폐하의 호의를 받아들 일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전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황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던 황제가 말을 잇는다.

“다만 레이디가 마음을 제대로 잡을 때까지, 우리의 관계만 확실히 하자는 뜻입니다.”

‘젠장. 이렇게 시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어떻게든 그녀와 관계를 확정 지어 놓겠다는 황제의 의지가 보였다.

“대답, 안 하십니까?”

황제가 상냥한 태도로 그녀를 압박해 왔다. 나, 어쩌면 좋지? 그녀는 막막함을 느꼈다. 그때.

“그런데, 레이디 블랑쳇.”

“예, 폐하.”

“그 팔찌는 무엇입니까?”

황제는 턱짓으로 이엘리의 손목을 가리켰다. 긴 소매 아래, 그녀가 찬 팔찌가 드러난 탓이다.

“……아, 이건.”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손목을 감쌌 다. 차마 풀어내지 못했던 팔찌. 자카리의 생일 선물로 함께 맞췄던 가느다란 팔찌였다.

황제의 눈이 불쾌감을 품고 가늘어졌다. 그가 내뱉듯이 말을 꺼낸다.

“그러고 보니, 헤센바이츠 소공작 도 이 팔찌를 착용하고 있더군요.”

“네. 하지만……”

“이미 관계를 정리하셨는데, 아직 도 그 팔찌를 착용하고 계시다니.”

이엘리는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혼한 지 반년이 지났지만, 이엘리는 아직 공작가의 물건을 하나도 정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팔찌는 자카리가 준 은 여우 목도리와 함께, 두 사람의 추 억이 담긴 물건이었다. 두 사람이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며 나눠 착용 했던 팔찌.

‘실수했어. 이 팔찌를 황제에게 보 여서는 안 됐는데.’

이엘리는 어쩔 줄 몰라 이를 앙다 물었다. 황제는 귀족적인 태도로 이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그 팔찌를 제게 주시겠습니까?”

연녹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막 다른 곳에 몰린 자그마한 짐승처럼 그녀는 황제를 응시했다.

“대신 레이디의 격에 걸맞은 다이 아몬드 팔찌를 드리도록 하죠.”

”……”

“그것만으로는 마음에 차지 않으신 다면, 원하는 모든 보석을 말씀하셔 도 괜찮습니다.”

황제는 마치 커다란 은혜를 베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번뜩였다.

“다만 그 팔찌는 벗어 주셨으면 하는군요.”

“……싫어요.”

“예?”

이엘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엘리와 자카리의 관계가 정리된 것은 사실이었다.

“싫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폐하.”

그렇다고 누구도 이엘리와 자카리의 추억을 건드릴 권리는 없다.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께서 제 행동을 강제할 권리는 없으십니다.”

“레이디 블랑쳇.”

“어떠한 보석도 이 팔찌보다 값지 지 않아요. 절대로 드릴 수 없습니다.”

“이런, 고집부리지 마세요. 다시 생각해 보시면……”

황제는 이엘리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완고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이엘리는 제 머리에 손을 뻗었다.

제 머리에서 장미꽃을 빼낸 그녀 가, 손안에서 꽃을 우그러뜨렸다.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엘리는 사나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던가.’

황제는 아연해졌다. 적어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던 이엘리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런 것조차 걷어치운 채, 황제를 명백히 거부하고 있었다. 이엘리는 싸늘한 얼굴로 시선을 맞추었다.

“제게 어울리는 꽃은 오로지 하나 뿐입니다.”

”……”

“그리고 그 꽃은 바로, 헤센바이츠 공작께서 제게 주셨던 아샤꽃가지지요.”

이엘리는 살짝 손을 펼쳤다. 짓눌 린 장미꽃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그녀는 낭랑하게 말했다.

“억지로 밀어붙이면 모두가 그 마음을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은 고치 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엘리는 그대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미련 따위 전혀 없는, 오히려 홀가분한 동작이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폐하.”

그녀의 말을 듣자, 황제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의 이엘리는 자카리를 ‘헤센바이츠 공작’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 말은 곧 그녀가 공작의 죽음과 자카리의 작위 승계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레이디 블랑챗! 지금 간다 한들, 공작이 당신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 하십니까?!”

황제가 악에 받쳐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의 황제는 그녀를 공격할 효과적인 말을 알고 있었다.

“현실을 직시하세요, 공작은 이미 당신을 냉정하게 버리지 않았습니까!”

“폐하.”

연한 녹색 눈동자가 미소조차 없이 황제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의 이별에 관련한 문제는 저희가 알아서 해결할 문제입니다. 다만.”

다만, 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끝 이 서늘했다. 뭔가 일이 잘못됐다. 황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폐하께서 저와 자카리의 관계에 끼어드실 권리가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해 두고 싶습니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옷깃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자카리는 이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도, 전 페하를 선택할 일이 없습니다.”

싸늘한 침묵이 깔렸다. 황제는 이엘리를 눈빛으로 뚫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엘리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그 누구도 떠 나는 그녀를 붙들지 못했다.

“젠장!”

황제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항상 이렇다.

왜 그녀를 갖기 직전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눈앞에서 그녀를 놓치게 되는지 모르겠다.

황제의 분노를 보며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뒤늦게 무도회장에 들어선 론도 후작 영애는 흥미로운 낯을 했다.

그렇게 연회는 엉망으로 종료되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당연히 헤센바이츠 공작령이었다.

무도회장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당장 마차부터 잡아탔다.

호텔조차 들르지 않은 채 마차에 올라탄 그녀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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