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화
황제가 이엘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손으로 그녀의 등을 미끄러지듯이 쓸어내리며 속삭인다.
“전 아직도 레이디를 갖고 싶습니다.”
”……”
“그것도 무척.”
이엘리는 침묵했다.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황제가 그녀에게 이유 없는 소유욕을 드러내는 건 평소에도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었다.
‘젠장.’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빨리 춤 곡이 끝났으면 생각했지만, 아직도 곡은 절반도 오지 않았다.
“레이디께서는 제 여자가 되기 싫다고 하셨지만.”
황제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로 황제가 그녀에게 말했다.
“어쩌겠습니까, 이제 레이디께서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이 하나도 없는 것을요.”
“그래서 이 기회에 기댈 데 없는 연약한 여자를 어떻게 해 보시겠다, 이런 말씀 이신가요?”
이엘리는 싸늘하게 빈정거렸다. 황제를 향해 이렇게까지 함부로 말해도 되나 싶었지만, 그가 보이는 치 졸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황제도 그녀의 말에 딱히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주어진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사람 만큼 바보 같은 이도 없지요.”
“신사답지 못하시군요.”
“기회를 잘 활용한다고 말씀해 주 시지요.”
황제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처 음부터 이것을 노린 것 같았다. 이엘리는 분노를 억눌렀다.
“여태까지처럼 공작가 측에서 훼방을 좀 놓으려 하겠지만…… 뭐 어떻 습니까?”
‘자카리가?’
이엘리는 반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공작가에서 훼방을 놓았다, 라. 설마 자카리의 보호 때문에, 지금껏 황제가 칩거하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던 건가.
그동안 황가에서 가끔 초대장 정도는 날아오곤 했었지만, 확실히 무시 할 수 있는 수준이긴 했었다. 황제는 불편한 얼굴로 이엘리에게 말을 이었다.
“전 이미 그쪽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차려 주었습니다. 무려 반년이나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폐하.”
“그러니 이제 레이디께서 제게 대 답해 주셔야 할 차례입니다.”
동시에 춤곡이 끝났다. 그녀는 급 히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지만, 황제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전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 황제가 그녀의 손등을 들어 키스했다.
이엘리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와 동시에 춤곡이 끝났다. 그녀는 지금만큼 음악이 끝 나는 게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런, 벌써요?”
황제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엘리는 속이 후련한 얼굴로 황제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폐하.”
“당신과 함께 춤을 출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황제의 느물거리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황제는 그녀의 손등을 느긋한 동작으로 어루만졌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다 시 찾아가겠습니다.”
‘네가 왜 날 찾아오니?’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애 써 억누르며 이엘리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황제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여자의 손을 잡으며 황제는 중얼거렸다.
“……뭐, 오늘 하루는 기니까.”
연회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사람들의 이목을 이쪽으로 모두 모은 후. 그녀에게 요청할 것이다. ‘나의 여자가 되어 달라’고. 그 순간을 상상하던 황제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엘리는 연회장 구석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황제에게서 허겁지겁 멀어지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 야 연회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엘리는 하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황녀 전하께서 보이지 않으시네?’
신년 무도회는 황궁에서 여는 무도회 중에서도 꽤 규모가 큰 행사였다. 게다가 황제까지 직접 참석하는 자리인데, 황녀가 참석하지 않는 건 조금 이상하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낯을 할 때.
“레이디 블랑쳇!”
“론도 후작 영애?”
내심 놀란 이엘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부른 사람은 리체 론도, 론도 후작의 여식이다. 황후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여인으로 점쳐지며, 황녀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
‘지금까지 몇 번 얼굴을 보긴 했지만, 지금과 그때는 사실 상황이 다른데.’
그때의 이엘리는 공작가의 차기 안 주인이었다면, 지금의 이엘리는 그저 조그만 자작가의 여식일 뿐이다. 게다가 공작가에서 이혼까지 당한. 후작 영애가 굳이 말을 걸 위치가 아닌 것이다.
“괜찮으세요?“
하지만 론도 후작 영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힐 끔 귀부인들을 돌아본다.
“몇몇 귀부인들의 말씀은 신경 쓰지 마세요.”
후작 영애의 날카로운 시선에 귀부 인들은 움찔했다. 론도 후작 영애는 제도 귀족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지 위를 가진 레이디였다. 후작가의 지 위를 가진 귀족 자체가 몇 없기 때문이었다.
“아, 아니예요. 전 괜찮으니까……”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하던 이엘리는 가슴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헤센바이츠의 이름을 잃게 되자마 자, 사람들은 날 외면했는데.’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한때 자카리와 혼담이 오갔던 안네로제 황녀 와, 그리고 짧게 얼굴만 보았던 론 도 후작 영애만이 그녀를 그전과 똑같이 대해 주고 있다. 이엘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솔직히 영애께 감사하네요. 대부분의 귀부인들께서 절 피 해 다니셨거든요.”
“뭐, 어디든 치졸한 사람들은 있는 법이니까요.”
론도 후작 영애는 들으란 듯이 대 답했다. 그 말에 좀 찔렸는지, 귀부 인들이 우수수 흩어졌다.
‘여기서 레이디에게 무례하게 구는 건 멍청한 짓이야.’
자카리와 이혼한 후에도, 이엘리는 반년 이상 황제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탐욕스러운 황제가 그녀를 그대로 놓아둘 리 없으니, 이엘리가 자유로웠던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게다가 소공작께서 황가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니까.’
후작 영애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이엘리와 후작 영애를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귀부인들. 이엘리가 소공작의 부인이었을 땐, 말도 제대로 걸지 못했는데. 후작 영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비단 그 점이 아니라 도, 저렇게 손바닥 뒤집는 듯 바뀌는 행위는 좀 치졸해 보이네.’
오랫동안 사교계에 머무른 귀족 영애 특유의 감이 론도 후작 영애에게 경고를 보냈다. 그 감이 후작 영애 가 황녀의 부탁을 받아들인 이유였다. 후작 영애는 살가운 어조로 말을 붙였다.
“많이 힘드시죠, 레이디?”
”……”
이엘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힘들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데, 도무지 입이 안 떨어진다.
‘나 의외로 마음고생을 좀 했나 봐.’
이엘리는 입 안에 쓴맛이 도는 것을 느꼈다. 그때 후작 영애가 그녀에게 불쑥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이혼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맞아요.”
그 말을 긍정하며 이엘리는 가슴이 아려 왔다. 그때 단호한 얼굴로 후작 영애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두 분께서도 뭔가 사정이 있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론도 후작 영애?”
“그도 그럴 것이, 저번에 뵈었을 때 소공작께서 레이디를 대하시는 태도를 보았는걸요.”
후작 영애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이엘리의 손을 꼭 잡았다. 이엘리는 흠칫 놀라 후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후작 영애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엘리의 작은 손바닥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런데 레이디.”
“네?”
이엘리는 후작 영애를 마주 보았다. 이엘리의 곁에 바싹 붙어 선 후작 영애가 작게 속삭였다.
“사실 저, 레이디께 드릴 것이 있어 왔어요.”
“제게요?”
고개를 끄덕인 후작 영애가 이엘리에게 편지 봉투를 건네주었고,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에게 말한다.
“이 편지를 전해 달라 부탁하신 분 은 황녀 전하세요.”
“황녀 전하께서요?”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녀와 후작 영애에게 부탁까지 해서 이렇게 비밀스럽게 편지를 남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후작 영애는 진지한 얼굴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네. 그리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아,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테라스로 이동했다. 밖으로 나서자 싸늘한 공 기가 온몸을 감싼다.
이엘리는 미간을 좁힌 채 편지를 뜯어보았다. 비스듬하게 흘려 쓴 글씨체로 글이 적혀 있었다.
‘아직 레이디가 이 소식을 알지 못 할 것 같아 짧게나마 서신을 남겨 요.’
황녀의 글씨는, 예전 황제가 황녀인 척 황궁에 초대했던 초대장의 글 씨체와는 확연히 달랐다.
‘놀라지 말아요. 헤센바이츠 공작께서 서거하셨어요.’
뭐? 이엘리는 순간 혼란에 빠졌다. 공작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어째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렸을 땐 그래 도 건강해 보이셨는데? 손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공작 각하의 죽음은 명확히 밝혀 지지 않았지만, 듣기로는 자살에 가깝다고 했어요.’
병사가 아니라 자살이라고? 이엘리는 초조한 얼굴이 되어 황급히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전 지금 조문을 위해,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헤센바이츠 공작령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엘리는 황제의 무례함에 충격 받았다. 아무래도 황제는 둘의 혼담을 진행시킬 욕심을 아직 버리 지 않은 듯하다. 혼담을 거절했음에도 굳이 황녀를 조문이란 명목으로 보내다니.
'사실 이 사실을 레이디께 말씀 드릴까 좀 고민했었어요.’
고민했다는 황녀의 말은 사실인지 저 문장의 끝에는 잉크가 작게 얼룩져 있었다.
고민에 빠진 채 펜을 오래 대고 있느라, 잉크가 번진 흔적이다. 황녀는 유려한 필체로 편지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이건 레이디께서 알고 계 셔야 할 것 같아 이 글을 남깁니다. 공작각하께서 서거하신 이후, 단 하나뿐인 후계자이신 헤센바이츠 소공께서는 무사히 작위를 승계하셨어요.’
황제가 자카리의 작위 계승에 시시 때때로 훼방을 놓던 일들을 생각한 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도 이 이상의 소식은 잘 모를니다. 더 알려 주지 못해 미안해요. 편지는 이만 줄일게요.’
사랑을 담아, 안네로제. 그 글자를 내려다보던 이엘리는 털썩 어깨를 늘어뜨렸다. 후작 영애는 기민하게 이엘리의 낯빛을 살폈다. 그녀는 이엘리에게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그 말은 즉…….
“후작 영애께서도 지금 소식을 알고 계신가요?”
“네, 알고 있어요. 고위 귀족들에게는 은밀하게 소식이 돌았답니다.”
바꿔 말하자면 하급 귀족들에게는 일부러 소식을 숨겼다는 뜻이다. 어 째서? 스스로에게 질문하자마자 이 유는 금방 나왔다.
이번 신년 무도회를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이엘리 자신 때문에.
‘신년 무도회가 치러지지 않았으면, 폐하와 내가 마주칠 일이 없잖아.’
비약일까? 자신이 너무 과하게 생각한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엘리는 황제가 일부러 숨긴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어떻게 이런 사실을 숨길 수가 있죠?”
“황제께서 저 사실을 숨긴 이유, 이미 추측하고 계시잖아요. 황녀께서 조문을 위해 공작령으로 내려가 신 것만 해도 그렇죠.”
“그러니까, 선수를 치기 위해 서……”
이엘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공작이 죽었다. 그 사실을 들으면 당연히 이엘리는 공작가를 찾아가려 할 터.
그러나 황제는 이엘리를 제 정부로 원하고, 또한 황녀가 공작가와 혼인 하길 바란다.
이번 신년 무도회에서 이엘리와의 관계를 굳히고, 공작가의 혼담을 처리하면 완벽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헤센바이츠 공작 각하께서는 제국 유일의 공작이세요.”
“하지만 여기는 제도예요. 황제 폐하의 의지가 작용하는 곳.”
”……”
이엘리는 잠시 침묵했다. 지금 이 순간 이엘리의 머릿속을 채우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렇다면 자카리는.”
자카리.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 만으로도 얼음으로 만든 바늘이 심장을 쿡 찌르는 것 같다.
“자카리는 지금 장례식을 홀로 치르고 있겠죠?”
“아마 그러시겠죠. 조문을 받아야 할 테니, 장례식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을 거예요.”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공작님, 그리고 자카리.’
공작이 거세게 기침을 뱉어 내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설마 내가 모르는 새, 병세가 더 심해지시기라도 한 건가? 그런데 자살이라니? 어째서? 머릿속이 혼란 하다.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