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96)

77 화

“어딜 감히 유서 깊은 공작가문에 자작가의 여식을 들이나요?”

하지만 저 말은 참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엘리와 자카리가 혼인하게 된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무척 적었다. 하지만 그 무지가 제국 유일의 공작을 모욕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아무리 소공작을 아끼지 않으신다 고 해도 그렇죠, 자작가의 아가씨를 들이시다니요.”

“솔직히 로렌 백작 부인께서 불만을 가지실 만도 해요.”

아무래도 지금 말하는 귀부인은 로 렌 백작가와 꽤나 친밀한 관계인 것 같다. 부인이 웃었다.

“백작가문의 영애를 밀어내고 자 작 가문의 영애를 들이신 건, 역시 눈이 흐려져서 일까요?”

”……”

이엘리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노골적으로 이엘리를 무시하는 것 정도는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이엘리와 자카리의 결혼을, 공작의 눈이 흐려졌다고 표현하는 저 무례함은 도대체 뭔가.

‘물론 지위와 권력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정한다고는 하지만……’

이엘리가 ‘레이디 헤센바이츠’의 호칭을 가지고 자카리의 곁에 있을 때. 저 여자들은 모두 이엘리에게 살갑게 대했었다. 그녀 앞에서 함부로 공작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도 물론이었다.

‘감히 공작가에 대해 왈가왈부해?’

이엘리의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이엘리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본 귀부인들이 흠칫 놀란다.

“이런, 귀부인들.”

“무, 무슨 용무이신가요?”

자신들이 무례한 행동을 하고 있었던 건 알았는지, 귀부인들은 어깨를 굳히며 이엘리를 마주 보았다. 이엘리는 비뚜름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 게 남에게 모욕적인 이야기는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하고 계 신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끼어들게 되었네요.”

“레이디 블랑쳇?”

“저를 모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이엘리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꺾었다. 새싹처럼 연연한 연녹색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다.

“무려 헤센바이츠 공작가를 모욕 하시다니 요.”

“모, 모욕이라니요?”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귀부인들은 파르르 화를 냈다. 하지만 이엘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다시 말을 잇는다.

“공작께서 소공작님의 아내로 절 선택하신 이유에 대하여, 제멋대로 추측하시더군요.”

”그건……!”

“공작 각하께서 보는 눈이 흐려지셔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던데. 맞나요?”

귀부인들은 이를 악물었다. 한미한 자작가의 영애, 그러나 헤센바이츠의 차기 안주인.

소공작이 괴물이라는 소문이 나 혼 인을 기피했던 건 까맣게 잊은 채, 그들은 이엘리가 운 좋게 결혼으로 신분 상승을 이룬 아가씨라 생각했다. 그런 이엘리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고작 자작 영애 주제에, 주제넘게.’

‘혼인을 통해 고위 귀족에 편입된 것뿐이잖아?’

제도 사교계에서 몇몇 귀족들에게 암암리에 퍼져 있던 그 분위기는 이엘리가 이혼한 후 더욱 고조되었다.

다시 자작 영애가 된 이엘리는 손 쉬운 상대였고, 그래서 좀 험담한 것뿐인데…….

‘너무 신이 나서 얘기해선 안 될 것까지 말했어.’

귀부인들은 낭패한 얼굴이었다. 이엘리는 담담한 얼굴로 당황한 귀부인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귀부인들의 이런 면모를 보게 되 다니, 참으로 실망스럽네요.”

“레이디 블랑쳇?”

귀부인들은 찔끔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차라리 이엘리가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였다면, 귀부인들도 당사자도 아니면서 어딜 감히 무례하게 구느 냐면서 항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공작가가 호사가들의 입에 함부로 오르내릴 위치가 되었나요?”

하지만 이엘리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싸늘한 목소리로 그들의 잘못만을 짚어 낼 뿐이다.

“저, 저희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

“이런, 귀부인들.”

이엘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온기라고는 하나 도 없었다.

“의도는 눈에 보이지 않죠. 보통 누군가의 의도란 그 사람의 행동으로 판단되는 법이랍니다.”

”……”

”……”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이엘리는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본 후, 냉정 한 눈빛으로 말을 잇는다.

“제 이혼이 무척 흥미로우신 건 이 해하지만, 고작 하신다는 게 그런 저열한 행동이라니.”

정곡을 찔린 기분이다. 귀부인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엘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굉장히 실망스럽네요.”

이엘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쏙여 보였이다.

이엘리가 한 말 자체는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기에, 귀부인들은 속내 야 어떻든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 도 여기서 더 그들을 긁을 생각은 없었다.

“물론 귀부인들께서 악의가 있으셔서 그렇게 행동하신 게 아니라는 건 알아요.”

이엘리는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귀부인들은 미간을 좁힌 채 그녀를 마주 본다.

“다만 저는 어떻게 품평하시건 상관 없지만, 공작가에 관련한 말은 조심하시는 게 좋겠네요.”

”……”

“그 편이 귀부인들의 품위를 유지하는 데에도, 훨씬 더 현명한 처신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돌아섰다. 그때 쩌렁쩌렁한 시 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귀족들의 눈이 순식간에 황제가 들 어선 문으로 향했다.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낯을 찌푸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파도가 일듯이 사람들이 하나하나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황제는 수려한 얼굴 위로 선량해 보이는 미소를 걸고 있었다. 아무래 도 황제는 이번 무도회를 꽤나 중요 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보통 연회에서는, 황제가 입장할 때 시종이 입장까지 고하지는 않으니까.’

이엘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황제와 황족, 그리고 최고위 귀족들만이 입장을 알리는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연회의 즐거운 분위기를 젤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그들 또한 웬만하면 지양 하곤했다.

‘폐하께서는 오늘 어떤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하문하실까?’

그리고 사람들은 눈동자를 굴리며 황제가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걸 것인 지를 관찰하고 있었다.

‘황제가 처음 말을 거는 건 보통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나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엘리는 고개를 정중히 숙인 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도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레이디 블랑쳇."

”……”

아아, 역시 이럴 줄 알았지. 이엘리는 입 안 보드라운 살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황제가 부드럽게 말했다.

“고개를 드세요.”

“황공합니다, 폐하.”

이엘리는 제멋대로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펴며 웃어 보였다. 방금 그녀를 부를 때, 황제는 부러 '레이디 블랑쳇’이라는 호칭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녀가 미혼으로 돌아 왔음을 강조하는 호칭이었다.

‘이젠 대놓고 저러시는군.’

황제가 저렇게 행동하는 속내는 훤히 보였다. 그녀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표하겠다는 거였다.

이엘리와 황제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그들은 애써 경악을 감췄다.

‘폐하께서 레이디 블랑쳇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생각은 했지 만……’

‘설마 했는데, 정말로 황제 폐하께 서 레이디 블랑쳇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실 줄이야.’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저번 황제의 즉위식 때, 황제가 이엘리를 보는 눈빛이 특별하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만 이엘리에게는 자카리가 있기에 모른 척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레이디가 이혼한 상태.’

‘폐하께서는 레이디를 자신의 여자 로 들이실 생각인가?’

"한때 공작가의 차기 안주인이었다 고는 하나, 지금 신분은 자작 영애니까.’

사람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 도 황제는 이엘리를 자신의 정부로 들일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노골적으로 이엘리에 대한 관심을 표시할 리 없지 않나.

“레이디 블랑쳇.”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에 두른 채, 황제는 마치 꽁지를 부풀린 공작새처럼 자랑스레 말했다.

“레이디의 첫 춤을 제게 허락해 주 시겠습니까?”

”……”

황제는 우아한 동작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엘리는 제게 내밀어진 그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젠 제 춤 요청을 거절하실 수는 없겠지요.”

“……폐하.”

“이제 레이디께서는 남편이 없으신 몸 아닙니까.”

황제의 눈이 샐쭉하게 휘었다. 황제가 저렇게 나올 것은 예상했다.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씀은 맞습니다만, 아직 이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런. 레이디의 ‘얼마 되지 않았다’는 기준은 저와 상당히 다른 것 같군요.”

황제는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황제의 짙은 회색 시선이 뱀처럼 이엘리를 위아래로 뜯어본다.

“객관적으로 반년의 칩거라면, 공작가에 대한 예의는 충분히 지켰다 고 봅니다.”

“하지만……”

“어서 제 손을 잡아 주시지요.”

황제는 보란 듯이 손끝을 까닥거려 보였다. 이엘리가 머뭇거리자, 황제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예전에는 레이디께 남편이 있으시 다는 이유로 제 춤을 거절하시고는 했지만.”

”……”

“그 핑계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 잘 알고 계시 겠죠.”

무려 황제가 저리 말하는데 그녀가 더 이상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이번 춤 한 곡만 추고, 얼른 무도 회장에서 빠져나가야겠다.’

어쨌든 신년 무도회에 참석했기에, 예의상 한 곡 정도는 춤을 추어야 한다.

차라리 상대가 황제라면, 적어도 앞에서 귀찮게 구는 사람들은 없겠지. 이엘리는 애써 좋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란트 왈츠로.”

황제는 차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이엘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란트 왈츠는 박자가 빠른 춤곡으로, 여성과 남성의 신체가 자주 접촉되기로 유명한 춤이다.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인다.

‘일부러 저 춤을 고른 거겠지.’

명령을 받은 악사들은 황급히 악기에 손을 올렸다.

황제와 이엘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로 나아갔다. 두 사람이 플로어에 자리를 잡자, 주변 사람들이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자, 이리로.”

그렇게 말한 황제는 정중한 척 이엘리의 한쪽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서로의 몸이 맞닿을 정도로 다른 손으로는 이엘리의 허리를 확 끌어당긴다. 미간을 좁힌 이엘리가 낮게 속삭였다.

“폐하, 허리를 너무 세게 당기신 것 같습니다만.”

“글쎄요. 란트 왈츠는 원래 이런 곡이지 않습니까.”

치미는 불쾌감에 이엘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엘리는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폐하. 폐하의 품위, 그리고 제 명예를 고려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황제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헤센바이츠의 이름을 잃었음에도 이엘리는 여전히 당당했다.

“저를 원하신다고 주장하시려면, 적어도 절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주 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황제의 몸을 보란 듯이 밀어냈고, 두 눈을 가늘 게 치뜬 채 쏘아붙였다.

“그리고 이렇게 몸을 붙이면 춤을 출 수가 없어요.”

“아하, 그런 문제가 있군요.”

능글맞게 대답한 황제가 그제야 이엘리의 허리를 놓아주었다. 그 이후,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우리의 관계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해볼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와 동시에 왈츠곡이 연주되기 시 작했다. 황제는 이엘리를 거의 포옹 하다시피 끌어당겼다.

“이전에 레이디께서는 제게 몇 가지 매도를 하셨지요.”

”……”

“제가 레이디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물론 그랬던 적은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 변함없었다. 이엘리는 피곤한 얼굴을 했다.

“소공작의 부인이셨기에 전리품처럼 빼앗고 싶으신 건 아닌가, 그렇게 질문하셨지요.”

“네, 그렇게 말씀드렸던 적이 있었 지요. 매도는 아니고 진심이었습니다만.”

저를 끌어안은 황제의 품에서 벗어 나며 그녀는 차갑게 대답했다. 황제는 눈매를 곱게 휘었다.

”뭐, 그래서 레이디의 말을 듣고 좀 생각해 봤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이엘리는 스텝을 밟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예 그런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시군요.”

“하지만 그렇다면 레이디께서 이혼 하신 그 시점부터…… 당신에게 흥 미가 식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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