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화
“확실히 이 정도면 드레스를 맞출 필요는 없겠구나.”
“……뭐, 그렇죠?”
자작 부인의 감탄한 음성에 이엘리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자작 부인은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다행이야. 이 드레스들, 조금만 고 치면 제도에서도 부끄럽지 않겠어.”
”……”
드레스를 바라보던 이엘리의 눈매 가 살짝 일그러졌다. 열세 살 이래 로 이엘리는 계속 북부에서 살았다. 당연히 그녀의 드레스는 모두 북부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필요 없다고 했는데.”
괜찮다고 거절했음에도 부득불 물건들을 챙겨 주던 메리가 떠올랐다.
마차에 차곡차곡 짐들을 날라 주던 사람들도. 메리가 공작가의 물건을 좌지우지할 권리가 있을 리 없으니, 아마 그건.
‘자카리와 공작님께서 뒤에서 챙겨 준 거겠지.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알고……’
우리는 이혼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던 자카리. 그럼에도 너는 끝까지 내가 보호할 거라고 말하던 자카리. 찰나의 그리움이 몸집을 불려 그녀를 집어삼키려 한다. 그녀는 헛숨을 삼켰다.
“……아냐,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이엘리는 마구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이혼한 사이다. 마침내 자카리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는데, 쓸데없이 감상에 젖을 필요 없었다. 그녀는 옷장을 관찰했다.
“어머나, 이엔.”
“응?”
어머니의 탄성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작 부인이 옷장 안에
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이 은여우 목도리, 정말 예쁘다.”
”……”
이엘리는 순간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새하얗게 빛나는 여우 모피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어1, 이런 모피를 보게 될 줄 이야. 어디서 구한…… 아.”
즐겁게 떠들던 자작 부인이 순간 멈칫했다. 이 하얀 여우 모피를 어디서 봤는지 떠올린 탓이다.
“……저, 이엔?”
”……”
이엘리는 입술을 세게 앙다물었다. 하지만 연녹색 눈동자에는 이미 눈 물이 글썽 고인 채였다.
“이거, 설마.”
“네…… 그거 맞아요.”
손을 들어 올린 그녀가 눈가를 꾹 눌렀다. 안 돼, 울지 않으려 했는데. 다시 툭툭 눈물이 쏟아졌다. 아직도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은여우 모피.’
자카리의 성인식 때, 사냥회에서 선물 받았던 모피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네게 직접 주 고 싶었거든.’
오래 말을 달려 발그스름하게 달아 오른뺨, 이마에 흐트러진 은빛 머리카락. 자카리는 수줍은 태도로 그녀에게 제가 잡아 온 여우를 내밀었다. 그 순간 하나하나가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은여우?’
‘응. 너 추위를 많이 타잖아. 은여우 모피는 다른 모피들보다도 훨씬 더 따뜻하니까……’
가죽이 상하지 않도록 눈에 화살을 쏘아 잡은 새하얀 은여우. 햇살을 머금어 갓 내린 눈처럼 새하얗게 빛 났다. 손에 감기는 감촉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마치 비단을 어루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고마워, 자카리.’
‘말로만?’
‘그럼?’
장난스러운 낯이 된 자카리가 양팔을 활짝 벌렸었다. 이엘리에게 나지막이 속삭이던 목소리.
‘이리와.’
결국 못 이기는 척, 그의 품에 폭 끌어안겼던 그때. 서늘한 눈 냄새와 뒤섞인 그의 체온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제 머리를 쓰다듬는 자카리의 손길을 느끼며 작게 투덜 거렸었다.
‘내가 못살아, 정말.’
'그래도 이혼은 안 된다?’
있지, 자카리. 네가 준 귀한 여우 가죽보다도 네가 날 생각해 주던 그 마음이 훨씬 더 기뻤어.
“엄마.”
“응?, ,
“자카리…… 나한테 말했었는데.”
“무엇을?”
아무리 눈물을 가리려 해도 소용없었다. 이엘리는 고개를 숙인 채 조그맣게 흐느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무릎을 적셨다. 모피 목도리를 내려놓은 자작 부인이 딸의 어깨를 감쌌다.
“이엔.”
“이혼하지, 않겠다고.”
이엘리는 숨을 죽이고 두 눈을 꽉 감았다. 오랫동안 눌러 왔던 서러움 이 다시 치밀어 오른다.
“이혼은 안 된다고…… 그랬었는 데.”
“우리 딸……”
“어떻게 자카리가 저한테 이래요? 제가, 전……”
차마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이엘리는 뚝뚝 눈물을 흘렸다. 자작 부인은 이엘리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어머니에게 기대듯 매달린 채, 이엘리는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감정을 토해 냈다.
“내가 그 애를…… 얼마나, 얼마 나…… 좋아했는데.”
“그래, 알아.”
“그리고 그 애도, 자카리도……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래. 어떻게 이런 식으로 날 말끔히 잘라 낼 수 있어. 얼굴 한번 보여 주지 않고, 편지 한 통
보내지 않고, 아예 내가 네 곁에 존 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이엘리는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이엘리는 신년 무 도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일정을 맟줘 제도로 향했다.
마차에 오르는 그녀는 언제 그렇게 서럽게 울었느냐는 것처럼 말간 낯빛을 하고 있었다.
”……”
이엘리를 배웅해 준 자작 부인은 딸아이의 방으로 돌아가 옷장을 열어 본다. 옷장 깊숙한 곳에는 조그마한 상자가 들어있었다. 자작 부 인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 보았다.
“이엔.”
자작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름에 돌아온 이래로 딸아이는 계 속 마음고생을 했다. 애써 괜찮다고 미소를 지으면서도, 하릴없이 창문을 내다보곤 하던 가여운 딸. 그녀가 중얼거렸다.
“……불쌍한 우리 딸.”
상자 안에는 새하얀 은여우 목도리 가 들어있었다. 그건 이엘리가 간신히 떨치고 간 그리움이었다.
블랑쳇 자작은 객관적으로 평범한 시골 영주였다. 그 말은 곧, 자작가는 제도에 타운하우스를 가질 재력 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에 따 라 이엘리는 조그만 호텔에 숙박하기로 했다.
‘어차피 신년 무도회만 참석하면 되니까.’
짧게 숙박만 하면 된다. 황제의 초대를 계속 거절하는 것도 좀 힘드니, 신년 무도회가 지나면 바로 블랑쳇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엘리는 마차에서 가만히 제도의 풍경을 지켜봤다.
‘……예쁘네.’
신년을 맞이하여 제도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금색과 은색의 별 로 장식하고 갖가지 리본을 늘어뜨렸다. 전생에서 봤던 크리스마스 장 식을 연상시키는 그 모습은 굉장히 화사했다.
‘자카리와 같이 보면 좋을 텐데.’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이엘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내가 도대체무슨 생각을 한 거람.
“아가씨, 호텔에 도착했어요.”
“아, 고마워.”
때마침 마차가 호텔에 멈춰 섰다. 비싼 호텔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소 저렴한 호텔에 속했다.
‘아마 이 호텔에 묵는 것 자체가 구설수에 휘말릴 이유가 되겠지.’
대부분의 귀족들은 제도의 사교 행 사에 참석할 때마다 최소 둘 이상의 하인을 끌고 올라온다.
‘하지만 내가 데려온 하녀는 한 명 뿐이고……’
시골 영지의 살림이란 빤하다. 사실 하녀 한 명을 데려오는 것도 자 작가에겐 좀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 가 좀 행세한다는 귀족들은 레브랑 거리의 고급 호텔에 묵는 것을 고려 한다면…….
‘다소 초라하다고 보일 수 있을지 도 모르지. 그렇지만 뭐, 어때.’
남들 눈을 신경 쓰는 것도 이젠 피곤하다. 이엘리는 하녀 한 명과 함께 호텔 안에 들어섰다.
“아가씨, 이왕 제도에 오신 김에 좀 더 쉬다 가셔도 좋을 텐데.”
“아냐, 얼른 무도회만 참석하고 돌 아가는 편이 더 나아.”
이엘리는 빙긋 웃었고, 하녀는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하녀도 아가씨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오래 숙박할 비용이 없었거니와, 제도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싫었이던 거겠지.
‘그래서 일부러 곧장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빠듯하게 시간을 잡 으신 거겠지만……”
그래도 보통의 이엘리 나이 또래는 한창 파티에 참석하거나 예쁘게 치 장하며 지낸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블랑쳇 영지에서 칩거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하녀는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
“그래요. 그럼 일찍 주무세요.”
“굳이 그럴 필요 있어? 어차피 무 도회도 내일 저녁인데……”
“안 돼요. 신년 무도회에 참석하시려면 준비할 것이 많으니까요.”
“그렇지만, 난 그냥 조금 쉬고 싶은데.”
침대에서 굴러다니던 이엘리가 불만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하녀는 엄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셔야 해요. 피부 관리부터 해 드릴 테니까요.”
“피부 관리라고? 아니, 그 정도로 노력을 기울일 필요 없는 행사인데?”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미 물건은 다 챙겨 왔어요.”
하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엘리는 이불에 고개를 폭 파묻고, 눈동자만을 데구루루 굴렸다.
“내일 아침에는 꿀과 보릿가루를 섞어 팩부터 할 거예요.”
“이미 다 정해진 거야? 변경할 수는 없어?”
“그럼요.”
이엘리는 불퉁하게 입을 다물었다. 중년의 하녀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는 자작 부인의 직속 하녀로서, 어렸을 적 몸이 약한 자작 부인을 대신하여 이엘리를 돌봐 준 사람이었다. 그 말은 곧…….
‘아무리 싫다고 해 봤자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거지.’
아무리 하녀라 한들, 거의 어머니의 친구이자 이엘리에게도 유모 같은 사람이었다.
이엘리는 그냥 얌전히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솔직히 마차를 오랫동안 타서 그런지 피곤하기도 했다.
‘신년 무도회 따위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이불 속에 폭 파고든 이엘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엘리는 신년 무도회만 참석하면 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도회 당일. 이엘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했다.
* * *
이엘리는 복잡한 마음으로 황궁 무도회장에 들어섰다. 무도회장에는 신년 특유의 활기참이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까르르 웃으며 술잔을 부딪치고, 재잘재잘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이런 시선은 역시 좀 불편 하네.’
이엘리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관리하면서 생각했다. 황실 이 주최하는 신년 무도회에 파트너 조차 없이 레이디 홀로 참석한다. 이것만으로도 이엘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이엘리를 물어뜯을 만한 새로운 조건도 하나 추가되었지 않나.
“저분, 레이디 블랑쳇 아닌가요?”
“그러게요. 오랫동안 영지 내에서 칩거하셨는데, 이번 신년 무도회는 참석하셨네요.”
소곤거리는 목소리. 이엘리를 곁눈 질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 온몸이 따끔따끔해질 정도였다.
“그보다 들으셨어요? 신년 무도회 전, 레이디께서는 올렌 호텔에 머무셨다고 하더라고요.”
“네? 그곳이 어딘가요?”
귀족 여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 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후 일부 러 들리도록 크게 말한다.
“레브랑 거리 바깥의 호텔이라고 하던데요.”
“세상에, 그런 호텔에서 숙박하시 다니…… 이혼 후 사정이 좀 어려우신가 봐요.”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공작가의 후광이 없는 이엘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뭐, 이 정도 험담은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니까. 이엘리는 허리를 곧게 폈다.
“역시 헤센바이츠의 후광이 사라졌 기 때문이겠죠?”
“그런데도 드레스는 꽤나 번쩍 거리네요.”
“그러게요. 꽤나 고급스러운데…… 블랑쳇 자작가가 그 정도 부유함을 갖고 있었던가요?”
두 눈을 가늘게 뜬 사람들은 이엘리의 모습을 관찰했다. 오늘의 그녀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볍게 땋아 내리고 연한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 꽂은 깃털 장식이 사랑스럽다.
“그런데 어째…… 드레스의 모양새 가 북부의 양식인데요?”
“세상에, 헤센바이츠에서 마련했던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오신 건가 요?”
“저건 좀 뻔뻔한 것 아닌가요?”
그들은 제멋대로 지껄여 댔다. 이엘리가 새 드레스를 장만하지 않고, 예전 드레스를 차려입고 온 것까지 모두 입방아에 올랐다. 북부와 남부의 드레스 양식이 조금 다르니 알아 보긴 쉽다.
“설마 이혼하는 마당에 공작가의 재물을 챙겨 내려온 건 아니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드레스가 있을 리가요. 얼굴에 철판을 깐 것 도 아니고, 저게 뭔지.”
이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의 뒷담을 듣고 있었다. 솔직히 그녀를 욕하는 건 상관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헤센바이츠 공작 각하께서 소공작님의 아내분을 잘못 고르신 거죠.”
순간 이엘리는 멈칫했다. 그녀를 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공작과 자카리를 모욕하는 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