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화
당장 널 끌어안고 떠나지 말라 애원할 테지. 그것만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지금껏 이엘리에게 기 대 살아왔던 삶이었다. 아마 그녀의 온기가 없으면 그는 천천히 말라비 틀어질테지.
“이렇게…… 홀로서기를 시작하게 되나.”
자카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눈물 속으로 쓰디쓴 웃음이 섞여 든다. 자카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엘리는 느린 걸음으로 성 밖으로 빠져나왔다. 자리에 멈춰 선 채 흘 끗 공작성을 뒤돌아본다.
”……”
쥐 죽은 것처럼 고요한 공작성. 한때 저 성안에 활기찬 웃음이 가득 찼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공작성에서 치른 자카리의 성인식. 공작에게 준 레몬 꿀 절임. 공작과 자카리, 공작성 사람들이 모두 모여 머쓱해하며 웃던 따스한 오후의 티타임. 그게 모두 먼 과거 같았다.
‘이렇게 떠나시면 어떡하 나요.’
'정말 보고 싶을 거예요.'
성을 떠나기 전, 수없이 많은 공작성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이엘리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기 위해 한참 애써야만했다. 모두들, 그녀를 무척 아껴 주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었다.
“이엘리.”
“……공작님.”
이엘리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 보았다. 그녀를 부른 사람은 바로 공작이었다. 공작은 복잡한 얼굴로 이엘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공작이 그녀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혹시 날 원망하느냐?”
”……”
이엘리는 잠시 침묵했다. 원망하느 냐고? 당연하다. 원망하는 마음이 없을 리가 없다.
“……예, 원망하지 않는다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
“그래도……”
공작은 말없이 이엘리를 마주 보았다. 숨을 삼킨 이엘리가 공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것이 공작님께서 생각하시는 최선임을 압니다.”
”……그런가.”
“하지만 공작님께서도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엘리는 이제 담담한 얼굴이다. 공작은 말해 보라는 것처럼 고개를 까닥였다. 그녀는 말했다.
“전 절대 자카리를 포기하지 않아 요.”
그 말을 들은 공작은 침묵했다. 이엘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정중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자카리에게…… 제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 주세요.”
”……”
“몸 건강하시고요.”
짧은 인사였다. 이엘리는 깊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공작이 작게 말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
”……”
“그럼 잘 가거라.”
공작은 뒤돌아섰다. 이엘리는 마차 에 올라탔다. 그녀를 배려해서일까, 준비된 마차는 최고급 여행용 마차였다. 자카리는 창문 너머로 그녀가 탄 마차가 작은 점이 되는 것을 지켜 보았다.
이엘리는 멍하니 마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제 고향, 블랑쳇 영지다. 북부보다도 한참 날이 따스한 남부는 이제 만연한 봄의 기 운이 만연했다.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경계였다.
”……”
이엘리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군데군데 깔린 디딤돌이 파란 잔디 사이로 햇빛을 머금어 희게 빛났다. 공작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조그마한 정원, 빨간 벽돌을 쌓아 만든 작은 저택.
“엄마.”
“이엔?”
빨간 덩굴장미를 잘라 내던 자작 부인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려 그녀를 마주 본다. 밀짚모자 아래, 안타까운 시선을 보며 이엘리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녀의 이혼 소식은 이미 닿은 지 오래였다.
“엄마, 나 왔어요.”
“……그래.”
자작 부인은 꽃을 담아 둔 바구니에 정원용 가위를 밀어 넣었다. 그대로 양팔을 활짝 펼친다.
“이리 오렴.”
“어, 엄마.”
순간 이엘리의 눈에 핑그르르 눈물이 돌았다. 울먹이던 이엘리가 이윽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자작 부인의 품 안에 몸을 던진다. 어머니의 따스한 품 안에서는 옅은 장미 향기가 났다.
“우리 이엔, 힘들었겠구나.”
자작 부인은 그저 그렇게 말했다. 이엘리는 마구 고개를 내저었고, 품에 뺨을 비비며 대답했다.
“괜찮아, 빚도 다 갚았으니까.”
“이엔.”
“엄마, 걱정하지 마요. 난 괜찮으니까……”
스스로에게 말하는 양, 이엘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자작 부인은 딸의 마른 등을 쓸어내렸다.
“괜찮을 리가 있니.”
“……엄마.”
“좋아하는 사람과 이별하게 된 거 잖니. 슬픈 것도 당연하지.”
연녹색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자작 부인은 딸의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그러니까 마음껏 울어도 된단다.”
그 속삭임이 시발점이었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감정을 도무지 주체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자작 부인은 그런 딸을 있는 힘껏 끌어안아 주었다.
그해 여름, 이엘리는 숨을 죽이고 블랑쳇 영지에서 은둔했다. 외부에 서는 갖가지 소식이 들려왔다. 황제가 헤센바이츠 공작가에 정식으로 다시 혼담을 넣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안네로제 황녀와 소공작의 혼담을 추진하려 했지만, 공작가 측에서는 침묵으로 거절했다고 했다.
‘나와는 상관없지.’
이엘리는 냉소적인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이혼했으니 황제가 귀찮게 굴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 외로 황제는 그녀에게 껄떡거리지는 않았다.
아마 주변의 눈을 살폈을 테고, 헤센바이츠 공작가에서 압박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 솔직히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느리게, 하지만 착실히 흘렸다. 이엘리는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간이 지나면 고통도 옅어진다고 했는데.’
그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만약 그 말이 진실이라면, 마음이 아직도 이렇게 저미듯 아파 올 이유가 없지 않나.
이엘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쉬 지 않고 울었는데도 계속 눈물이 난 다는 게 신기했다.
10. 재회
시간이 느리다고 생각했는데 그렇 지도 않다. 숄을 걸친 이엘리는 창 밖을 가만히 내다보았다.
“벌써 겨울이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왔던 그때, 화창했던 여름 정원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가을을 거쳐 시간은 초겨울로 달음질쳤다. 날씨는 차가워 졌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른 낙엽 이 팔랑거린다.
‘공작령은 이맘때쯤이면 함박눈이 내리고도 남을 텐데.’
이엘리는 숄을 추스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고는 머쓱하게 웃어 버렸다.
이제 나와 공작령은 아무 상관없는데, 쓸데없이. 그녀는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입김이 창문을 희게 물들인다.
‘자카리.’
잘 지내고 있을까. 내 생각, 조금 이라도 해 줄까. 기다리겠다는 내 말,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좋다고 했으면서.’
이엘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생각이 멋대로 달음질친다. 자카리가 보고 싶었다. 그의 미소, 다정한 목소리, 그녀를 바라보는 달콤한 시선. 모든 것이 그리운데. 넌 내 생각은 하지 않니?
이엔.
그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이엘리가 뒤를 돌아 보았다. 자작 부인이었다.
“왜 여기에 나와 있어.”
안타까운 눈빛으로 딸아이를 바라보던 자작 부인이 사뿐사뿐 걸어왔다.
이엘리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쥔다. 어느새 손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걱정으로 눈가를 오므리며 자작 부 인이 물었다.
“춥지 않니?”
“아니예요, 괜찮아요.”
딸아이는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작 부인은 그런 딸아이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공작령에서 돌아온 이래로 딸에게는 버릇이 하나 생겼다. 바로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텅 빈 연녹색 눈동자는 창밖을 멍 하니 더듬고 있다. 자작 부인은 부러 활기차게 입을 열었다.
“참, 네게 초대장이 왔단다.”
”……”
아, 또?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시큰둥한 얼굴이 된 채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도 황성에서 왔나요?”
“그래. 신년 무도회에 참석해 달라고 하더구나.”
”……”
이엘리는 한숨을 삼켰다. 처음 이혼한 당시에는 조용했던 황제는 요새 다시 슬금슬금 이엘리를 귀찮게 굴고 있었다.
이엘리는 거의 반년 동안 블랑쳇 영지 안에서 칩거하고 있었음에도, 초대장을 계속 보내오는 그 작태만 해도 그랬다.
황제는 이엘리에게 은근히 요구하고 있었다.
‘나의 정부가 되어라.’
그 속내를 모를 리 없다. 이번에는 무어라 거절해야 하려나. 이엘리는 피곤한 얼굴이 되었다.
‘처음에야 다른 귀족들의 반발도 그렇고, 공작가의 압력 때문에 자중하는 것 같았지만.’
블랑쳇 자작가는 귀족 명부에 간신히 이름을 올린 작은 가문일 뿐이다. 외려 가문의 힘이 없다는 것이 이엘리에게 도움이 되었다.
빚도 탕감한 마당에, 황가가 소귀족을 핍박한다는 소문이 돌 수도 있었던 거다. 게다가 공작가와 연을 맺었던 여식에게 대놓고 그러는 모양새니까.
‘아마 공작가에서도…… 황가에게 압력을 가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자카리는 자신이 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이혼 후에도 그녀의 안 전을 보장한다는 자카리의 말은 유효했다. 공작가와 대립각을 세우느니 이엘리를 당분간 놓아두는 쪽을 택했겠지.
“하아.”
“왜 한숨은 쉬고 그러니, 이엔.”
“그냥요.”
이엘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부모님께는 이런 상황을 설명드리지 않았다. 어차피 설명해 봐야 걱정만 하실 거고, 딱히 답이 없으니까. 하지만 황제는 꾸준히 초대장을 보내 왔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이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무도회는 참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녀가 보통 내세웠던 핑계였다. 하지만 황제는 그 허울 좋은 핑계를 가볍게 무시하고 있었다.
'하긴, 언제까지나 황가의 초대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이엘리는 입술을 잘근 씹으면서 고민에 빠졌다. 벌써 초대를 거절한 지도 다섯 번이 넘는다.
“이번에는 참석해야 하려나.”
“응?”
“아, 이번 신년 무도회 말이예요.”
이엘리도 알고 있었다. 자카리와 이혼한 이후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소문이 따라 붙어있는지.
‘레이디 블랑쳇께서는 이혼 이후로 외부 활동도 전혀 하지 않으신다면 서요?’
‘어찌나 불화가 심했으면 소공작께 이혼을 당했을까요?’
그녀의 평판도 슬슬 바닥을 치고 있었다. 사교계에 나서질 않으니 소문에 반박할 수도 없다.
‘역시…… 숨을 죽이고 있는 건 지금 상황에선 도움이 안 되겠지.’
황녀의 걱정스러운 편지도 몇 번이나 날아 들곤했다.
소공작이 황제가 넣은 혼담을 거절 했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말라는 조심스러운 내용이었다. 반년 이상 칩거 했으니 슬슬 나가 볼 때도 됐다.
‘그래, 자카리가 찾아올 거라는 기대는 이제…… 버리는 편이 좋을지 도.’
이미 이혼한 지 한참 시간이 흘렀다. 그들의 이별은 현실이었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일은 없었다.
자신만 계속 지나간 인연에 미련을 갖고 있었을 따름이다. 쓰게 웃은 그녀가 말했다.
”초대장에 답신을 써야겠어요.”
“그, 그래? 뭐라고?”
“초대에 감사하며, 신년 무도회에 참석한다고요.”
자작 부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계 속 집에 틀어박혀 있는 딸아이가 걱정스러웠던 차였다.
그런 자작 부인을 바라보며 이엘리는 마음이 아팠다. 못난 딸 때문에 부모님께서 마음고생을 했다.
“뭐, 오래 쉬었으니까요.”
“그래, 우리 딸. 드레스라도 새로 맞출까? 응? 어때?”
“아네요, 괜찮아요. 우리 집 살림에 무슨 새 드레스예요?”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의 얼굴에 오랜만에 미소가 번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처음 데뷔탕트를 치르는 아가씨도 아닌걸요.”
“하지만.”
“드레스를 고쳐 입어도 되니까요.”
연회용 드레스 한 벌을 맞추는 비 용은 상당하다. 비싼 옷감과 고급 실, 가끔 보석까지 사용해 맞추니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결혼으로 빚은 변제했지만, 블랑쳇 영지는 평범한 시골 영지였다.
‘고만고만한 시골 영주의 살림으로 새 드레스를 맞추는 건, 역시 좀.’
영지의 생활수준을 아는데 값비싼 드레스를 맞추는 건 좀 불편하다. 그때 자작 부인이 말했다.
“그래도 신년 무도회 전에 드레스 라도 한번 살펴보는 게 좋지 않을 까?”
“아, 그럴까요?”
“그럼, 수선해 입는 건 그렇다 치 더라도 무슨 드레스가 있는지부터 알아야지.”
맞는 말이었다. 드레스를 수선하는 데도 시간이 꽤 드니까. 두 모녀는 재잘재잘 떠들며 이엘리의 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드레스를 보관한 옷장을 열자, 화려한 의상이 눈을 간지럽힌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