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화
“전 저희가 그런 결말을 맞게 될 거라고 지레 겁먹어서…… 자카리를 피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엔.’
그렇게 말하는 이엘리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용기에 충만해 있는 그의 아 가씨. 자카리는 그런 그녀를 사랑했다. 너무 사랑해서 그 자신과 맞바꿔도 될 만큼.
“저는 자카리가 소중해요. 그 무엇 보다도 더.”
맞아. 나도 세상 전체와 견주어도 네가 훨씬 더 소중해. 자카리는 느릿하게 눈썹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내 욕심은 여기서 멈추는 게 옳지 않을까. 괴로워하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해. 지금껏 그녀는 과분한 애정을 그에게 나눠 주었다. 그 온기를 잃고 싶지 않아서 발악했었다. 하지만 난……
“자카리, 뭐라고 말 좀 해 봐! 정말로 공작님의 명령을 받아들일 거야!?”
그때 이엘리는 절박한 표정으로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자카리는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본다.
”……”
“자카리?”
그때 자카리가 이엘리의 손을 더듬어 붙들었다. 자카리의 손끝은 얼음 장처럼 차가웠다. 이엘리는 퍼뜩 놀라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새파란 눈동자는 감정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때문에 네가 다칠지도 몰라.”
이엘리는 바짝 날을 세웠다. 흰 밀 람으로 빚은 초췌한 인형처럼 그의 낯은 파리하기만했다.
“계속 생각했었어. 너를 내 곁에 붙잡아 두는 건 내 욕심이라고.”
“너, 네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자카리는 쓰게 웃었다. 지금만큼 마음이 명료했던 때가 없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어.”
“자카리.”
“앓아누워 있던 네 곁에 앉아 서…… 계속 그런 생각을 했었어.”
깜깜한 밤. 가늘게 숨을 몰아쉬는 창백한 얼굴의 이엘리.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만약 황제를 공격 했던 그 힘이 이엘리를 공격했다면, 난 막을 수 있었겠느냐고. 답은 나 오지 않았다.
“이쯤에서 관계를 정리하는 편이 너에게 훨씬 더 안전할 거라고.”
이엘리는 입술만을 달싹였다. 워낙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어버린 탓이다. 그는 말을 이었다.
“네 다정함에 기대서, 네 곁에 있어도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믿으려 했지만……”
“잠깐만, 그게 무슨……”
“난 이미 다시 한 번 폭주하고 말았어. 이게 현실이야.”
자카리는 마주 잡은 손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우아한 맹수처럼 군림 하던 그녀의 남편은 지금, 온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서글픈 낯빛 이 되어있었다. 자카리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이혼하자.”
“뭐라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에 이엘리는 멍하니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이 후 와락 언성을 높인다.
“내가 싫다고……!”
“어쩔 수 없어.”
“세상에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어디 있어!?”
기가 막힌 이엘리가 외쳤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자카리의 얼굴은 빙 해처럼 고요하기만했다.
“너.”
”……”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덜컥 심장이 떨어졌다. 자카리는 희미하게 미 소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너의 안전과 행복.”
“그게 아니야, 너……”
“아버지께서 왜 저렇게 말씀하시는 지 난 이해해. 이건 타협할 수 없는 문제니까.”
“너 정말!”
그 순간 자카리가 이엘리의 손을 놓았다. 차가운 손끝이 떨어지는 감각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어, 이엔."
”……”
“아버지. 명을 따르겠습니다.”
참담한 낯을 한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것으로 대화는 모두 끝났다.
칼로 베어 낸 것 같은 침묵. 자카리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입술을 깨문 채로 이엘리는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자카리는 성큼성큼 앞서 걷고 있었다. 온몸 전체로, 명백히 대화를 거
부하는 모양새였다. 그 뒤를 따르며 이엘리는 황망함을 느꼈다. 단 한 번도 그녀를 앞서 걷던 적이 없던 자카리였다.
‘언제나 나와 보폭을 맞춰서 걸어 줬는데.’
지금의 자카리에겐 그런 상냥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종종걸음을 치던 이엘리가 그를 불렀다.
“자카리, 얘기 좀 해.”
그 말을 들은 자카리가 걸음을 멈췄이다. 힐끗 뒤를 돌아보는 새파란 시선. 지나치게 고요하다.
“그래, 이야기는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그 말에 이엘리는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도대체 무엇을 마무리 짓는 다는 소리야? 우리의 관계를? 이렇게 쉽게? 내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정말 이대로 헤어지는 거야? 난 싫어, 그러니까...!”
“나도 널 보내기 싫어!”
그때 자카리가 그녀에게 외쳤다. 상처 입은 맹수처럼 그르렁거리는 목소리. 그녀는 멈칫했다.
“나라고 너와 헤어지고 싶을 리 없잖아, 네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헤어지지 않으면 되잖아?”
“그건 안 돼. 네가 나 때문에 다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잔뜩 쉰 목소리가 홀러나왔다. 이엘리는 어떻게든 자카리를 설득하기 위해 조심스레 말한다.
“왜 다칠 거라고만 생각해?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 가능성 하나만을 믿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존재 옆에 널 머무르게 두라고?”
”……”
이렇게 대화해선 설득이 불가능할 것 같다. 숨을 삼킨 이엘리는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도 우리가 이혼하기를 바라고 있었어. 이건 그 의도대로 놀아나는 거야……!”
“알고 있어.”
하지만 자카리는 여전히 냉정한 낯이다. 이미 그런 부분까지는 모두 생각해 뒀기 때문이었다.
“아까 말했잖아, 제일 중요한 건 네 안전이라고.”
“자카리.”
“어떻게든 네 안전은 보장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마.”
그녀와 이혼하는 것과 그녀를 보호하는 문제는 별개였다. 애초에 그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이혼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자카리는 황가에 압력을 넣어서 그녀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비록 너와 이혼한다고 해도, 우리 가문은 계속 널 지킬 거야.”
“바보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답답해진 이엘리는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자카리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일이 이렇게 됐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카리.”
“오직 너만을 사랑하고 지켜 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을 새로 만나게 될 거야.”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다 고. 난 너만 있으면 되는데.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엘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자카리가 더 아프다는 것을 알아서.
“……그럼 그때는 널 놓아줄게.”
자카리는 쓰게 웃었다. 자카리가 이렇게 단호했던 적 있던가. 이엘리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 나는……”
“미안,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아.”
자카리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이엘리가 가장 중요하니까. 용기가 없어 발을 내딛지 못했는데, 공작이 등을 떠밀어 준 것뿐이었다.
이엘리의 표정이 수많은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자카리.”
그를 보는 연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있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던 그는 손을 거두었다.
‘더 이상 네 온기를 독점할 수 없다는 건 슬프지만.’
이번에 다시 한 번 폭주를 경험하 면서 알게 되었다.
이엘리는 자신의 곁이 아닌, 안전 한 곳에 머물러야했다. 자신의 어머니처럼 그녀를 떠나보낼 수는 없다. 자카리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떠나는 날까지 이엘리는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메리는 계속 이엘리의 곁을 지켜 주었다.
“주인님과 작은 주인님도 너무하시지, 어떻게 아가씨께 이러세요……”
“아냐, 메리.”
메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는 그새 살이 꽤 빠졌다.
아무래도 마음고생을 하고 있기 때 문이겠지. 그녀를 보며 이엘리는 애써 미소 지었다.
“날 위해서 그러시는 거라는 것을 아니까, 괜찮아.”
손목이 뼈가 드러나게 가늘다. 이엘리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메리가 질문을 던졌다.
“간식이라도 드실래요?”
“아냐, 됐어. 입맛이 없어.”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메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공작, 그리고 자카리와 언성을 높인 이래로 이엘리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엘리가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나, 이제 아가씨도 긴 여행을 하셔야 할 텐데.’
이혼 서류가 수리되는 대로 이엘리는 고향인 블랑쳇 자작가의 영지로 내려가기로했다.
블랑쳇 영지는 남부에 위치한 작은 시골 영지로써, 북부의 헤센바이츠 공작령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입맛이 없다고 하셔도 조금이라도 드셔야 해요. 건강을 챙기셔야죠.”
“정말로 괜찮대도.”
“실은 다들 아가씨를 걱정하고 있거든요. 주방에서도 음식을 보내왔어요.”
메리는 단호한 얼굴로 트롤리를 끌어왔다. 차마 메리를 말릴 기력도 남지 않아, 이엘리는 트롤리 위에 바리바리 쌓인 그릇들을 내려다보기 만했다. 메리가 음식을 덮은 뚜껑 들을 열었다.
“일부러 부드러운 음식을 골라 조 리했다고 들었어요.”
“최대한 아가씨의 입맛을 맞췄으니까, 한술이라도 떠 보세요. 네?”
”……”
이엘리의 눈에 눈물이 글썽 고였다. 보드라운 흰 빵과 고소한 수프, 달콤한 푸딩까지. 모두 그녀의 입맛을 고려했으면서도 소화가 잘 되는 음식들이었다. 메리가 억지로 스푼을 쥐여 준다.
“얼른요.”
이엘리는 수프를 한 스푼 떴다. 억 지로 한입 밀어 넣자 고소한 맛이 혀끝에 맴돈다. 음식이 위장에 들어 가자 자연히 생각이 자카리에게 흘렸다. 식사는 거르지 않고 잘하고 있는 걸까.
”……윽.”
이엘리는 스푼을 꽉 쥔 채 조그맣게 신음을 흘렸다. 한 번이라도 자카리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자카리, 이 나쁜 자식……”
”……아가씨.”
메리가 안타까이 이엘리를 불렀다.
이엘리는 침대 위에 주저앉은 채 있는 힘껏 이불을 그러쥐었다. 숨을 죽이고는 툭툭 눈물을 떨어뜨린다. 그녀가 흐느끼면서 속삭였다.
“보고 싶어.”
“아가씨, 울지 마세요……”
“이제 나 떠나는데, 어떻게 얼굴도 한번 안 보여 줘?”
자카리의 얼굴을 본 것도 공작이 이혼을 명령한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어떻게든 대화를 하기 위해 몇 번이고 자카리의 방으로 찾아가곤 했지만, 자카리는 완고하게 이엘리를 피해 버렸다.
“자카리, 보고 싶단 말이야……”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보여 준 적 없던 매몰참이었다. 떨어지는 눈물 이 수프와 뒤섞여 번졌다.
자카리의 방문은 무겁게 닫혀 있었다. 이엘리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노크 소리만이 주변을 울릴 뿐, 사위는 고요하기만했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문고리를 쥐었다.
‘평소라면 이 문을 여는 데 망설임 따위 없었을 텐데.’
이엘리는 쓰게 웃었다. 오늘은 그녀가 떠나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얼굴조차 보여 주지 않다니, 이럴 때 만 이렇게 고집이 셀 필요가 있나. 목을 가다듬은 이엘리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자카리."
”……”
“있잖아,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고요한 공기가 목을 짓누르는 것 같다. 이엘리는 애써 밝게 말했다.
“나, 기다릴 거야.”
”……”
“계속 기다릴 테니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목소리 끝이 제멋대로 이지러졌다. 하지만 초라하게 우는 모습 따위, 자카리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다. 이엘리는 손을 들어 슥슥 눈가를 닦아 냈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알았지?”
자카리가 눈앞에 있지도 않은데도 이엘리는 있는 힘껏 미소 지었고, 허리를 곧게 세우고 몸을 돌린다. 타박타박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방문에 기대앉아 있던 자카리가 그 제야 속삭였다.
“이엘리."
자카리가 억지로 밀어냈었던 그녀의 이름. 지금 이 순간조차도 사무 치게 그리운 그녀의 이름.
“이엘, 리.”
그에게 처음으로 온기를 나눠 준 그녀. 그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고, 옳은 길을 알려 주었던 그녀. 빛이 되어 주었던 그녀. 그녀가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잡을 자격도 없다.
“이, 이엘리……”
울음이 뒤섞였다. 자카리는 끅끅 숨을 삼키며 손으로 얼굴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녀를 봐서는 안 된다. 지금도 간신히 붙들어 둔 이성이다. 그녀를 보는 순간 엉망으로 헝클어질 것을 안다.
‘너를 만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