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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73/196)

73화

‘황녀 전하께서 황제가 되신다면 이 제국에도 좀 더 좋을 텐데.’

뭐, 이런 생각 따위 해 봤자 소용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이엘리는 자카리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는 그녀의 품에서 사르르 눈을 감았다.

역시, 이엘리 없이 사는 건 불가능 할 것 같았다.

‘뭐, 자카리도 이제는 좀 진정된 것 같으니까.’

이엘리는 한숨을 섞어 웃었다. 그녀의 귀여운 남편은 멘탈이 유리에 가까워서, 잘 보듬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일이 잘 끝난 것 같아서 다행이다, 당시의 이엘리는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쉽게 해결될 거라는 건 착각이었다. 강한 후폭풍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곧장 공작령으로 내려갔다. 공작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대중들에게는 기이한 기상이변 정도로 인식됐었지 만, 당연히 공작은 이 일의 진상을 알고 있었다.

“이야기는 모두 들었다.”

도착하자마자 공작의 집무실에 불려온 두 사람을 앞에 두고, 공작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카리."

“예.”

“무려 황성에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폭주했다지.”

공작의 차가운 눈동자가 자카리를 빤히 쏘아보았다. 그 질책을 들으며 자카리는 고개를 무겁게 떨어뜨릴 뿐이었다. 이엘리가 발끈하여 공작을 바라본 것과 반대였다. 공작이 말을 잇는다.

“한심하구나. 난 네가 소공작으로서 제대로 된 처신을 할 거라 기대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사죄하는 자카리를 곁눈질하던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아니잖아. 공작에게 항변한다.

“그건 자카리의 탓이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

“이엘리.”

공작의 써늘한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공작은 비스듬히 고개를 꺽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내가 그깟 사실을 모르고 자카리를 질책한다고 생각하느냐?”

이엘리는 헛숨을 삼켰다.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고, 태도 또한 상당히 유해졌던 공작이었다. 공작이 저렇게 냉정한 얼굴을 한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공작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황제가 그렇게 행동할 것을 예상치 못한 것도 아니었다.”

공작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미간에 깊은 골이 잡힌다. 그대로 공작은 조그맣게 빈정거렸다.

“황제의 속이야 언제나 뻔하지.”

공작의 목소리는 무척 신경질적이었다. 자카리는 공작의 질책을 묵묵 히 귀담아듣고 있었다.

“헤센바이츠에게 어떻게든 흠집을 내고, 제 수족을 밀어 넣으려 해. 모두 예상하던 일이다.”

“……죄송합니다.”

“그런데도 황제에게 이런 식으로 빌미를 줘?”

새파란 눈동자가 자카리를 쏘아본 다. 어찌나 기세가 날카로운지, 이엘리도 살짝 움츠러들었다.

“자카리. 네놈이 이토록 머저리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

“네가 가장 소중하게 지키고, 곁에 두고 떨어지지 말았어야 할 사람은 바로 네 아내였다.”

냉랭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 말에 자카리는 커다란 얼음덩이를 삼킨 양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런데 이엘리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황제와 그 아이를 단둘이 놓아두다니.”

자카리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물었다. 물론 항변하려면 할 수는 있었다. 제도의 귀족들과 친밀감을 쌓아 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바로 이엘리였으니까. 하지만 공작의 분노는 정당했다.

‘내가 좀 더 조심했어야 했어.’

황궁에서 빠져나온 후 침상에 누워 있던 이엘리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이엘리와 함께 공작령에 돌아오면 서. 일부러 제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까르르 웃던 그녀를 보며 내내 생각했었다.

‘내 잘못이야.’

그녀의 미소를 볼 때마다 죄책감은 더욱 깊어졌다. 공작은 그 부분을 정확히 짚어 낸 것이다.

“하지만 공작님, 저와 자카리 모두 이런 일이 터질 줄 몰랐어요.”

“이엘리.”

“그리고 제도의 귀족들은 제가 만 나 보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

듣다 못한 이엘리가 끼어들었다. 공작은 시선을 내려 그녀를 마주 본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네 의견이 일부 포함되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 공작님.”

“……결국 선택하는 건 자카리 아니었던가?”

그 말에 이엘리는 말문이 막혔다. 이게 아닌데. 그녀는 자카리를 힐끗 곁눈질했다. 그는 이제 죄스러움에 못 이겨 숨조차 죽이고 있었다. 공작은 분노를 꾹꾹 누르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혼인을 지속하면 가장 피해를 볼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내가 괜찮지 않아.”

공작은 물끄러미 이엘리를 눈 안에 담았다. 색유리처럼 투명하며 무기 질적인 눈동자. 그 안쪽에 스며들어 있은 수많은 감정들. 하지만 공작은 이미, 제 감정을 감추는 데에는 이 골이 났다.

“그리고 자카리 또한 괜찮지 않겠지.”

“잠깐만요, 그건……!”

“적어도 지금, 자카리는 자신의 가족을 가질 만한 능력이 못 된다.”

그 말을 들은 자카리와 이엘리는 나란히 굳어 버렸다. 공작은 무표정 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내를 지키지 못한 건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아내를 앞에 둔 채 폭주해 버렸지.”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어요, 그건!”

“생명에 관한 일이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여기서는 성립되지 않아.”

공작은 팔짱을 끼며 두 사람을 돌아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엘리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자카리 때문에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

”……”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공작은 칼처럼 단호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향 해 명을 내렸다.

“그러니, 이혼하거라.”

순간 세상이 멈추는 것 같은 느낌 이 들었다. 이엘리는 처음으로 공작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싫습니다!”

그 말을 듣던 공작의 눈동자 위로 바짝 날이 섰다. 공작 또한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고집부릴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내 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나!?”

그 말에 이엘리는 덜컥 멈추었다. 지금의 공작은 반쯤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평소 차분하며 우아했 던 공작이 아니었다. 공작은 허리를 시선을 반쯤 내린 채 이엘리에게 쏘아붙였다.

“자카리 때문에 이미 난 아델을 잃었어!”

”……”

그 말에 이엘리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누군가가 입을 틀어막은 기분이다. 공작이 외쳤다.

“그런데 아델을 닮은 널, 딸처럼 생각하는 너를…… 또 잃으란 말이냐?!”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공작은 다시 한 번 언성을 높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니? 이엘리는 공작을 마주 보았다.

“어떻게든 잘될 거라고 믿었어, 언젠가는 아델도 마음을 열어 줄 거라 믿었어!”

“공작님, 그 말씀은……”

“나도, 나도!”

공작은 잠시 말을 멈췄다. 끓어오 르는 감정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태우고 있었다. 공작은 애써 침착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공작은 이마를 짚었다. 그늘진 그 얼굴은 지독하게 피로해 보였다.

“세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단 말이다.”

“그, 그건.”

“아델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그때,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자카리임을 알았을 때.”

공작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한껏 약해진 몸이다. 이런 격렬한 흥분은 독에 가깝다.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아나?”

”……”

“이미 한번 경험해 봤는데, 어째서 위험을 다시 한 번 감수해야 하지?”

공작의 질문이 날카롭게 폐부를 찔렸다. 공작님, 설마 나와 전대 공작부인을 겹쳐 보고 계셨던 건가. 공작은 거칠어진 숨을 애써 가다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엘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자카리는 이미 네 앞에서 두 번이나 폭주했어. 이 의미를 모르겠나?”

이엘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카리의 폭주’가 공작에게 어떤 의미인 지 이제 알 것만 같아서.

“과거, 너희가 내 허락 없이 아샤 축제에 멋대로 참석했던 그날.”

“공작님.”

“그때는 어렸으니 참았다. 앞으로는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 그리 믿었어.”

공작은 지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공작은 자카리에게 크나큰 실망감을 품고 있었다. 자카리의 폭주는, 공작이 가졌던 ‘행복한 가정’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짓밟는 행위에 가까웠으니까.

“제힘을 제대로 조절하지도 못하는 데 근신이라니. 참으로 관대했지.”

공작이 짧은 조소를 흘렸다. 피곤 한 낯을 천천히 들어 올린 공작이 이엘리를 곧게 응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넌 네가 처한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워.”

예전이라면 이렇게 이엘리를 설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샤 축제에서 한 번 폭주했을 때, 저 애의 안전을 생각했더라면 처음부터 이혼 시켜야했다. 하지만 공작이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그때는 저 아이가 소중하지 않았으니까.’

죽어도 상관없다 생각했다. 헤센바이츠의 후계를 이으려면 어쨌든 자카리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 빚 때 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 생활을 지속해야 하는 저 애는 아들에게 안성 맞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마치 가늘게 쏟아지는 봄비처럼, 천천히 저 아이를 향한 애정에 젖어 들었다. 아델을 꼭 닮은 소녀가 저에게 웃는다. 어느새 딸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자카리와 이엘리가 행복 하길 바랐다.

‘그럼에도……’

자카리 때문에 이엘리가 죽게 된다면, 영영 그 미소를 볼 수 없다면. 이제 그런 건 아무런 소용도 없지 않나. 이미 아델라이데도 떠나보냈다. 그건 싫다. 공작은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넌 그저, 자카리 때문에 네가 죽을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은 것뿐이지 않느냐.”

“그런 게 아니예요. 저는……”

“처음 네가 왔던 날, 식사 자리에서 말했지. 너희의 결혼 생활을 지 켜보겠다고.”

그 말에 이엘리는 입을 다물었다. 공작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갓 성년 이 된 두 사람을 보았다.

“겨울의 마법을 가진 자들은 폭주 할 때 이성을 잃는다. 피아를 가리 지 못하고 공격하게 돼.”

“하지만 자카리는 제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던 적이 없어요.”

“이번에 운이 좋았을 뿐이야. 하지만 ‘다음’은 이제 없을지도 모른다.”

다음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자카리는 멍하니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이 하는 말 은 구구절절 옳았다. 비록 본의가 아닐지라도, 그는 이엘리를 다치게 할 수 있었다.

‘이엘리가 과연 내 곁에서 안전할 수 있을까?’

자카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가 어금니를 꽉 앙다물었다.

‘난 이엔 없이 살 수 없어. 하지만……’

……이엘리를 내 곁에 붙여 두는 건 내 이기심일지도 몰라. 그 사실이 사무치게 와닿았다.

자카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널, 내 새장 안에 가둬 두는 것은 아닐까.

‘나는.’

공작가와 황가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건 상관없다. 그녀가 사라지는 것만큼 그를 괴롭게 하는 건 없 으니까.

이엘리를 곁에 둘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을 적으로 돌려도 괜찮았다. 하지만.

‘내 곁에 이엔이 남아 있음으로써 그녀가 고통받게 된다면……’

널 보내 주는 게, 너에겐 더 행복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오래된 의문이 그의 마음을 뒤덮었다.

‘내 어머니처럼 언젠가…… 네가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어.’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문득 눈앞에 떠올랐다. 광기와 공포, 지독한 피로함에 짓눌려 있던 자카리의 어머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더 즐거워 보였던 어머니. 미칠 것 같았다.

‘그것도 나 때문에.’

이엘리가 그런 모습이 된다니. 숨이막혀 왔다. 누군가가 있는 힘껏 목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공작님. 이런 말씀을 드리 게 되어 정말 죄송해요.”

그때 이엘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흔들리지 않는 연녹색 시선이 공작을 똑바로 담는다.

“하지만 전 아델라이데님이 아니예요.”

”……”

“공작님께서 아델라이데님을 무척 사랑하셨기에, 저희를 걱정하시는 건 이해하지만.”

공작은 말없이 이엘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 마신 후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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