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96)

72 화

‘……그나마 기상이변으로만 생각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녀는 푹 한숨을 쉬었다. 북부와는 다르게 남부는 공작가와 황가가 가진 힘을 전설로 치부하는 분위기였다. 북부 사람들은 자카리의 힘을 피부로 느끼곤 했지만, 남부는 그러 지 않았으니.

‘그리고 황가가 드물게 물려받는 아샤의 축복도 이런 종류의 힘은 아니니까.. 그런데.’

이엘리는 잔뜩 미간을 구겼다. 신 문을 탁 소리 나게 접어 내려놓으면 서, 그녀는 팔짱을 꼈다.

‘그건 그렇고 자카리 앤, 내가 앓아누웠는데 코빼기도 안 보여?’

이엘리가 정신을 차린 후로 자카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듣자 하니 그녀가 앓는 내내 곁에 붙어있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정신 이 들자마자 계속 그녀를 피하는지 모를 일이다.

“아직 일어나시면 안 돼요, 레이디.”

”……”

숄을 끌어당기며 몸을 일으키는 이엘리를 하녀가 만류했다.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치떴다.

“그렇다면 당장 자카리한테 가서 전해.”

근 한 달간 얼굴을 보다가 말까지 트게 된 하녀는 난처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병석에 누워 있는 아내가 직접 남편을 찾아가야겠느냐고.”

“그, 그건.”

“아픈 몸을 이끌고 집무실이며 연무장을 헤매게 할 거냐고 물어보도록 해.”

이엘리는 기웃이 고개를 기울이며 하녀를 보았다. 그리고 심술궂은 표정이 된 채 하녀에게 선언한다.

“딱 30분만 기다리고, 그 이후엔 직접 찾아갈 거야.”

“말씀 전하겠습니다, 레이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하녀가 문을 빠져나갔다. 이엘리는 뚱한 얼굴이 되어 자카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꼭 30분 후. 비 맞은 강아 지처럼 축 처진 자카리가 방문을 빠 끔 열고 들여다본다.

“이엘리, 날 찾았다기에……”

“그래, 당연히 찾았지.”

이엘리의 단호한 대답에 자카리가 움찔했다. 이엘리는 손을 흔들어 자카리를 불렀다. 주춤주춤 방에 들어 온 자카리가 죄인처럼 그 자리에  섰다. 이엘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열었다.

“아내가 앓아누워 있는데 남편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자카리가 목을 안쪽으로 움츠렸다. 그런 자카리를 노려보던 이엘리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얼굴 한번 볼 수 있을까 해서 목 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와서 한다는 말이, 뭐?”

”……”

“날 찾았다기에, 라고? 얘가 정말!”

이엘리는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할 수만 있다면 자카리의 목을 쥐고 짤짤 흔들어 대고 싶다.

“찾는 게 당연하지! 넌 내 남편이 잖아!”

“그래도……”

“뭐가 그래도, 야?!”

이엘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질책을 들은 자카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가 눈치를 살피며 말한다.

“미안해서.”

“……뭐?”

뜬금없는 답에 그녀는 어리둥절한 낯을 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지르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널 찾아올 수가 없었어.”

생각이 어디까지 흐르면 저런 답이 나오지? 이엘리는 멍하니 자카리를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저기, 내 문병을 오지 않는 게 더 미안한 일이라는 것을 정말 몰라서 그래?”

“그런 문제가 아니야. 이건……”

자카리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당겨 물었다. 이 죄책감을 어떻게 설명해 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넌 나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 이나 다름없잖아.”

막막한 기분이었다. 이엘리를 곁에 두고 평생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 고 맹세했는데, 오히려 자신 때문에 그녀가 괴로운 일을 겪게 되는 기분이었다.

“만약에 내가 너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네가 황제의 눈에 될 일도 없었겠지.”

”……”

“이런 불쾌한 일은 겪을 필요도 없었을 거야. 그리고 이번 일도……”

이엘리는 대답 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크게 숨을 몰아쉰 자카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이번에도 폭주하고 말았어.”

“자카리.”

“우리 어렸을 때 생각나? 내가 아샤 축제에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폭주했던 때.”

물론 기억하지.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그녀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여 보였다. 자카리가 말했다.

“그때 이후로 절대로 널 다치게 할 일은 만들지 않을 거라 다짐했어.”

“실제로 난 다치지 않았는걸. 그리고 내게 약을 먹인 건 네가 아니라 황제니까……”

“알아.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

자카리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그 얼굴이 너무 불안정해 보인다.

“만약에 내 힘이 멋대로 뻗어 나가 너를 공격했다면?”

“자카리.”

“이번에 봤지? 옛날보다도 내 힘은 더 강해졌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자카리는 가만히 양손을 들어을려 내려다보았다. 공포에 질려 양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지금은 괜찮지만, 황제 그 자식은 그냥 그대로 죽여 버렸으면 싶었지만……”

진득한 분노와 두려움이 엉겨 있는 목소리. 낮게 그르렁거리는 목소리 로 이엘리에게 묻는다.

“……그 마음 때문에 내 힘을 조절 하지 못하고, 그 자식을 넘어 너까지 공격했다면?”

“그렇지 않아, 넌……!”

“나, 지금의 이성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자카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세상 모든 것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그 표정은 망연하기만 하다.

“지금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했어.”

”……”

“이 힘을 적당한 곳에 사용할 수 있다고, 제어할 수 있다 믿었어.”

자카리는 양손을 꾹 말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아프게 찌른다. 자카리는 쓰게 미소했다.

“모두 내 오만이었지.”

“그건……”

“이번 일로 알았어. 난 아직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 분자라는 것을.”

푸른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이엘리에게 향했다. 이엘리를 담은 그 시선이 아프게 일그러진다.

“내 이 저주스러운 힘 때문에…… 네가 날 미워하게 되면 어쩌지? 네가 날 포기하게 된다면?”

그녀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는 색유리처럼 텅 비어있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마치 내 부모님처럼?”

아니, 잠깐만. 어째 이야기가 이상하게 가네. 듣다 못한 이엘리는 자카리에게 손을 내저었다.

“자카리, 잠시만 기다려 봐. 우선 내 말부터 좀 듣고……”

하지만 자카리는 이엘리의 말을 들을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이엘리가 앓는 내내, 애써 눌러두었던 죄책감과 공포가 자카리를 한껏 짓누르고 있었다. 자카리의 눈동자가 파 르르 떨렸다.

“그런데도 나는 널 포기할 수 없다는 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포기할 필요 없어.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왜냐하면 내가 널 놓아줘야 네가 안전해질 거라는 사실을 아니까.”

그 목소리만큼은 칼로 베어 내는 것처럼 단호했다. 자카리는 처음 걷는 방법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여신을 경애하듯 손을 뻗어서 이엘리의 손을 움켜쥐었다.

“있잖아, 이엔.”

”……”

“네가 없으면 난…… 살아갈 수가 없어.”

자카리는 숨이 턱턱 막혔다. 이엘리가 제 곁에서 사라질 거라는 생각만 해도,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

“네가 날 포기할까 봐, 드디어 날 버릴 마음을 먹게 될까 봐 무서워. 그런데……”

자카리는 그대로 이마를 이엘리의 손에 기댔다.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이엘리의 동정심을 사기 위한 발악이라는 걸 안다. 그녀의 다정함에 기대어 저를 떠나지 않음을 약속 받고 싶었다.

“……날 떠나지 말라고 비는 것 자 체가 내 이기심임을 알아서.”

자카리는 나지막이 숨을 헐떡였다. 어떡하지. 이럴 때마다 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자카리!”

그때 이엘리는 자카리를 외쳐 불렀다. 퍼뜩 잠에서 깬 것처럼 자카리가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지금껏 그런 쓸데없는 문제들을 걱정하느라 날 피했다는 거야?”

시선을 피하는 자카리의 얼굴을 이엘리는 할 말을 잃고 바라봤다. 기 가 막힌 그녀가 언성을 높였다.

“우선 너랑 나랑 이혼할 일은 없어. 왜냐하면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거든.”

“이엔. 하지만……”

무어라 말하려던 자카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자카리에게 파르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째서 내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멋대로 고민하는 거야?”

“그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면, 제일 먼저 내게 말했어야 하는 거잖아!”

자카리는 멍하니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새싹처럼 연연한 연녹색 눈동자는 언제나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본다. 온갖 감정이 복받쳐 올랐는 지, 이엘리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난 널 좋아해.”

솔직한 진심이었다. 자카리는 숨을 멈췄다. 이엘리는 손을 뻗어서 자카리의 뺨을 쓸어내렸다.

“네가 폭주의 위험을 갖고 있든, 괴물의 힘을 운용하든, 뭐든지 상관 없어.”

“이, 이엔.”

“내가 좋아하는 건 그냥 자카리, 너란 말이야.”

이엘리의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확고한 목소리. 그가 머물 곳이 되어 주는 아가씨.

“너를 이루는 모든 총합을 좋아 해.”

“그, 나는……”

“네가 가진 긍정적인 요소, 다정한 성격과 아름다운 외모, 작위, 부. 이런 것뿐만이 아니라.”

이엘리는 살살 어루만지던 자카리의 양쪽 뺨을 콱 꼬집었다. 아얏. 그가 얕은 신음을 흘렸다.

“네가 가진 힘과 서투름, 어설픔. 그 모든 것이 좋은 거야.”

”……”

“왜냐하면 그런 모든 것이 모여,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카리가 되는 거니까.”

자카리는 어린 짐승처럼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이엘리는 와락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그런 내가 어떻게 널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 그게 더 화 가 나!”

그 말에 자카리는 얼떨떨한 얼굴이 되어 두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화내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하는 말도 하나하나 다 어이가 없지만, 그래도 좀 반박해 보자면.”

이엘리는 자카리를 샐쭉하게 노려 보았다. 그 눈빛에 머쓱해진 자카리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오히려 너랑 내가 결혼하도록 압력을 넣은 쪽이 황가였거든?”

”이엔.”

“그쪽이 우리를 휘두르려 드는 것 도 화가 나는데, 너까지 거기에 휘 말리면 어떡해?” 

”……”

자카리는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막막한 순간 마다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주고 길을 제시해 주는 그녀.

자카리는 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인상을 썼다.

“으이구, 내가 못 살아.”

”……”

“이리 와, 

이엘리는 양팔을 활짝 벌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자카리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마주 포옹했다.

“앞으로는 뭐든지 내게 먼저 물어 보는 거야. 알았지?”

자카리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리는 나지막한 웃음 소리를 냈다. 자카리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리는 조그마한 손. 그 온기 하나가 이토록 위안이 된다. 코끝이 찡하다.

“그건 그렇고, 내가 거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찾아왔던 거야?”

“황녀 전하께서 알려 주셨어.”

“그렇구나. 황녀 전하께서……”

눈을 동그랗게 뜬 이엘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곳에서도 황녀의 판단력은 빛을 발한다.

“황제, 그 자식이 네게 아샤의 축복을 사용할까 봐 걱정하시더라고.”

“맞아. 예전에도 황녀 전하께서 날 걱정해 주셨던 적이 있어.”

자카리의 성인식 때, 사냥회에서 황녀가 ‘조심하라’고 말해 주었다. 자카리는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역시 좀 이상해.”

“뭐가?”

“황제가 널 대하는 태도를 봤을 때, 아샤의 축복을 사용하지 않을 리 없는데.”

자카리는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그런 자카리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엘리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황제 폐하가 내게 그런 말을 했었어.”

“무슨 말?”

“내가 이해가 잘 안 간다고.”

이엘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아샤꽃이 핀 정원. 황제는 이엘리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었다.

“왜 이렇게 멀쩡하냐면서, 내가 마치 환각이라도 보아야 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더라고.”

“그래?”

그렇게 되묻던 자카리는 고민에 빠진 얼굴을 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신중하게 입을 연다.

“그렇다면 아마도…… 네게는 아샤의 축복이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아.”

“그래? 다행한 일이네, 그렇지 않아?”

“물론 그렇지. 뭐, 드물게 아샤의 축복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긴 한데.”

그런 사람은 헤센바이츠의 일원뿐 일 텐데. 자카리는 미묘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엘리가 아샤의 축복에서 자유롭다면, 그 또한 다행한 일이다. 한편 이엘리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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