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화
이엘리에 대한 의심이라고는 한 조 각도 없는 그 시선.
‘젠장. 이건……’
황제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자카리가 보여 주는 지금 감정 은 그저, 순수한 분노였다.
“우선 이엔에게서 손을 떼시지요.”
자카리는 손끝을 까닥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광풍이 불어왔다. 황제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 바람이 어찌나 강한지 황제를 뒤로 밀쳐 내고도 남을 정도였다. 황제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형편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자카리는 그대로 다급하게 이엘리에게 달려갔다. 의자 위에 늘어져 있는 이엘리는 다행스럽게도 다치지
는 않은 것 같았다. 자카리는 절박 하게 소곤거렸다.
“이엔, 이엔!”
이엘리의 목을 받치고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긴 숨이 토해져 나온다. 흐릿한 연녹색 눈동자가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적어도 정신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자카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다행이야, 정말……”
‘나, 괜찮은데.’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은데, 그래서 자카리를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싶은데. 망할 몸은 제대로 움직여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입술만이라도 달싹여 보려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조금만 기다려, 이엔.”
‘응?’
“이 모욕에 대한 빚만 받아 내고 올게. 알았지?”
찰나 피어올랐던 안도감이 분노로 뒤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분노를 잠재우기보다는 오히려 부채질하는 감정. 널 잃었을지도 몰라. 그 생각 하나만으로 이 분노는 온당하며 정당했다.
‘자카리, 자카리!’
이엘리는 필사적으로 자카리를 잡아 보려 노력했다. 물론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그녀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자카리는 몸을 일으켰다. 이마를 어루만지던 다정한 손길이 멀어졌다.
‘도대체 어쩌려고 저래!’
이엘리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자카리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걸음걸음마다 희게 땅이 얼어붙는다. 온기 없는 그의 시선이 황제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폐하. 다른 건 몰라도 이 빚만큼은 꼭 받아 내야겠습니다.”
자카리가 우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와 동시에. 쾅! 매서운 바람이 폭 발했다. 황제는 경악했다.
주변을 감싼 공기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자카리의 분노에 대기가 함께 공명하고 있는 것이다.
쿠르릉, 그의 감정에 공명하여 공 기가 커다랗게 울었다. 만물이 비명을 내지르며 온몸을 떨었다.
자카리가 한 발자국 더 내디뎠다. 순식간에 숨을 죄어 오는 살기에 황제가 흠칫 어깨를 굳혔다. 목을 조 르는 기운이 황제를 찢어발길 것처럼 날을 세운다. 마치 잘 갈린 칼날처럼 매서웠다.
저 기운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 도, 당장이라도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 같다. 황제는 숨조차 제대로 쉬 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소공작, 이, 이게 무, 무슨 짓입니까!”
황제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자카리는 비스듬히 시선을 기울였다. 온기라고는 한 점도 없는 새 파란 눈동자는, 새파란 검날 같았다. 당장이라도 황제를 반토막으로 베어 낼 것 같았다.
시야에 닿는 온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화사한 봄날 속, 차가운 겨울이 구석구석 파고든다.
맑은 하늘 위로 차고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쏟아지는 눈과 뒤섞여, 만물을 찢어 삼킬 것 같은 눈 보라로 변모한다. 폐부를 채우는 공 기가 찌르는 것처럼 냉랭하다.
“서, 설마 소공작께서…… 이 이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겁니까?”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된 황제가 자카리에게 물었다. 자카리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소, 소공작!”
순간, 공포로 인해 황제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수없이 많은 얼음 조각들이 자카리의 곁에 떠오
른 것이다. 날카롭게 갈아 낸 창날 같은 얼음들은 모두 황제를 똑바로 겨누고 있다.
황제는 직감했다. 자카리는 지금 진심이었다. 그는 명백히 황제를 살 해할 의도를 가지고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빚을 갚는 김에 하나 더 말씀드리 자면.”
자카리는 비스듬히 그 자리에 선 채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두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제 앞에서.”
자카리의 입술 사이로 짓눌린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새파란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이 엔을……”
공포에 질린 황제는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했다. 마른 입술만을 그에게 작게 달싹일 뿐이다.
“……모욕하지 마십시오.”
차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황제를 똑 바로 바라보았다. 얼음들이 허공에서 순식간에 대형을 잡고 황제를 노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마른침을 삼켰다. 소공작이 손가락만 떤는다면, 당장에…….
‘난 죽을 수도 있어.’
빙하 같은 눈동자는 황제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느낀 죽음의 공포는, 목 뒤에 검을 드리 운 것처럼 선명하고 차가웠다. 황제는 자리에 주저앉아서 온몸을 부들 부들 떨기 시작했다.
“모두 폐하께서 제 아내를 노리고 준비해 둔 흉계인 것을……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저자를 죽여. 자카리 안의 괴물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자가 너의 가 장 소중한 여자를 유린하려 했어. 만약 그녀가 상처라도 입었다면, 조 금 더 늦어서 몹쓸 짓을 당하기라도했다면.
‘그랬다면……’
눈동자가 홱 뒤집혔다. 분노만이 남아 온몸에 들끓었다.
당장 저 작자를 죽여, 목숨으로 이엘리가 지금껏 겪어야 했던 일들을 보상받아야했다. 죽여 버려. 괴물이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만약 이엘리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했을 건데?’
온전히 황제를 향하던 힘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눈발은 이제 어찌나 거센지 시야를 하얗 게 가릴 정도였다. 폭풍처럼 밀려드는 힘이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을 억눌렀다.
'역시 죽이는 게 나을 것 같지 않아?’
괴물의 물음에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손가락을 까닥 움직이자 얼 음들이 대형을 갖춘다.
햇빛을 난반사한 얼음 창날들이 싸 늘하게 빛났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황제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이다.
“소공작, 이, 이게 무슨……!”
공포에 질린 채 목소리를 높이던 황제가 헉, 숨을 삼켰다. 그를 쏘아 보는 자카리는 온전히 진심이었던 것이다.
자카리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이성은 새하얗게 휘발된 지 오래였다. 이엘리를 건드리다니, 목숨으로 그 죄를 갚아.
그가 그대로 황제에게 날아들기 직전.
“……리.”
조그만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흠칫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순백의 세상. 겨 울과 얼음으로 짜 맞춰 쌓아 올린 그 세상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나눠 주는 그 목소리.
“자카……”
마치 알에서 깨어나는 어린 날짐승처럼 자카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카리."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이엘리가 몸을 힘겹게 일으키고 있었다. 약물의 효과 때문인지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지 못한다. 자카리는 당장에 이엘리에게 달려갔다. 그가 이엘리를 부축하며 외쳤다.
“이엘리!”
“아, 안 돼.”
이엘리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마구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카리는 어쩔줄 몰라 이엘리를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숨을 할딱이며 자신을 부르는 그 모습이 안쓰럽고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
“그러면, 안, ……”돼,
한편 이엘리는 필사적이었다. 여기서 자카리가 다시 폭주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정말로 제도가 반파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막아야했다. 그녀는 젖 먹던 힘을 다해 그를 붙들었다.
“돌아가자…… 응?”
자카리의 옷깃을 쥔 이엘리의 손가락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자카리는 잇새로 짧은 숨을 내뱉었다. 마음을 불태우던 뜨거운 분노가 점차 가라 앉았다. 세게 눈을 감았다 뜬 그가 대답했다.
“그래.”
“……으응.”
이엘리는 그제야 조금 웃었다. 자카리는 이엘리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그제야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주변을 돌아보는 자카리의 눈동자에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자카리는 속 삭였다.
“미안해…… 이엔.”
폭주 직전까지 갔던 힘은 눈 닿는 모든 곳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서리와 얼음이 온 정원을 뒤덮고, 칼날 같은 바람이 땅을 할퀴었다. 자카리는 입술 안쪽으로 욕설을 씹어 뱉었다.
“……젠장.”
입술을 꽉 깨문 자카리가 이엘리를 다시 추슬러 안았다. 그대로 자카리는 황궁을 빠져나갔다.
“이엔, 이엔. 제발 정신 좀 차려 봐.”
마차에 이엘리를 비스듬히 눕혀 놓은 자카리가 어쩔 줄 모르면서 그녀를 불렀다.
이엘리는 답답함을 느꼈다. 사실 정신은 남아 있는데, 걱정하지 말라 고 말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혹시 황제가 네게 무슨 짓이라도 저질렀어?”
아니, 그렇지 않아. 이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난 괜찮으니까 너무 초조해하지 마. 그러나 자카리의 얼굴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엘리의 이마를 어루만지던 그가 작게 중얼거린다.
“아샤의 축복.”
그의 눈동자가 차게 가라앉았다. 현재 황제는 ‘아샤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사람이었다.
아샤의 축복은 만인을 매혹하는 힘. 헤센바이츠의 혈통은 그 힘에서 자유롭지만 이엘리는 다르다.
‘만약 이엔이 아샤의 축복에 당하기라도 했다면.’
자카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아까 이엘리가 자신을 말리는 모습을 보였으니, 그녀의 이성은 아직 매혹 당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 너, 이상한 힘을 느꼈다거나……”
자카리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이엘리는 있는 힘껏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힘껏했다고 하기엔 아주 미미한 동작이 기는 했지만, 그는 이엘리의 뜻을 금세 알아챘다.
“……다행이다.”
자카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웃는 얼굴을 보니 이엘리도 그제야 안심했다.
아샤의 축복이 얼마나 강력한 힘이기에 저러나.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이엘리는 스르륵 정신을 잃어버렸
다.
자카리는 곧장 타운하우스로 귀환했다. 차기 안주인이 정신을 잃은 채 소공작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보며, 공작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잔뜩 날을 세운 채 소공작은 명령했다.
“당장 의사부터 불러.”
은밀하게 불려 온 의사는 이엘리가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설명해 주었다. 다만 약물 때문에 깊게 잠들어 있은 거라고.
자카리는 한참 동안 의사에게 꼬치 꼬치 캐묻고는, 입단속까지 시킨 후 에야 그를 내보냈다.
“이엔.”
이엘리의 조그마한 몸은 침구에 폭 파묻혀 있었다. 가느다란 손목이며, 얇은 옷자락 너머로 드러난 여린 체 구. 내가 너를 지켜 주지 못했어. 막막한 기분에 자카리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네 곁에 남아 있어도 정말 괜찮은 걸까?”
”……”
잠든 이엘리는 대답이 없었다. 만약 그녀를 잃는다면? 자카리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만약 이번에 내 힘이 잘못 방향을 잡아서, 너를 조금이라도 다치게했다면?”
”……”
“이엔, 나…… 정말로 모르겠어.”
스르륵 손을 내린 자카리가 홀린 듯이 이엘리를 내려다보았다. 아샤꽃을 닮은 그의 아가씨.
“너를 떠난다는 상상 자체가 불가 능해. 하지만 네가 안전해지려면 역시……”
자카리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혀 끝에 알싸한 피 맛이 돈다.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막막함.
“……널 보내 줘야 하는 거겠지?”
”……”
“나, 어떻게 해야 해? 제발 내게 말해 줘…… 응?”
자카리는 나지막이 숨을 헐떡였다. 저 때문에 그녀가 이 모양이 되었다. 그녀의 잠든 얼굴을 보는 게 괴 롭다. 하지만 떠날 수가 없었다. 자카리는 밤을 꼬박 지새우며 이엘리의 곁을 지켰다.
약물의 후유증 때문인지 이엘리는 만 하루를 꼬박 앓은 후 눈을 떴다. 그나마도 이엘리는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
자카리가 이성을 잃고 폭주했을 때, 황제는 겨울의 마법을 온전히 마주하고 말았던 것이다. 혼수상태 에 빠져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어의가 걱정했다 들었다.
‘게다가 이번은 폭주의 규모가 너무 컸어.’
이엘리는 보고 있던 신문을 접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카리가 가진 겨울의 마법은 제도 전체 에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기상이변이라면서 떠들고 있었다.
한창 봄이었던 리펜에 눈이 펑펑 내렸고, 칼바람이 몰아치고 얼음과 서리가 얼어붙는 것까지 관측됐다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