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96)

70 화

“말조심하십시오, 레이디!”

“지금껏 말조심을 하지 않으셨던 분은 폐하이십니다.”

이엘리는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반박했다. 그녀는 낭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게는 언제나 제 남편인 헤센바이츠 소공작, 자카리만이 우선합니다.”

“레이디. 제가 레이디를 아낀다 해 도, 한계가 있음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엘리는 차게 식은 시선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제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니 이제 협박인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신다면,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평행선을 달릴 것 같습니다.”

“예의를 지키십시오!”

“아…… 이대로 앉아 있다간, 폐하를 대하는 예의를 정말로 잊어버릴 것 같군요.”

그녀는 나긋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황제의 얼굴을 한심하다는 양 일별한다.

“그러니 폐하. 저는 이만 일어나도 록 하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먼저 일어납니까!?”

와락 고함을 내지른 황제가 이엘리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어찌나 세 게 움켜쥐었는지 손목이 욱신거리며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이엘리는 잇새 로 신음을 삼켰고, 손목을 확 털어 내며 말했다.

“무엇보다도 폐하.”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고 ...!”

“폐하께서는 절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좋아하시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처음으로 황제는 덜컥 굳었다. 가장 드러내기 싫었던 내밀한 부분을 찔린 기분이었다.

“헤센바이츠 소공작의 부인이기에 빼앗고 싶으신 건 아닌가요?”

이엘리는 말끄러미 황제의 얼굴을 응시했다. 연녹색 눈동자가 너무 맑 아, 불편하게 여겨졌다.

“……마치 전리품처럼?”

그때, 황제가 이엘리의 어깨를 콱 붙들었다. 힘이 얼마나 강한지 그녀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윽...!”

“말씀, 다 하셨습니까?”

회색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기묘한 빛이 아른거리는 시선. 황제는 말을 씹어 뱉었다.

“어떻게 레이디를 향한 제 마음을 그 따위로 매도할 수 있습니까?”

“……이 팔 놓으십시오, 폐하.”

“저도 더는 못 참겠습니다. 어떻게 든 당신을……”

지껄이던 황제의 표정이 순간 허물어졌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당신.”

황제는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눈을 가늘게 치뜬 황제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렇게 멀쩡합니까?”

“……마치 제가 환각이라도 보아야 한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어이가 없어진 그녀가 쏘아붙였다. 황제의 입매가 비틀렸다.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여자입니다.”

“폐하?”

“역시…… 전 당신을 어떻게든 제 여자로 만들고 싶군요.”

그 작은 중얼거림에 이엘리는 얼굴을 구겼다. 황제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내 힘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니…… 처음 보는군.’

자신이 갖고 태어난 ‘아샤의 축복.’ 그 힘은 만인에게 호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이었다. 황실의 영향력을 벗어난 헤센바이츠의 혈통을 제외하 면 그 힘은 만인에게 적용된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아샤의 축복’에 영향을 받지 않았어.’

아샤꽃을 닮은 자그마한 아가씨. 경멸의 기색을 품은 연녹색 눈동자는 홀로 투명할 뿐이다.

“하지만 슬슬 효과가 나타날 텐데요.”

“효과라니요?”

“‘아샤의 축복’은 제외하더라도.”

황제가 느긋한 목소리로 이엘리의 뺨을 어루만졌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약물에는 영향을 받을 것 아닙니까.”

“그, 무슨……!?”

그렇게 외치는 순간 이엘리는 눈앞 이 빙글 도는 것을 느꼈다. 이엘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설마, 차와 다과에 약물을 탄 거야?’

아무리 황제라 한들이 정도로 함 부로 행동할 줄은 몰랐다. 이엘리는 어떻게든 황제를 뿌리치려했다. 하지만 어느새 몸에 힘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를 깨무는 그녀에게 황제가 속삭였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원하는 건 그저 소문일 뿐이니까요.”

‘소문?’

혼미한 머릿속으로도 그녀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황제는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레이디와 저 사이에 은밀한 관계 가 있다는 소문을 만들 생각입니다.”

“그게…… 무…… 슨.”

“귀부인의 명예는 덧없고 아름다운 거죠. 그저 소문만으로도 충분히 손상될 수 있을 만큼.”

소문만으로도 손상될 수 있는 명예라니. 그 순간 이엘리는 황제가 무슨 짓을 하려 하는지 깨달았다. 연녹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황제는 그녀의 뺨을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래도 전 나름대로 레이디를 신 사적으로 대하려 합니다.”

“지금, 뭐…… 라고……”

“아직 레이디가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은 원하지 않으실 것 같으니, 그건 뒤로 미뤄 주지요.”

마치 엄청난 관용을 베풀어 주는 것 같은 말투. 황제는 그녀를 애완 동물 다루듯 끌어안았다.

“솔직히 소문만으로도 대부분의 일은 진행되는 법이죠. 그러니까……”

그의 품 안에서 이엘리는 소름이 돋았다. 황제의 나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에 와 닿았다.

“……이제 곧 모든 사람들은 레이디와 제가 서로를 마음에 품었다고 있다고 믿을 겁니다.”

“이거, 놔……!”

이엘리는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 물론 발버둥을 쳤다는 건 그녀 혼자 만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몸 은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가 이엘리에게 비릿하게 웃었다.

“약 기운이 도시는 것 같군요. 눈 빛이 흐려졌네요.”

“자, 자카리가……!”

“아하, 소공작 말이죠.”

황제는 가볍게 어깨를 으쏙여 보였다. 이엘리는 있는 힘껏 황제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소공작은 지금 이 자리에  없죠."

젠장! 어떻게든 뿌리치고 도망치고 싶은데, 몸이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황제가 눈매를 흰다.

“과연 오늘이 지나고……”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천천히 훑어 내렸다. 황제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소공작이 저와 그대 사이에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믿어 줄 까요?”

황제의 나긋한 질문을 들으면서 이엘리는 당장 저 얼굴을 할퀴어 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회색 눈동자에 스며들어있은 음흉한 기색, 질척한 애정. 그녀의 온몸을 꽁꽁 얽어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그 소름 끼치는 눈빛. 이엘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이엘리.”

내 이름 부르지 마! 이엘리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엘리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올린 황제가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점차 황제의 얼굴이 이엘리에게 가까워졌다. 이엘리의 등골에 식은땀 이 흘렀다.

“남자란 소유욕이 강한 존재랍니다, 레이디.”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황제가 속삭였다. 뜨거운 숨이 와 닿는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입술을 집어 삼키려는 양, 느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쩍쩍 달라붙었다. 이엘리는 진저리를 쳤다.

“……맞습니다. 폐하.”

그때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흠칫한 황제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자카리가 서 있었다. 새파랗게 불타오르는 눈동자가 황제를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 보았다.

“남자란 소유욕이 강한 존재죠."

'자카리!’

이엘리는 입술만을 뻐끔거렸다. 자카리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 가왔다. 그가 남긴 발자국마다 얼음 과 서리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공기가 차가워진다. 폐부를 찌르는 잘 갈린 창날 같은 공기. 쏟아지는 아샤꽃잎 위로도 새하얀 서리가 서렸다.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

‘어떡하지, 자카리.’

자카리와 만난 지 얼마 안 됐던 그때. 아샤 축제에서 폭주했던 그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지금 좀 이성을 잃은 것 같은 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는 자카리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도 그랬었다.

스스로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폭주 했던 자카리는, 나중에 자신이 한 행적 자체로 상처를 받게 됐었으니.

‘……그것만은 막아야 해.’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 하지만 무슨 약을 먹였는지 온몸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가 어렵다.

“소유욕이 강하다는 것을 아시면서 이런 일을 벌이시다니.”

그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파랗게 날이 선 눈동자가 휘우듬하게 휘어진다.

“폐하께서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군요.”

“이런, 소공작. 오해하지 마시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황제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먼저 유혹한 건 내가 아니라 레이디 헤센바이츠입니다."

‘뭐라고!?’

이엘리는 분노가 치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피해자한테 뒤집어 씌워도 유분수지! 하지만 항변하고 싶어도 도무지 몸이 움직이지 않는 다. 딱딱하게 굳은 몸 안에 정신 갇힌 것 같다.

”이엘리가 폐하를 유혹했다고요?”

그때 자카리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엘리는 헛숨을 삼켰다. 손끝부터 차갑게 식어 간다.

‘설마, 그렇게 오해하는 거야?’

아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카리는 오해하지 않을 거야. 날 믿어 줄 거야. 이엘리는 애써 그리 믿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황제는 기세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

“레이디께서 그렇게 행동하시는 바람에…… 저도 어찌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자카리는 조용히 침묵했다. 그런 자카리를 앞에 둔 채로 황제가 마음 대로 떠벌리기 시작했다.

“술을 좀 과하게 하신 것 같더라고요. 횡설수설하시다 저렇게 잠들어 버리셨습니다.”

‘저 자식이!’

그 말을 듣던 이엘리는 화가 나다 못해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명료한 정신에 비하여 몸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다. 자카리는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황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소공께서도 이만 파혼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파혼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황제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반들거렸다. 처음부터 황제는 이것을 노리 고 있었다. 이엘리를 어떻게든 자신 이 취한다. 공석이 된 차기 공작 부인의 자리는 안네로제 황녀에게 채우도록 한다.

'안네로제, 그 계집은 내 말이라면 껌벅 죽는 아이니까.’

황제는 비릿하게 웃었다. 안네로제를 통해 공작가의 내정에 간섭할 수 만 있다면, 귀찮게 구는 로렌 백작가는 정리해 버려도 될 터다. 황제는 느긋한 얼굴이 되어 자카리를 눈 안에 담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레이디의 가문은 소공의 가문보다 한참 한미하 기도 하고……”

”……”

“……아직 두 분 사이에 후사가 있으신 것도 아니니까요.”

그 사실조차 황제는 만족스러웠다. 두 사람은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결혼했고, 최근에 갓 성년이 되었다. 그리고 이성 관계에 엄격한 공작은 채 성년이 되지 않은 두 사람을 합방시키지 않았다.

그러니 안네로제에게 빨리 아이를 낳으라 요구하면 될 터. 황제는 즐겁게 지껄여 댔다.

“예전에 하지 못했던 혼사를 다시 맺는 것도 좋겠습니다.”

괴물에게 황가의 여인을 보낼 수 없다며 파기했던 그 혼사? 자카리는 차게 비웃음을 지었다.

“제국 유일의 공작가에는 황가의 피가 닿은 여인이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황제는 모든 일을 자신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자카리의 비웃음 조차 호의라고 해석한 황제는 빙긋 웃었다. 자카리의 눈빛이 더욱 가라 앉았다.

“제 여동생이라서 말하는 게 아니 라, 그 아이도 레이디 못지않게 외모도 빼어나니까요.”

황제는 마치 물건을 파는 장사치처럼 제 여동생을 품평하고 있었다. 황제가 씩 미소 지었다.

“성격도 나름 조신하니, 여러모로 소공을 실망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폐하.”

그때 자카리가 황제의 말을 탁 끊어냈다. 그의 싸늘한 태도에 황제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말씀이 참 많으시군요."

“헤센바이츠 소공작?”

“하지만 폐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듣고 있자니…… 제 귀가 썩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자카리는 씩 웃었다. 그와 함께 공 기가 다시 한 번 차가워졌다. 화사 한 봄날, 게다가 상대적으로 따스한 남부. 겨울에도 눈이 내리는 날이 드문 제도 리펜에서 하얗게 입김이 흘러나왔다.

“……소, 소공작?”

그제야 황제는 자신이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카리의 눈동자에 스며들어있은 감정을 그제야 알아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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