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화
“아뇨, 아마 모르겠죠.”
그렇다면 황녀를 사칭하여 초대장을 보냈다는 건가. 황녀가 황궁에서 받는 취급을 알 만했다.
“방해할까 봐, 오늘 일부러 그 아 이를 외부로 보내 뒀거든요.”
테이블 위로 턱을 괴며 황제가 말을 이었다. 아샤꽃 그늘 아래, 회색 시선이 짙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아이가 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엘리는 그 목소리에서 황제가 황녀를 굉장히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것도 달라 질 게 없다’라고 자신하는 태도만 봐도 그랬다.
“어쨌든 제 행동에 기분이 상하셨 다면…… 그건 사과드리고 싶군요.”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얼굴로 황제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이엘리는 황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 태도가 레이디를 불쾌하게 한 것 같네요. 다만……”
까맣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 위로 기묘한 욕구가 반들거렸다. 그녀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전 레이디를 개인적으로 정말 뵙 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여동생의 이름을 빌렸노라,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말로는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라 고 하지만, 숫제 협박에 가까운 대사였다. 이엘리가 웃으며 말했다.
“이해는 해 드릴 수 있지만, 그렇다하여 그 사죄를 무조건 받아들여 야 할 이유는 없지요.”
“레이디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럼요. 저는 헤센바이츠 소공작과 이미 혼인한 몸이니까요.”
마치 비처럼 아샤꽃잎이 쏟아졌다. 주변 풍경은 꽤나 로맨틱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그녀는 그런 낭만을 느낄 만한 아니었다. 그녀는 곱게 눈매를 휘었지만, 그 미소에는 온기가 없었다.
“페하께서는 저에 대한 호의를 방패 삼아, 제게 무례한 일을 저지르고 계십니다.”
“레이디.”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언제까지 그 무례를 이해해 드려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듣던 황태자는 마치 심술이 난 어린 소년 같은 얼굴을 했다. 황재가 툭 말했다.
“레이디께서 항상 그렇게 냉정하시니까, 제가 너무 이렇게 행동하는 겁니다.”
이젠 내 탓이냐? 남 탓을 하는 실 력만큼은 일품이었다. 기가 막힌 이엘리가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제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이엘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고민했다.
‘어쨌든 지금 내 위치는 자카리의 아내야.’
그녀가 여기서 잘못 처신하면 황가와 공작가의 관계가 틀어질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미운털이 박힌 채로 북부에 돌아가는 게 마음에 걸렸던 이엘리였다. 그녀는 마음을 다져 먹었다.
‘오늘은 웬만하면 곱게 넘어가도록 노력하자.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꾹꾹 누르며 이엘리는 미소했다. 그 때 황제가 말을 붙였다.
“기분이 많이 상하셨나 봅니다. 표정이 어두우시군요.”
“……아닙니다.”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불쾌함을 간신히 꾹꾹 눌렀다. 황제는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사죄의 의미로 제가 레이디에게 차를 대접할 수 있게 해 주시지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황제는 짝짝 박수를 쳤다. 그러 자 소리 없이 시녀들이 들어와 테이블에 다과며 찻주전자와 찻잔을 늘어 놓았다. 달콤한 케이크 따위가 다과의 주류였다.
“레이디께서 달콤한 다과를 즐기신 다는 소문을 들어서 일부러 준비했 습니다.”
“……아니, 딱히 가리지는 않습니다만.”
이엘리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눈앞의 황제는 느긋하게 턱을 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입맛에 대한 정보는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눈앞에 펼쳐진 디저트는 이엘리의 식성에 꼭 맞춘 것이었다. 하지만 식욕이 동할 리가 없었다.
“차가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얼른 드시지요. 이 모든 다과는 레이디를 위해 직접 준비한 거니까요.”
그렇게 말한 황제는 보란 듯이 찻잔을 들어 올려 찻물로 입술을 축였다. 마치 ‘내가 널 위해 이 정도까지 노력했어’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잠시 후, 황제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 참. 제가 레이디께 꼭 허락을 받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만.”
“부탁할 것이라니요?”
포크로 케이크 조각을 깨작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제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화해할 겸, 저와 레이디의 관계를 개선할 겸 해서……”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회색 시선에 스며들어있은 질척한 감정. 눈치채지 못하는 게 바보다.
“제게 레이디의 애칭을 허락해 주 시겠습니까?”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불가항력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싫습니다만.”
“이런, 서운한걸요. 이렇게 또 거절 당하는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황제는 여전히 이엘리를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점이 이엘리는 정말 싫었다. 황제의 붉은 입술이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다.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레이디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 그만이니까요.”
그 말에 인내심이 탁 끊겼다. 더 이상 못 참겠다. 이엘리는 탁 소리 나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폐하께서는 사죄와 진심이 항상 다른 방향이신 것 같군요.”
이엘리는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제는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본다.
“이미 결혼한 여인을 앞에 두고 ‘거절’이며, ‘마음에 두고 있다’ 운운 하시다니.”
“진정하십시오, 레이디.”
“폐하께서는 저를 모욕하려는 뜻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이 상황에서 너라면 진정하겠냐? 그런 뜻을 담아 황제를 노려보자, 황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 참, 항상 느끼는 거지만…… 레이디는 놀라운 여자예요.”
황제는 손가락을 들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 소리가 그녀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제게 이렇게 대한 다면 분명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했을 텐데……”
응분의 대가라니, 먼저 무례함을 저지른 사람이 누군데? 기가 막힌 그녀가 황제를 응시했다.
“……레이디만큼은 그럴 생각이 들 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죠.”
이엘리는 벽과 말하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황제에게도 속셈이 있었다. 어차피 공작가의 위명만 벗겨 내면 작은 자작가의 여식일 뿐이었다. 즉, 저를 귀찮게 만들 뒷배조차 없는 여자.
‘앙칼진 고양이일수록 길들이는 맛이 있으니까.’
황제는 느긋한 얼굴로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밀어내고 거부해 도 자꾸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지. 그녀를 어떻게든 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갈증이 해갈되지 않을 것 같다.
‘최근 소공작은 폭주한 적이 없었 어. 지금은 꽤 안정 되어있다고들 하지.’
어떻게든 이엘리와 자카리를 이혼 시킨 이후 자카리에게 황녀를 붙여 둔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정부로 들인다. 한 번 결혼했다 이혼했고, 한미한 가문 출신이니 황후로는 들일 수 없지만.
‘난 제국의 태양, 만인의 어버이이 자 최고의 권력자인 황제야.’
그런 자신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을 리 없다. 제 생각대로 일이 이루어 지기만 한다면 그의 치세에도 도움 이 될 터.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주판알을 튕기던 황제는 입꼬리를 밀 어 올렸다.
“레이디. 그거 아십니까?“
묘한 느낌이 담긴 질문이다. 달칵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은 황제가 그녀를 비스듬히 본다.
“저는 헤센바이츠가 싫습니다.”
”……”
이엘리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황제의 눈동자 안쪽에 찌꺼기처럼 가라앉은 감정들.
약간의 두려움과 질투. 자신보다 우월한 남자에 대한 열등감. 속내가 투명하게 보여서 한심할 지경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저도 싫어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깨를 으쏙이면서 이엘리가 입을 열었다. 연녹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저는 소공작의 아내이니까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황제는 단박에 이엘리의 말을 부정했다. 그늘 아래,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보며 반짝 빛난다.
“당신만큼은 예외예요. 왜냐하면 당신은 여러모로 특별하니까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어딘 가 들뜬 것 같은 표정으로 황제는 이엘리에게 소곤거렸다.
“전 당신이 소공작과 결혼 생활을 정리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엘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무난하게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저게 할 소린가?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순간 이엘리는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필요할 때는 억지로 결혼시키더니, 이제 와서 또 훼방을 놓겠노라 이 소리인가?’
도대체 어디까지 그들의 인생을 휘 두르려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황제의 이기심이 혐오스러웠다.
“폐하께서는 이미 저희의 삶에 지나치게 깊게 참견하고 계십니다."
이엘리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비뚜름하게 입술 끝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와 자카리가 처음 연을 맺게 된 것 또한 황실의 압박 때문 아니었습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솔직히 레이디께서도 그건 이해해 주셔야지요.”
황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 뻔뻔함에 그녀는 이제 기가 질렸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 아시나요?”
“아니요, 처음 들어 봅니다.”
“어떤가요? 제 생각엔 딱 폐하를 표현하는 말 같습니다만.”
자신을 결혼시킬 땐 황녀를 보내지 않을 수 있어 편했겠지. 그러나 자카리가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니, 그녀가 자카리와 결혼한 게 눈엣가시처럼 됐을 터였다. 그러니 이혼을 종용하는 거고.
“황녀 전하를 공작가에 차마 보낼 수 없어, 비슷한 나이대의 저를 택하셨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에 황제의 얼굴이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이엘리는 찻잔을 들어 올려 입술을 축였다.
“시작이 어쨌든, 전 지금 결혼 생 활에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이제 자카리와 공작을 제 가족으로 받아 들이고 사랑하고 있었다.
“또한 전 이미 제 하나뿐인 남편, 자카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그렇게 선언하는 이엘리의 얼굴에 짧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자카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부드립게 녹아든다. 이엘리는 곧게 고개를 들어 올렸고, 황제를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그러니 제가 누구와 함께하든, 이제 그 문제는 폐하께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제 황제를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 그리고 불쾌감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흣”
그때 황제의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눈매를 좁히며 그를 노려봤다.
“훗, 흐하, 하하핫, 아하하하하!”
황제는 폭소를 터뜨렸다. 무엇이 그리 웃긴지, 한참 배를 잡고 허리를 꺾으며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그러던 중, 실 끊어진 인형처럼 뚝 웃음이 멈췄다. 황제가 서늘한 시선을 들어을렸다.
“그거 아십니까?”
”……”
“전 지금껏 원했던 것을 단 한 번 도 가지지 못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황제의 차가운 시선이 이엘리를 위 아래로 뜯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차분한 낯이다.
“그렇다면 제가 그 첫 번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레이디가 이혼한다면, 레이디를 제 여자로 들인다 하더라도 말 입니까?”
“페하께서는 스스로를 굉장히 대단한 분으로 생각하시나 보군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이엘리는 황제의 말을 맞받아쳤다.
“폐하의 여자 따위,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게 무슨……!”
황제는 순간 발끈해 버렸다. 처음이었다. 타인 앞에서 이렇게 스스로를 부정당해 본 적은. 지금껏 제 비 위를 맞춰 주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살아온 황제에게는, 이 감각 자체가 생경했다.
“폐하께서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시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엘리의 얼굴은 이제 무표정했다. 기이할 정도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미미한 짜증과 불쾌감, 그리고 한심함만이 연녹색 눈동자 안에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빈정거렸다.
“폐하께서 타인의 마음을 가볍게 여기시는 만큼……”
달칵. 찻잔이 테이블 위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이엘리는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타인이 페하의 마음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받아들여야 공평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