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화
황제는 싸늘한 얼굴로 황녀를 돌아 보았다. 단정한 얼굴 위로 한껏 비 틀린 조소를 짓고 있었다.
“널 부르지도 않았는데, 감히 네가 날 먼저 찾아오다니.”
”……”
“네가 정녕 제정신이냐?”
황제의 빈정거림에 황녀는 숨을 삼켰다. 평소라면 얻어맞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런 질문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황제가 웨스턴의 기사를 불러들인 거라면. 만약 그렇다면…….
‘이건 잘못되었어.’
황제는 만인을 아끼고 보살펴야 하는 존재였다. 적어도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만인이 바라보고 있는 마상 시합에서 위험한 사고를 일으켜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황녀가 황제에게 물었다.
“웨스터 남작가의 기사는 폐하께서 부르신 겁니까?”
“내가 부르면 어떻고, 또 부르지 않았다면 어쩔 셈이냐?”
황제는 시종일관 공격적이었다. 그리고 날 선 태도를 보면서 황녀는 깨달았다.
황제는 자카리에게 훼방을 놓기 위하여 그 기사를 임의로 집어넣은 것이다. 황녀는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저런 사람을 정말로…… 황제로 믿고 따라야만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황제의 집무 실에서 물러 나오며, 황녀는 오래 묵힌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나라면 좀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내게 오라버니만큼의 기회가 주어 졌다면. 적어도 기회만이라도 동등했다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던 황녀는 고개를 휘저었다. 일어날 수 없는 헛된 상상이다. 황녀는 서글픈 낯을 했다.
* * *
이엘리는 아샤꽃가지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타운하우스에 돌아와 꽃병부터 찾았다.
차가운 물을 가득 채우고 설탕까지 한 스푼 넣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꽃가지를 꽃병에 담아 두었다.
“뭐해, 이엔?”
자카리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턱을 괴고 꽃가지를 바라보던 그녀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이 꽃이 정말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너랑 닮아서 예쁜 거야.”
“와, 방금 그 말… 정말 여자를 많이 다뤄 본 사람 같았어.”
손가락으로 톡톡 꽃송이를 건드리 던 그녀가 힐끗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쏙했다.
“하지만 진심인걸.”
“그래,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이엘리는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감추려, 부러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자카리는 다 괜찮은데 가끔 사람을 지나치게 설레게 만든다. 그때 자카리가 등 뒤에서 이엘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자, 자카리?”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바람에 어깨부터 빳빳하게 굳었다.
“그래도 이렇게 화병에 담아 둘 줄 은 몰랐네.”
자카리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흡사 설탕으로 빚은 양, 귓전에서 부서져 녹아내리는 목소리.
“그건, 혹시라도 꽃이 시들면 아쉬 우니까……”
“그러면 새 꽃을 선물해 주면 되지.”
“아냐, 이 꽃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걸.”
심장이 쿵쿵 뛰는 와중에도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속삭인다.
“아샤꽃가지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지켜 준 거잖아.”
“이엔.”
“그러니까 이 꽃에…… 네 마음이 담겨 있는 거니까.”
자카리는 홀린 듯이 이엘리를 내려 다보았다.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다.
“나를 네 레이디라고 말해 줘서, 정말 기뻤어.”
“이엔.”
연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곱게 휘어진다. 그녀의 붉은 입술은 갓 피어나기 직전의 꽃봉오리 같다.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촉. 보드라운 입술 위로 짧은 키스 가 스쳤다.
”……”
느닷없는 키스에 이엘리는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오히려 깜짝 놀란 자카리가 뒤로 물러났다.
“이, 이엔!”
“방금, 무슨……?”
“그, 나, 나는.”
자카리는 아득히 멀어지려는 이성을 간신히 붙들었다.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지만 대답이 나올 리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자카리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미,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 라, 아니, 그것이……”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의자에서 빙그르르 돌아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손을 뻗어 자카리의 크라바트를 어루만진다. 그대로 크라바트에 손을 올린 채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자카리.”
“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테니까!”
자카리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 며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이런 일이 다시는 없으면 안 되지.”
“응?”
“우리는 부부잖아.”
이엘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카리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간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자주 있을 거 고, 또 그래야 할 텐데.”
“……어?”
“그렇게 얼어 붙어있으면 어떡해?”
순간 그녀가 자카리의 목을 끌어안으며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달콤한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그리고 키스는 이렇게 하는 거야.”
“……저, 이엔?”
자카리는 차마 뒷말은 잇지 못했다. 깊숙한 키스가 이어진 탓이었다. 농밀한 키스였다.
아주 어렸을 적, 숨을 고르기 위해 나누었던 숨과는 전혀 다른 입맞춤.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하아.”
잠시 후, 입술을 떼어 낸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카리는 이제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엘리는 남편의 뺨에 짧게 키스해 주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속삭인다.
“숙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못 써, 자카리.”
“……뭐?”
새파란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이엘리를 제 안에 가둬 넣는다. 이엘리는 짓궂게 미소 지었다.
“그냥 그렇다는 뜻이야.”
“이, 이엔. 나……”
자카리는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이엘리는 자카리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그럼, 자카리. 잘 자.”
”……”
이엘리는 몸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긴 복도를 가로질렀다.
달아오른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자리에 정신을 놓은 채 서 있던 자카리가 스르륵 자리에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방금.”
이엘리가 나에게 키스했어. 그에게는 그 사실만이 피부에 선연하게 와 닿았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되새기던 자카리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입술을 매만졌다. 세상에. 자카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거, 꿈 아니지?”
꿈이라면 영영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나치게 완벽한 꿈이다. 그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9. 너를 지키기 위하여
제도에서 참석해야 할 대부분의 일 정은 끝났다. 이제 함께 공작령으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뭐, 어쨌든 끝난 것에 의의를 둬야 하나.’
황제와 좋은 관계를 만들었다고는 빈말로도 하기 힘들다. 이엘리는 살 짝 미간을 좁혔다. 그때.
“레이디, 레이디께 초대장이 도착 했어요.”
“내게?”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곧 공작령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이럴 때 초대장을 보내다니? 발신인을 확인 하려 초대장을 뒤집어 본 그녀는 어리등절 해졌다.
“황실에서?”
황실에서 보내온 초대장이었다. 황가에서 사용하는 금빛 인장이 찍혀 있다. 발신인은 황녀였다.
‘황녀 전하께서 나를 초대하신다고?’
이엘리는 미심쩍은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초대장을 열어 보았다. 초대 장의 내용 자체는 간단했다. 그녀가 공작령으로 돌아가기 전, 한번 얼굴이나 보고 갔으면 좋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
하지만. 이엘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황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황제에게 억눌린 채 숨을 죽이고 있던 황녀. 그런 황녀가 함부로 누군가를 황궁 안으로 초대한다고?
‘게다가 황녀 전하는…… 폐하가 내게 가진 이성적인 호의를 불쾌하게 여기고 계셨는데.’
물론 초대하는 장소는 황녀궁이 었지만, 그래도 황제와 마주칠 확률이 높아지는 건 사실이었다.
‘아냐. 내가 너무 안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수 한 호의일지도 모른다. 황제가 한 짓이 있어 너무 예민해진 것 같다. 달리 생각하자면, 황실과 쌓게 된 좋지 못한 시간들을 만회할 기회가 생긴 것일지도.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이엘리는 펜과 종이를 끌어당겼다. 어차피 거절할 방도도 생각나지 않았고, 황녀와 얼
굴을 보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울렸다.
‘뭐, 자카리도 최근 제도의 귀족들을 만나느라 바쁘니까.’
자카리는 딱히 제도의 귀족들과 친분을 다지는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 만, 오히려 이엘리가 그를 보내곤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제도의 귀족들과 만날 수 있겠느냐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이 정도는 해야겠지.’
대충 고민을 끝낸 이엘리는 답신을 마무리 지었다. 초대에 기쁘게 응하 겠노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튿날. 이엘리는 황궁으로 입궁했다. 그녀를 황녀궁까지 전담 하는 시녀가 따라붙었다.
“레이디 헤센바이츠를 뵙습니다.”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안내하는 시녀의 의상을 눈여겨보았다. 가슴 위로 조그맣게 새겨져 있는 황실의 문장은 금색이었다. 이엘리는 의아함을 숨기지 못하고 눈매를 좁혔다.
‘뭐지?’
황실의 시녀들도 계급이 있다. 그리고 금빛 문장은 황족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고급 시녀들만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 또한 지금의 황녀는 홀대받는 서녀였기에 고급 시녀를 부리지 못했다.
”……”
이엘리는 미심쩍은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녀를 따라 한참을 걷자, 저 멀리 조그마한 정원이 보였다. 온통 분홍색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세상이다.
연분홍색 아샤꽃이 만개해 흐드러져 있었다. 살랑거리며 흔들려 쏟아 지는 꽃잎들 사이로, 반갑지 않은 붉은 머리채가 보였다.
“폐하?”
이엘리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던 청년이 훌쩍 몸을 일으켰다.
“레이디 블랑쳇.”
“오늘도 저를 부르시는 호칭이 부 적절하시군요.”
이엘리는 단박에 황제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우아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어차피 단둘뿐인데 그리 단호하게 굴지 마십시오.”
“단둘뿐이니 더욱 언사에 주의를 기울여야지요.”
그렇게 말하며 이엘리는 바짝 어깨를 긴장시켰다. 황제는 분명 ‘단둘 뿐’이라했다.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자리에 선 이엘리를 바라보며 황제가 손끝을 까닥였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우선 앉으시 지요.”
싫은데요.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이엘리는 간신히 되삼켰다. 황제를 계속 노려보고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제 목적은 황실과의 관계를 약간이나마 개선하는 것이었다.
”……”
이엘리는 자리에 앉았다. 드레스를 정돈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황제는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이렇게 레이디를 뵙게 되다니, 무척 기쁘군요."
“같은 마음이 아니어서 죄송합니다만, 전 폐하가 왜 여기에 계신 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엘리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엄연히 황녀의 부름을 받아 방문 한 것이었다. 애초 황제가 이 자리에 나타나는 것을 알았다면 황궁에 입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황녀님의 부름을 받아 입궁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탐색하는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여전히 태연한 낯이었다.
“폐하를 만나 뵙게 되다니…… 무척 당황스럽군요.”
“그 말은, 짐이 레이디를 불렀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거라는 뜻입니까?”
“송구하오나 맞습니다.”
이엘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답했다. 황제는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듯, 씩 미소했다.
“레이디가 그런 식으로 날 피할 것 같기는 했지요.”
“폐하. 그건……”
“그랬기에 일부러 내 누이의 이름을 빌려 온 겁니다.”
회색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 이엘리를 제 안에 담았다. 황제가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제 누이와 레이디는 꽤나 친밀한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
“솔직히 좀 서운합니다. 저는 그렇게 피하시더니, 제 여동생과는 친근한 관계라니요.”
유들거리는 황제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 던 그녀가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황녀 전하께서는 폐하께 서 이렇게 행동하시는 것을 알고 계 십니까?”
이엘리의 물음에 황제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깨를 으쏙하는가 싶더니 태연하게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