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96)

67 화

8. 아샤꽃가지의 주인 (2)

그때 경기장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어어, 넘어진다一!”

“꺄아아!”

“어찜 좋아요!”

사람들의 경악 어린 고함 소리 속에서 기수 한 명이 말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갈색 말을 탄 기사는 아까 웨스터 가문에서 넣었다는 그 기수였다. 이엘리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자카리!’

가장 큰 문제는 기수가 넘어지면서 말들이 혼란에 빠진 것이다. 교묘하게 자카리가 달리는 방향으로 말이 미끄러진다. 다행스럽게도 자카리가 탄 말에 직접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카리의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던 기사들은 느닷없는 충격에 나가떨어졌다. 말들이 비명을 질렀다.

“히히힝!”

“으악!”

말들과 기수들이 제멋대로 뒤엉켰다.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건 이엘리도 마찬가지였다.

“저걸 어쩌면 좋아요!”

“다들 크게 다치지는 않았나 몰라!”

이엘리는 헛숨을 삼켰다. 걱정스러운 얼굴이 된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황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을 다 루는 솜씨가 모자랐다 하기에는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이건 마치 소공작을 노린 것 같잖아.’

넘어진 말들은 마구 발버둥을 치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나가떨어진 기수들이 신음을 내뱉었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사람들이 달려 들어 갔다.

황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렇게 엉켜서 넘어졌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몰라요.”

“많이 위험한가요?”

“그게…… 몇몇 기수들은 넘어질 때 머리를 부딪친 것 같더라고요.”

시종이 다급하게 위로 달려 올라갔다. 경기를 계속 진행할 것인지, 황제의 의향을 묻기 위해서일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경기를 멈추는 편이 맞았다. 하지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경기를 속행하라 하십니다!”

황제의 대답을 들은 시종이 크게 외쳤다. 신들린 솜씨로 엉킨 기수와 말들 사이를 빠져나온 자카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엉망이 된 경기장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카일 경도 마찬 가지였다.

‘정말로 경기를 속행하라고?’

자카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카일 경도 난처한 얼굴로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정말로 경기를 속행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때, 출발을 알리는 깃발 이 다시 펄럭였다.

”……”

딱딱한 표정이 된 두 사람은 다시 말에 올랐다. 두 사람은 속력을 내어 다음 고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수런거리는 가운데, 황제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경기장을 응시했다.

“젠장.”

황제는 입 안으로 조그맣게 욕설을 내뱉었다. 웨스터 가문의 기사를 일부러 끼워 넣은 건 황제 자신이었다. 자카리가 마상 시합에 나선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를 어떻게든 방해 하려한 것이었다.

“저까짓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고.”

황제가 노린 것은 웨스터의 기사가 자카리와 함께 넘어지는 것이었다. 크게 부상을 입으면 그걸로 좋고, 그렇지 않았다 해도 아샤꽃가지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그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오히려 소공작을 도와주는 꼴이 되었어.”

넘어진 자카리는 황제의 승리를 빛내 주는 장식이 될 터였다. 그러나 황제 자신의 농간 때문에 오히려 다른 기수들만 엉켜 넘어졌다. 게다가 자카리는 착실히 우승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레이디 헤센바이츠에게 아샤꽃가지를 바칠 수 없게 될 텐데.”

황제는 약간의 짜증을 느꼈다. 오로지 제 기사가 아샤꽃가지를 가져 오고, 그 꽃가지를 이엘리에게 바칠

그 순간의 허영심을 위해 이 경기를 준비한 황제였다. 계획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기수들이 크게 다치지 않았어야 할 텐데요.”

이엘리는 작게 속삭였다. 연녹색 시선이 걱정을 담고 들것에 실려 나오는 기수에게 머물렀다.

“그래도 의료진이 바로 옆에 대기하고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황녀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그 말을 듣던 이엘리는 문득 등골을 스치는 서늘함을 느꼈다.

‘혹시 페하가 이번 일에 개입하신 건 아닐까?’

착각이었을까. 언뜻 보기로, 아까 웨스터의 기사는 자카리에게 훼방을 놓으려고 했던 것 같다.

‘설마…… 아니겠지?’

이엘리는 힐끔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경기장을 바라보던 황제는 문득 시선을 내렸다. 이엘리와 두 눈이 마주친다. 순간 회색 눈동자가 휘어졌다. 황제는 씩 미소를 지었다.

”……”

황제의 미소를 보자마자, 찬물을 맞은 양 정신이 번쩍 들었다. 느낌 이 왔다. 황제가 자카리를 해코지하 기 위해 일부러 웨스터의 기사를 집어 넣었다는 느낌.

그때 황녀가 작게 소곤거렸다.

“레이디 헤센바이츠. 마음이 불편 하겠지만 이제 경기도 막바지예요.”

“아, 네.”

퍼뜩 정신을 차린 이엘리는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막 자카리가 여덟개 째의 고리를 꿰어 나오던 참이다. 몸을 한껏 낮춘 자카리가 창대를 바 투 쥔 채 빠른 속도로 경기장을 가로 질렀다.

“와아아-!”

커다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어 쨌거나 황제가 경기를 속행하라 명령한 이상, 사람들은 경기를 즐겨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제 고리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황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엔하르트 대공이 여덟 번째의 고리를 손에 넣었네요.”

“고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도 있나 요?”

“대부분의 기수들이 그렇죠. 뒤로 갈수록 고리의 크기가 작아지니까요.”

황녀는 기웃이 시선을 기울여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자카리는 고리를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사실상 섬세한 실력과 거리를 재는 능력이 없다면 창에 고리를 꿰는 것 자체가 어려워요."

“그렇다면 카일 경은 어느 정도로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아마 고리를 꿰는 것 정 도는 해낼 수 있을 거예요.”

황녀가 카일 경의 실력을 가늠하는 것처럼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황녀는 곧 단언했다.

“하지만 소공작처럼 저 속도를 유 지하며 해내는 건, 역시 불가능할 것 같군요.”

사실 자카리가 보이는 무위가 무서울 정도였다. 그는 전투에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고, 지휘관의 무력은 병사들의 사기를 돋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 중 하나였다.

‘게다가 소공작은 병법과 군사학, 병사를 다루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하지.’

저런 장교가 있다면 직접 영입하고 싶을 정도다, 그렇게 생각하던 황녀 가 쓰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이람.’

오라비에게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몰라 내내 숨죽여 살아왔던 황녀였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이것저것 홀 로 공부했지만, 그것조차 오라비에게 밉보일까 두려워 포기한 지 오래였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황녀는 생각을 털어 냈다. 그러나 약간의 미련은 질척하게 남은 채로, 황녀를 붙들고 늘어졌다.

‘내가 오라버니보다는 좀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한편, 황녀의 입으로 듣는 자카리의 칭찬은 이엘리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뺨을 붉히며 이엘리가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아홉 번째의 고리를 무사히 얻어 낸 자카리가 속력을 내 고 있었다.

“이렇게 우승자가 결정되었네요.”

“그래도 황제 폐하의 대관식을 기념하는 마상 대회인데……”

“폐하께서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으시겠어요.”

그때 소곤대는 대화 소리가 귓전에 들어왔다. 그야 물론 그렇겠지. 이엘리는 한숨을 되삼켰다.

“와아아-!”

“세상에, 소공작께서 마지막 고리를 얻으셨어요!”

커다란 외침에 이엘리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황급히 경기장을 내다보자, 여성이 끼는 가느다란 반지만 한 고리를 맵시 좋게 창에 권 자카리가 말을 탄 채 빙그르르 경기장을 돌고 있었다.

‘자카리.’

그녀가 속으로 부르는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자카리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가죽 모자 아래의 새 파란 눈동자가 생생하게 빛난다. 곧 바로 이엘리를 찾아낸 그가 빙그레 미소했다.

‘이엔.’

자카리가 입술을 달싹여 그녀를 불렸다. 이엘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우승자는 자카리 헤센바이츠 소공작입니다!”

시종이 큰 소리로 우승자의 이름을 외쳤다. 자카리의 바로 뒤를 따르는 카일 경은 다소 복잡한 얼굴이었다. 우승자와 준우승자는 몇 번이고 경기장을 돌면서 쏟아지는 꽃을 주워 모았다.

“축하드립니다!”

흩날리는 색종이 조각들 아래, 꽃 다발을 안은 자카리의 청신한 얼굴이 눈이 부시게 찬란하다.

“……자카리, 정말로 약속을 지켜 주었구나.”

이엘리는 자카리가 날쌔게 말 위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오래오래 응시했다. 그의 동작, 시선 하나까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우승자와 준우승자는 황제가 서 있는 시상대 앞으로 다가섰다.

“헤센바이츠 소공작, 강인한 무위를 통해 가장 날카로운 검임을 증명 하셨습니다.”

황제는 불쾌함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황제의 손에는 아샤꽃가지가 들려 있었다.

“아샤꽃가지의 주인이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자카리는 맵시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다. 왕실의 금빛 리본으로 장식된, 화사한 아샤꽃가지.

하지만 아샤꽃가지보다도 자카리의 모습이 가장 화사하다고 이엘리는 생각했다.

“꽃가지를 바칠 레이디는 결정하셨 습니까?”

“물론이지요.”

한 점 망설임 없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황제의 기사마저 꺾고 승리를 움켜쥔 북부의 기사. 레이디들은 두 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감추었고, 젊은 귀족들은 경의의 눈빛으로 환호를 보냈다.

“헤센바이츠!”

“헤센바이츠!”

황제의 마상 시합에서 연호하듯 공작가의 성이 울려 퍼졌다. 마치 축제처럼 활기찬 분위기 속, 황제만이 제 낯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였다. 자카리는 조심스럽게 아샤꽃가지를 받아 들었다.

'이엔.’

꽃가지를 받아 든 자카리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긴다. 그의 걸음 끝에는 이엘리가 있었다.

“나의 레이디.”

그의 부름에 이엘리는 행복하게 웃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싱그러운 아샤꽃가지였다.

“제 몸과 영혼을 바친 레이디에 게…… 이 아샤꽃가지를 바치고 싶습니다.”

자카리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맑은 하늘처럼 청명한 눈동자가 이엘리를 가득 담는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예요.”

약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이엘리는 대답했다. 조그마한 손안에 아샤꽃가지가 뿌듯하게 쥐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자카리가 새하얗게 미소 지었다. 그때 시종이 낭랑하게 입을 열었다.

“아샤꽃가지의 주인에게는 한 가 지 소원을 말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 말에 이엘리는 흘끔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자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소곤거렸다.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말해 도 돼.”

그 말에 그녀는 허리를 곧게 폈다. 실은, 아까 전부터 내내 마음에 렸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오늘 마상 시합에서 부상당한 기수들에게 최고의 치료와 적절한 보상을 약속해 주세요.”

그 말을 들은 황제가 미간을 좁혔다. 사람들이 나지막이 술렁거리는 가운데, 이엘리는 말했다.

“사실, 그만한 사고가 일어난 시점부터 이 마상 시합은 종료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엘리는 손에 들린 아샤꽃가지를 만지작거렸다. 가지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그득하게 피어난 분홍색 꽃 송이들. 이 꽃가지 하나 때문에 겪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이엘리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상 시합은 속행되었고, 저희는 아샤꽃가지의 주인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분위기는 약간 숙연해졌다. 방금 전, 다쳐 실려 나간 기수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 탓이다.

“그러니 이 시합을 빛내 주었던 분들께 최선의 대우를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간을 구긴 황제를 향해 그녀가 선언했다.

”이것이 제 소원입니다.”

“……알겠습니다. 레이디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방긋 웃으며 인사한 이엘리는 자카리의 손을 감아쥐었고, 곧장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는 황제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아샤꽃가지를 그녀에게 안기는 사람도, 그녀의 미소를 보는 사람도 자신이 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자리를 모조리 빼앗겨 버린 것이다.

마상 대회가 끝난 저녁, 안네로제는 드물게 황제를 찾았다. 황녀는 조심스럽게 황제를 불렀다.

“폐하.”

“오만 방자하구나, 안네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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