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화
“각 가문의 명예를 짊어진 기사들이여, 아샤꽃가지의 주인이 되기를!”
높은 단에 선 황제가 축사를 옮는 다. 황제 곁의 사람들은 제각각 꽁지를 부풀린 공작처럼 면면이 화려
했다. 그러나 이엘리의 시선은 오로 지, 황제의 발밑에 사열한 기수들을 향한 채였다.
‘자카리.’
헤센바이츠의 깃발 아래에 선 자카리를 보자마자 가슴이 벅찼다. 이엘리는 저도 몰래 웃었다.
‘……이제 더 이상 넌, 내게 있어 동생이 아닌 것 같아.’
그때, 기다란 창대를 무게조차 느껴지 않는 양 가볍게 감아쥔 자카리가 그녀를 똑바로 본다.
‘이엔.’
빙하를 닮은 새파란 눈동자가 휘우듬하게 휘어졌다. 미소 한 올에 가 득 차 있는 자신감이란.
'네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절대 로 지지 않을 거야.’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황제의 축사를 받았으니, 이제 레이디들의 축복을 받을 차례였다.
“레이디들에게 축사를 받을 기수는 지금 받으십시오!”
시종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카리는 이엘리 쪽으로 다가왔다.
“자카리.”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창을 쥔 자세가 바늘 하나 비집을 틈도 없이 단단하다.
“레이디. 오늘 마상 시합의 승리를 위해, 축복의 말을 하나 듣고 싶습니다.”
”……”
자카리는 정중하게 입술을 열었다. 설탕처럼 달콤한 음색이었다.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축복 따위에 의지하지 않아도, 나의 기사님은 저와의 약속을 당연히 지키실 테니까요.”
그 말에, 자카리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이엘리는 나긋한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제 기사님께서 절 아샤꽃가지의 주인으로 만들어 줄 것을, 믿어의 심치 않으니까요.”
황제는 이엘리의 대답을 들으며 침묵을 지켰고, 엘리제는 이엘리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주변의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카리를 바라보던 그녀가 속삭였다.
“아샤꽃가지의 주인이 된 당신을 기다릴게요.”
그 말을 들은 자카리가 씩 눈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그 뒷모습을 가만 지켜보았다.
“그럼 다들 위치로!”
시종이 커다랗게 외쳤다. 황제를 향해 경의를 표한 각 기수들은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 섰다.
“마상 시합은 처음인가요, 레이디 헤센바이츠?”
정신없이 그 광경을 보던 이엘리를 현실로 끌어 내린 이는 황녀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예요. 아시다시피, 자카리의 성인식 때는 사냥 대회를 열었잖아요?”
그때를 생각하던 이엘리의 눈빛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그때, 자카리는 최상품의 희귀한 은여우를 사냥해
왔었다. 그 모피를 쓸어내릴 때의, 손에 닿던 보드랍던 감촉은 아직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레이디께서는 마상 시합의 규칙은 잘 모르시겠군요.”
“부끄럽지만 그렇답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제가 조금이나마 설명해 드릴까요?”
황녀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엘리는 살갑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황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 주신다면 저야말로 감사하지요.”
“음, 레이디에게 지루하지 않은 설명이었으면 좋겠네요.”
큼큼 헛기침을 한 황녀가 이엘리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황녀는 나긋한 어조로 설명을 했다.
“초창기의 마상 시합은 각 기수가 서로에게 직접 창을 겨누고 달렸어요. 말 위에서 무위를 다투어 상대 방을 쓰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아, 승리자가 위로 올라가는 토너먼트 형식이었죠.”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요?”
“맞아요.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는 사람이 많아지고, 실제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생겼죠.”
부상을 입는 것으로도 모자라 목숨 까지 잃었다고? 이엘리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딱딱해졌다.
“친교를 위한 시합이 너무 위험하 다는 비판이 이어져서, 종래에는 그 규정이 바뀌어요.”
정색하는 이엘리를 달래기 위함인지, 황녀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어진 설명은 이러했다.
첫 번째로, 잘 훈련된 말을 탄 기 사가 출발선에 선다.
두 번째로, 기사들의 목적지는 긴 장대에 고정된 고리였다. 긴 주도로 사이에 장대들이 서 있고, 장대마다 고리들이 고정 되어있다. 열 개의 장대에 고정된 고리들은 일정한 규격으로 크기가 작아진다.
세 번째, 점수를 얻는 건 창의 뭉뚝한 끝에 차례로 고리를 걸어 귀환 하는 방식이었다. 크기가 작은 고리를 꿰어올수록 그 점수가 높아진 다. 가장 작은 고리는 거의 여성의 반지 정도의 크기라, 섬세한 동작이 아니면 고리를 가져오기 어려워진 다.
네 번째, 달리는 속도 또한 중요하 다. 최대한 빨리 결승선에 도달해야 높은 점수를 얻는다. 설명을 귀담아 듣던 이엘리의 낯이 점차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기수들은 고리를 향해 창을 겨냥한 채, 전속력으로 주도로를 질주하는 건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부상자가 늘어날 것 같은데? 그때 황녀가 여상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현재의 마상 대회는 마장술과 창술, 속력까지 고려하는 쪽으로 변한 거죠."
“하지만 그 방식만으로도 충분히 사상자가 많아질 것 같은데요.”
“그렇죠. 어쨌거나 지금의 마상 대회도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발전된 형식이긴 하지만.”
황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 서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황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말이나 창을 다루는 솜씨가 미숙 하다면 크게 다칠 수도 있기는 해요.”
이엘리는 어깨를 굳혔다. 크게 다 칠 수 있다니. 설마, 자카리는 알면 서도 대회에 참가한 건가?
“그래서 마상 대회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기사의 역량을 증명한다고들 하지요.”
“……그렇군요.”
도저히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역시 자카리를 내보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 이 물씬 피어오른다.
하지만 황녀는 걱정 말라는 양 살래살래 손을 저어 보였다.
“너무 걱정 말아요. 저들은 마장술과 창술로는 각 가문에서 따를 바 없는 대표자이니까요.”
”……”
“기수들 간의 충돌, 혹은 말이 넘 어지는 불상사가 아니라면 크게 다칠 일은 없어요.”
이엘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엘리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인지, 황녀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소공작께서는 제국 최고의 기사이시잖아요?”
“제국 최고의 기사라도…… 다칠 수도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소공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레이디와의 약속은 지킬 거예요.”
걱정스러운 이엘리의 말에 황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확신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레이디의 손수건을 받았으니, 그 보답으로 아샤꽃가지를 안겨 줄 테니까요.”
“……그래요. 응원하겠다고 약속도 했으니까요.”
황녀의 말을 들으니 약간 위안이 된다. 때마침 황녀가 한 지점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지금 막 기수들이 출발선에 서네요. 보이세요?”
기수들 사이의 자카리를 찾아보려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의 앞으로 넘어질 것처럼 상체를 굽힌다.
황녀는 그녀가 앞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이엘리의 어깨를 붙들어야만했다.
‘아, 저기 있다.’
각 기수들은 잘 무두질한 가죽 갑옷을 차려입고 머리에도 가죽 모자를 썼다. 부상을 최소화하도록 만반
의 준비를 한 것이다. 모자 아래, 자카리의 은빛 머리칼이 햇빛을 머 금고 반짝였다.
“그래도 다칠까 봐 조금 걱정이 되네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던 이엘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황녀는 시원스레 답했다.
“제국 최고의 기사라는 칭호는 공으로 나온 게 아니니까요. 경쟁자가 거의 없어 보여요.”
“황녀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럼요. 우승 후보면 후보였지, 다치는 것을 논하는 것은 소공작에 대한 실례 같네요.”
황녀가 곱게 눈매를 접었다. 이엘리가 소공작에게 어째서 그렇게 마음을 빼앗기는지 알 것 같다. 왜냐하면 차분한 빛을 띤 푸른 눈동자는 오직 이엘리만을 사랑스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만약 소공작이 아내가 없는 사람이었다면, 나도 조금 설레었을지도 모르겠네.’
출발선에 선 자카리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연녹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자카리는 보란 듯이 손수건을 맨 자신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나비 모양 매듭 위로 짧게 입을 맞추었다.
”……”
이엘리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출발을 알리는 깃 발이 커다랗게 펄럭였다.
“출발!”
각 기수들이 몸을 낮추어 달리기 시작했다. 황녀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기수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훌륭한 기사로 보이지만, 그중에서는 헤센바이츠 소공작께서는 독보적이네요.”
자카리는 바짝 몸을 낮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창을 곧게 내뻗은 손은 흔들림 없이 견고했다.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예요.”
”그런가요?”
“그럼요. 소공작께서 패배하는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황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 사들을 관찰하듯 지켜보았다. 이윽고 황녀가 씩 웃어 보였다.
“……차라리 다른 기사들이 모조리 부상을 입는 것을 걱정하시는 편이 빠를 것 같은데요.”
그제야 이엘리는 마음을 조금 내려 놓았다. 검은 말 위쪽으로 은빛 창 이 곧게 뻗어있었다.
창에 매달려 있는, 청색으로 수놓인 헤센바이츠의 문장이 바람을 머 금어 미친 듯이 펄럭거린다.
“하아……”
선두로 달리던 자카리는 능숙한 동작으로 고리 하나를 꿰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엘리가 얕은 한숨을 흘렸다.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날쌔게 움직였다. 걱정은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이제 좀 안심이 되시나요?”
“끝까지 가 봐야 알죠.”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이엘리는 웃는 낯을 감추지 못했다. 황녀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음, 아무래도 준우승은 카일 경이 차지할 것 같은걸요.”
이엘리의 눈에도 그럴 것 같았다. 선두는 단연 자카리였고, 두 개쯤의 고리를 사이에 둔 채로 자카리의 뒤를 쫓는 젊은 기수가 한 명 더 있었다. 그가 바로 황제의 기사인 카 일 경이었다.
“카일 경도 강력한 우승 후보였는 데…… 소공작님 때문에 좀 아쉽게 되었군요.”
황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다른 기수들은 한참 뒤편에 처져 거리를 두고 달리는 데다, 고 리조차 하나도 얻지 못했다. 우승과 준우승은 아마 두 사람이 나눠 가질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저분은 어느 가문의 기사 이신가요?”
그러던 중,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엘리가 질문했다. 황녀는 고개를 쭉 빼 경기장을 내다보았다.
“저분이요?”
자카리의 뒤를 가장 가까이 뒤쫓는 이는 카일 경이었다.
카일 경의 뒤를 따라서 한 기사가 말을 박차 달리고 있었다. 멀리 있어 표정까진 보이지 않았지만, 묘하게 동작이 초조해 보인다.
“글쎄요…… 웨스터 남작 가문이라 고 언뜻 듣기는 했지만요.”
그렇게 말하는 황녀도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웨스터 가문은 아주 오랫동안 쇠락하여, 이제 멸문에 가까운 남작 가문이다. 애초에 마상 시합에 기사를 내보낼 만한 세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모든 귀족 가 문들이 마상 시합에 기사를 내보낼 수는 있지만……”
마상 시합에 출전하는 데엔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마장술과 창술에 능숙한 기사가 있어야 했고, 훌륭한 말이 있어야했다. 그것만으로도 비용이 많이 들어 웬만한 가문은 엄두도 못 낸다.
‘무엇보다도 황제의 눈에 들 수 있는 자리니까, 의외로 경쟁이 세단 말이야.’
그런 자리에 거의 쇠락해 가는 남 작 가문이 기사를 내보낸다고?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뭔가 좀 이상한데.’
바로 그때. 와아아-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그녀가 경기장에 신경을 기울였다.
“저기, 소공작 좀 보세요!”
황녀가 즐겁게 입을 열었다. 막 다섯 번째의 고리를 꿰어 맨 자카리가 능숙한 동작으로 말의 고삐를 잡아 채고 있었다.
단단히 쥔 창의 끄트머리에서 은빛 고리가 새하얀 햇빛을 반사했다.
“다섯 개째예요! 이번에도 소공작이 선두네요!”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야 할 텐데요.”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양손을 가슴 위로 꼭 그러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