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96)

64화 

지금 연주되는 춤곡은 달콤하고 느린 곡조의 왈츠였다. 서로를 반쯤 끌어안은 채 추는 서정적인 춤곡이었다.

‘이엔.’

자카리는 제 품 안에 폭 안긴 이엘리를 내려다보았다. 긴 속눈썹이 하얀 얼굴 위로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춤곡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데에 골몰한, 갓 피어난 새싹 같은 연녹색 눈동자.

‘……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는 한숨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만인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사랑스러운 아가씨. 황제가 그녀에게 집적 거리는 건 정말 싫었지만, 그럼에도 마음만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넌 내 남편인데.”

“응?”

이엘리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자카리가 어리둥절해져서 그녀를 내려다본다.

“아내가 있는 사람에게 억지로 손수건을 건네게 만들다니……”

평온했던 연녹색 눈동자에 짧은 파문이 인다. 불쾌감에 가까운 표정. 그녀가 툭 말을 뱉었다.

“폐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이엘리의 표정은 어딘가 울컥한 것 처럼 보였다. 설마. 자카리의 얼굴 위로 기쁨이 번져 나갔다.

“이엔.”

“응?”

이엘리가 반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말간 눈동자가 자카리를 똑바로 바라보자, 심장이 뛰었다.

“혹시 화났어?”

”……”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새조롬하게 입을 다물었다. 자카리는 약한 갈증을 느꼈다. 입 안이 바짝 마른다.

네가 나 때문에 감정이 흐트러졌으면 좋겠어. 자카리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게, 페하께서 황녀가 내게 손수건을 건네도록 압박하셨잖아.”

“당연하지! 어딜 아내 있는 남자에게 그따위 수작을 걸어?”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 순간 자카리는 지극히 행복한 얼굴이 되어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로렌 백작 영애 때 문에 신경이 쓰여서 죽겠는데……!”

“로렌 백작 영애?”

자카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되물었다. 아차. 이엘리는 지그시 혀끝을 깨물었다.

너무 화가 난 바람에 솔직한 본심 이 튀어나와 버렸다. 황녀도, 엘리제 도. 자카리에게 접근하는 것은 싫었다.

“질투 따위 안 한다고 했잖아?”

“무, 물론이야. 질투 같은 걸 왜 해?”

“그런데 왜 여기서 엘리제가 나와?”

자카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엘리는 자카리의 질문보 다는 다른 쪽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자카리를 쏘아보았다.

“엘리제?”

뾰로통한 이엘리의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던 이엘리가 사납게 되물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밀했어?”

“그야 엘리제는 내 사촌 여동생이니까. 친밀한 걸 떠나서……”

능숙하게 스텝을 밟으며 자카리가 답했다. 다음은 두어 걸음 멀어졌다 가 돌아오는 동작이다.

“이름 정도야 부를 수도 있지 않아?”

”……”

이엘리는 대답 없이 총총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빙그르르 돌아온 그녀가 그의 품에 안긴다.

“이엔?”

이엘리는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켰다. 자카리의 말이 맞다는 것쯤, 그녀도 알고 있다.

자카리와 엘리제는 사촌 관계라는 것도, 친하지 않아도 손위 사촌이 이름 정도는 부를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래도 싫었다. 자카리를 빤히 올려다 보던 그녀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새침하게 말했다.

“앞으로 이름 부르지 마.”

”……”

이엘리의 말을 들은 자카리의 시선 안쪽으로 따스한 애정이 번져 나갔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로렌 백작 영애의 이름,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지 말라고.”

아, 이엔. 넌 왜 이렇게 귀여워서.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아서였다. 그의 침묵을 어느 쪽으로 해석했는지, 그녀는 뚱한 낯이 됐다.

“얼른, 약속해.”

이엘리가 자카리를 채근했다. 이렇게 대답을 재촉하는 모습 자체가 드물지 않나. 그는 웃었다.

“글쎄, 생각 좀 해 보고.”

“뭐라고?”

이엘리는 정색하는 얼굴까지도 예뻤다. 자카리는 좀 더 그녀를 놀릴 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알았어, 부르지 않을게.”

“진짜지?”

“그럼, 진짜지.”

자카리의 대답을 들은 그녀가 활짝 미소 지었다. 자카리는 흐뭇한 얼굴을 했다.

어차피 이엘리와 말씨름을 해서 제가 이겼던 전적도 없거니와, 그녀에 게는 백 번 천 번 져도 상관없었다.

‘아, 그런데.’

이엘리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던 자카리는 문득, 그녀에게 받아야 할 물건 하나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엔.”

“왜?”

어느새 음악도 끝을 향하고 있었다. 춤곡에 맞춰 그녀에게 다가서며, 그는 짓궂게 질문했다.

“내 손수건은 어디 있어?”

”……”

이엘리는 침묵했다. 홱 고개를 돌 리는 것이,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속내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뭐야, 손수건 주기로 약속했잖아.”

“그, 그게.”

이엘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 안네로제 황녀가 만들어 건넨 손수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황녀 전하의 그 손수건…… 내 손수건보다 훨씬 예뻤어.’

연한 노랑색이 화사했던 손수건 위 로는 정교한 솜씨로 자수가 놓여 있었다.

안 돼, 자카리가 이미 황녀 전하의 손수건을 봤잖아. 내 거, 창피해서 절대 못 줘. 그녀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저기…… 그 손수건, 꼭 줘야 해?”

“그게 무슨 소리야?”

자카리는 대번 정색했다. 이엘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침모에게 도안만 도움받지 말고, 자수도 좀 도와 달라고 할 걸. 그 손수건을 손목에 맨다니…… 그녀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내 손수건…… 있지, 솔직히 너무 서투른 솜씨라서……”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하지만 황녀 전하의 손수건이 너무 예뻤잖아.”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다. 아 마 자카리는 이엘리가 준 손수건이 누더기여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테 지만, 이엘리의 자존심 문제였다. 이엘리는 어떻게든 자카리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어차피 넌 손수건 같은 거 없어도 우승할 거니까, 별로 상관도 없고……”

“상관이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 리 좀 하지 마.”

자카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떻게든 이엘리에게 꼭 손수건을 받아 내겠다는 그런 얼굴이다.

“……꼭 받아야 해?”

“물론이지.”

자카리의 대답을 들은 이엘리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경험상, 저런 얼굴을 할 때의 자카리는 절대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때마침 음악이 끝났다. 자카리가 채근했다.

“그래서 손수건 안 줄 거야?”

간절한 눈동자. 손수건을 받지 못 하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이다. 그녀는 울상을 했다.

“그럼, 놀리면 안 돼.”

“내가 언제 너한테 그런 걸로 놀린 적 있어?”

하긴 그도 그렇다. 머뭇거리던 이엘리는 결국 물품 보관소로 찾아갔다. 가방 안에 들어있던 손수건을 꺼내 내민다.

자카리는 지극히 행복한 얼굴로, 제 손에 들린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기뻐.”

서투른 솜씨로 헤센바이츠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는 하얀 손수건. 은룡과 아샤꽃.

단 한 번도 좋아해 본 적 없던 공작가의 상징은, 그녀의 손이 닿음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된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고 말하면, 믿어 줄래?”

”……”

“물론 넌 믿지 못하겠지만.”

자카리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손에 쥔 하얀 손수건을 들어 올린 자카리가, 짧게 키스했다.

“진심이야.”

마치 여신에게 바치는 공물을 대하는 것처럼 경건한 동작. 그 모습이 잔상처럼 눈에 남았다.

‘나, 어쩌면.’

자카리를 이제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이엘리는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어렸던 소년은 어느새 인가 청년이 되었다. 느끼지 못한 새, 가랑비처럼 스며드는 가없는 애정.

“……엔.”

”……”

“이엔?”

그때, 저를 부르는 자카리의 목소리에 그녀는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난처하게 웃었다.

“아, 미안. 뭐라고 말했어?”

어느새 자카리는 손수건을 소중하게 접어 품에 넣은 채였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자고 했어."

“벌써?”

“응. 어쨌든 황제를 만났으니, 최소한의 면은 섰으니까. 아차.”

짙푸른 눈동자가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살며시 미간을 좁힌 자카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혹시 네가 무도회를 더 즐기고 싶은 거라면……”

“아냐, 나도 돌아갈래.”

이엘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만하면 황가에 대한 예의는 대충 지켰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론.

‘너와 단둘이 있는 편이 훨씬 더 좋으니까.’

이엘리는 뺨을 붉히면서 미소를 지었다. 자카리는 그런 그녀를 정중하게 에스코트해 주었다.

 별이 총총한 시각, 두 사람은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로 돌아왔다. 각자 침실로 돌아가기 전, 두 사람은 서

로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남겼다. 그러던 중 이엘리는 문득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도 침실을 합치지 않았지.’

새삼스레 그런 게 눈에 밟힌다. 막 돌아서려던 자카리는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 그가 묻는다.

“이엔? 왜 그렇게 봐?"

“아, 아니.”

이엘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자카리의 두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그런 게 아니야. 그냥……”

그런 이엘리를 빤히 바라보던 자카리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불쑥 질문을 던졌다.

“혹시 블랑쳇 영지에 방문하고 싶어서 그래?”

“응?”

아니, 난 그런 생각은 전혀 한 적이 없는데. 어리둥절한 얼굴이 된 그녀가 자카리를 마주 본다.

“여기서 블랑쳇 영지는 그리 멀지 않잖아. 부모님도 뵙고 싶을 거고.”

“하지만 네 성년식 때 한번 뵈었잖아. 난 괜찮은데?”

그녀는 정말로 괜찮았다. 부모님은 저번에 충분히 뵈었고, 무엇보다 그녀는 이미 그와 결혼한 사이 아닌 가. 그녀의 가족은 자카리였다. 왜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오히려 이 해가 안 갔다.

“날 배려하느라 그렇게 말해 주는 거라면……”

“그런 거 아니야.”

기가 막힌 이엘리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어느새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도, 제도에 올라온 이래 내내 불쾌한 일만 있었잖아.”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잖아?”

“그건.”

거기까지 말한 자카리가 꾹 입을 다물었다.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나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그런 불 쾌한 일들을 겪지 않았어도 될 테니까.’

차마 그 말만큼은 꺼내지 못했다. 이엘리가 그 말에 동의한다면, 너무 슬퍼질 것 같았다.

‘혹시 네가 고향을 그리워하면 어쩌나, 그런 걱정이 들어.’

자카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때 이엘리가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고는 푹 한숨을 내쉰다.

“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의 뺨을 꾹 잡아당겨 꼬집은 그녀가 말했다.

“내 첫 번째 가족은 바로 너야.”

”……”

“네가 좋으니까, 난 다 괜찮아.”

연녹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곧다. 자카리는 울컥, 가슴 안쪽부터 올라오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 고, 일찍 자.”

“……이엔.”

“이왕 마상 시합에 나가기로 했으면.”

이엘리가 짓궂게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의 뺨을 손으로 조물거리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날 아샤꽃가지의 주인으로 만들 어 줘. 알았지?”

“물론이야.”

목이 메는 기분에, 자카리는 부러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상 시합 당일. 하늘은 파란색 유리처럼 맑고 투명했다.

투명한 햇살이 물처럼 흘러넘치는 가운데, 마상 시합을 위한 새로 단 장한 경기장은 산뜻해 보였다. 이엘리가 크게 숨을 들이쉰다.

“사람 많네.”

“그러게.”

오히려 이엘리보다 자카리가 덜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이엘리는 힐끔 자카리를 곁눈질했다.

“긴장 안 돼?”

“뭐, 긴장할 게 있나?”

“그래도 이제 곧 마상 시합에 나가야 하잖아.”

이엘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연녹색 눈동자가 자카리를 걱정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이엔, 그런 걱정은 하지 않기로 나랑 약속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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