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화
“그리고 만약 꽃가지를 얻으셨다 한들, 전 그 귀중한 꽃가지를 받을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것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거야 저는 폐하께 손수건도 드릴 수 없는 몸이니까요.”
곁에 선 이엘리와 황제의 대담을 지켜보며 죄 없는 론도 영애만이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비록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이엘리가 바짝 날을 세우며 황제를 대하는 게 보였다.
“페하의 꽃가지를 받으면, 저보다 더 기뻐할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그렇게 거리를 두시면 제가 서운 합니다.”
”거리 라니요, 그저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이랍니다.”
이엘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황제는 이쯤에서 화제를 전환해 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레이디, 오늘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폐하.”
“특히 드레스가 무척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패착이었다. 이엘리는 달콤한 표정을 지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이 드레스는 제 남편의 눈동자 빛깔에 맞춰 주문했답니다.”
이엘리의 목소리가 화사하게 피어 났다. 황제의 짙은 눈썹이 불쾌감 때문인지 꿈틀 움직인다.
“사교계에는 예스러운 관습이 있잖아요?”
”……”
“부부나, 혹은 연인이 색을 맞춰 의상을 갖추는 관습 말이예요.”
노래하듯 말을 이은 이엘리는 힐끔 황제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황제는 지그시 이를 물었다.
“부끄럽습니다만 오늘 제 모습, 다른 귀빈들께는 꽤나 호평이었거든 요.”
그녀는 보란 듯이 드레스 자락을 살랑 움직여 보였다.
짙은 바다색으로 시작하는 드레스는 풍성한 치맛자락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짙은 남청색으로 물든다. 자카리의 예복과 같은 색이다.
“폐하께서도 흡족하게 바라봐 주시 면 정말 기쁠 텐데요.”
이엘리가 움직이는 서슬에 드레스 가 다시 한 번 흔들렸다.
드레스 자락 위, 바다의 포말처럼 자잘하게 박아 넣은 크리스털 구슬 들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황제는 멍 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요.”
무어라 화낼 수도 없는 상황이라 황제는 숨을 삼켰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오래된 관습까지 끌어온 이엘리는 명백하게 황제를 거절하고 있다.
‘……이렇게 내가 포기할 줄 알고?’
황제는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때마침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자카리였다.
“폐하.”
“아, 소공작도 오셨군요.”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황제는 자카리를 맞아들였다. 자카리는 그녀의 곁에 바짝 붙은 채 손을 감아 쥐었다.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면서 이엘리는 약간 안도했다.
“그러고 보니 소공작을 내내 찾고 있었습니다.”
“저를요? 어째서입니까?”
자카리는 경계의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빙긋 웃으며 자카리와 시선을 맞춘다.
“안네로제가 소공께 손수건을 드리고싶어 하거든요.”
순간 이엘리와 자카리는 동시에 당황해 버렸다. 황녀가 자카리에게 손수건을 주다니? 어째서?
‘황녀 전하가? 도대체 이유가 뭐 지?’
물론 마상 시합에서 주고받는 손수건의 기본적인 의미는 '귀부인의 명예를 기사에게 맡긴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귀부인이 기사에게 손수건을 주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자카리는 이미 결혼한 데 다가, 황족이 공작가의 사람에게 손수건을 줄 이유가 없잖아.’
게다가 손수건 자체는 여러 장 받을 수 있다 해도, 기사가 선택하여 손목에 감아 두는 손수건은 단 하나 뿐이다. 또한 자카리는 이엘리의 손수건을 선택할 터. 그럼에도 손수건을 주는 건…….
‘그렇다면 설마 황녀 전하께 서, 일부러 나를 견제하기 위해서?’
이엘리는 딱딱한 얼굴로 황제를 응시했다. 황녀가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지금 이 일은 이엘리에게 있어 모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고?
“이리 오렴, 안네로제.”
그때 황제가 느긋한 목소리로 황녀를 불렀다. 이엘리는 황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치를 챘다.
‘이 일, 황녀 전하의 의지가 아니구나.’
이번 일에 황녀의 의지는 없다시피 한게 눈에 훤히 보였다. 새하얀 드레스를 차려입은 황녀의 얼굴은 드레스보다도 희었다.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황녀의 태도는 어딘가 어색 해 보였다.
“……오라버니.”
“왜 그러느냐, 안네로제?”
황제는 꽤나 다정한 오라비인 척 황녀에게 대답했다. 황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 손수건은……”
“이런, 소공께 건네지 않고 뭐하느 냐.”
한편, 안네로제는 손수건을 쥔 주 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등 위로 희 게 뼈가 도드라졌다.
황제의 미소는 일견 다정해 보였지만, 사나운 눈빛까지 숨기진 못했다. 그녀는 목을 죄어 오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얼른.”
”……”
황제는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황녀를 재촉했다. 보는 눈이 많았다. 아무리 소공작이 거침없이 행동한다 한들, 이곳은 황성의 한복판이다. 황녀의 손수건을 대놓고 거절하긴 어려울 것이다.
‘정말 난…… 이러고 싶지 않은데.’
황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황녀는, 결국 손수건을 꺼내서 자카리에게 건넸다.
“제 손수건을 받아 주시겠어요, 소공작?”
자카리는 냉정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이 건네는 손수건, 그런 상징성에 대한 감 흥 따위는 일절 없는 표정이었다. 황녀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제가…… 소공작을 생각하며, 직접 수를 놓았답니다.”
더듬더듬 말을 잇는 황녀의 얼굴은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승리를 기원하고, 아샤꽃가지의 주인이 되시기를 희망하면서……”
황제는 그 대화를 들으며 뱀처럼 눈을 빛내고 있다. 황녀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말을 맺었다.
“……승리하셨을 때, 그 꽃가지를 제가 받을 수 있다면 무척 기쁘겠어요.”
황녀가 그렇게 말을 맺는 순간, 황제의 입꼬리가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그와 동시에 주변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황녀는 엄연히 남편이 있는 상대에게 ‘아샤꽃가지를 받고 싶다’라고 말한 거다. 손수건을 건네는 것은 아슬아슬하게 예의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건.
‘거의 아내 있는 남자에게 관심을 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황제의 속내는 대충 알겠다. 황녀와 소공작 사이에 묘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외부에 보이는 게 나쁘지 않다 여겼겠지. 귀부인이 기사에게 손수건을 준다는 것 자체가 상대에게 마음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당사자들의 속내가 어떤지는 크게 상관하지 않을 터다.
‘……황제는 그저, 지금의 모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만 하면 그만일 테니까.’
적어도 황제가 황녀를 이용하고자 하는 속셈은 훤히 보였다.
이엘리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기분을 느꼈다. 황녀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럼에도 화가 치솟았다.
“죄송합니다.”
그 순간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고, 이엘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자카리였다.
“아시다시피 전 이미 손수건을 받을 사람이 있어서요."
“그냥 받기만 해 주셔도 전 괜찮습니다.”
자카리의 칼 같은 거절에 안네로제는 안도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녀가 한결 편안해진 태도로 말한다.
“그 손수건을 굳이 손목에 감아주실 필요는 없어요.”
“아니요, 그래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자카리는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대 답했다. 거절당하는 상황임에도 안네로제는 즐겁게 웃었다.
“소공작께서는 레이디 헤센바이츠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시는군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엔 외의 다른 사람은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들으란 듯이 말하는 목소리에 이엘리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소공작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다면 어쩔 수 없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카리는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온기를 담은 푸른 눈동자가 이엘리를 지켜보았다.
“전 열렬히 사랑하는 아내가 있으니, 아내에게 충실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소공작의 마음을 충분히 알았어요. 두 분께서 행복하시기를 법니다.”
황녀는 냉큼 손수건을 다시 챙겼 다. 불만스러운 얼굴이 된 황제가 멋대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소공작, 제국에서 가장 귀 한 여인인 황녀의 손수건입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런 눈빛을 담아 자카리가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뻔뻔하게 되물었다.
“그저 호의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거절할 필요가 있습니까?”
“당연히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자카리는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짙푸른 눈동자가 비웃음을 담은 채, 우아하게 휘어진다.
“전 제 아내 외의 어떤 여자와도 가까이 지낼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저 예의상 받아두기만 해도 될 문제 아닙니까.”
“아니요. 그런 사소한 예의보다는 이엘리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렇게 말한 자카리는 보란 듯이 이엘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는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이엔의 오해를 사느니 그 편이 나아요.”
”……”
황제는 순간 열패감에 가득 찬 얼굴을 했다. 자카리는 황제의 속내를 이미 꿰뚫어 본 것이다.
‘이엘리에게 어떻게든 접근하기 위해서, 날 떼어 놓기 위해 황녀를 붙이려한 거겠지.’
하지만 자카리는 그 속셈에 넘어가 줄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자카리는 냉정하게 말을이었다.
“그리고 폐하.”
황제가 힐끗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자카리는 차분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며 곧장 말했다.
“앞으로는 이런 장난질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침착한 목소리와 다르게 빈정거리는 기색이 가득한 말투다. 황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네로제 황녀께서는 폐하의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이시지 않습니까.”
자카리는 어깨를 으쏙거렸다. 비록 표정은 담담하지만, 자카리는 지금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그런 여동생에게 압박을 줘, 제게 손수건을 건네게 하는 장난은……”
자카리가 빙긋 웃었다. 제국 최고의 전사가 발하는 압박감이 밀려든 다. 황제는 헛숨을 삼켰다.
“……여동생의 명예를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소공작!”
황제는 발끈했다. 하지만 자카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에게 차게 웃는다.
“황녀께서 아내 있는 남자에게 질척거린다는 오명을 뒤집어쓸지도 모 르지 않습니까?”
“내가 안네로제에게 그리했다니, 저 아이의 호의를 너무 과하게 해석 하시는 것 아닙니까?”
“뭐, 굳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따로 부정할 생각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힐끔 황녀를 바라보았다. 황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황제를 노려보다, 자카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뭐,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응? 한참 대화를 듣고 있던 이엘리가 자카리를 올려다보았고, 그 눈 빛을 마주한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까 이엔이 저와 약속을 하나 했거든요.”
“무, 무슨 약속?”
“생각 안 나? 오늘의 첫 춤을 함께 추겠다는 약속 말이야.”
당황한 이엘리에게 자카리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아, 그랬지. 그녀가 멍하니 눈을 깜빡일 때.
‘……어라?’
순간 자카리가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손등을 부드럽게
들어 올림과 동시에, 그의 시선이 낮아지는가 싶더니…… 이엘리는 눈을 크게 떴다.
“레이디.”
촉. 나비 같은 키스가 내려앉았다. 이엘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카리가 속삭였다.
“제게 첫 춤을 추는 영광을 주시겠 습니까?”
“……기꺼이요.”
이엘리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전연 신경 쓰지 않고, 그는 이엘리를 에스코트하여 댄 스 홀로 나아갔다.
황제는 열등감이 범벅된 얼굴로 그 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댄스 플로어에 발을 들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들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 시선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상대의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