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96)

62 화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왜냐하면 황녀를 제외한다면, 그녀가 무도회 장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레이디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넬 정도로 친분을 쌓은 사람도 없다.

”……”

그녀는 황녀가 오면 인사를 하려 우선 무도회장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

“레이디 헤센바이츠를 뵙습니다.”

“……아, 로렌 백작 영애.”

앤 왜 친한 척이지? 이엘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뿐사뿐 걸어온 엘리제는 처음엔 즐거운 얼굴이더니, 이내 자존심이 상한 낯을 했다. 엘리제는 새로 맞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왜 저런 얼굴…… 아, 설마.’

이엘리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 켰다. 아무래도 저번 오페라하우스에서의 일도 있으니, 엘리제는 화려한 드레스를 맞춰 이엘리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엘리도 최대한 공 들여 치장하고 나왔다. 엘리제의 목적이 순식간에 박살 나 버린 것이다.

“……푸른 드레스네요.”

“맞아요. 처음 제도의 무도회에 참석하는 거라, 다소 예스럽지만 관습을 지켰답니다.”

이엘리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제는 분한 얼굴이 되었다. 이엘리 외의 누구도 자카리에게 그런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꽤나 신경 썼네. 음, 백작가의 재정이 저 값비싼 드레스를 감당할 수 있던가?’

이엘리는 시큰둥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로렌 백작 부부는 코빼기 도 보이지 않는데 로렌 영애만 계

속 제 곁을 알짱거리는 게 귀찮기도 했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면서 입을 열었다.

“레이디께서는 오늘은 혼자 계시는 건가요?”

이건 아마, 자카리는 어디 두고 혼자 있냐는 물음일 터. 이엘리는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공께서는 잠시 다른 귀족분들과 인사를 나누러 가셨어요.”

“그, 그렇다면 실례하겠습니다.”

엘리제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 속이 빤히 들여다보여, 이엘리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남편, 이렇게 인기가 많아서 어떡하나.’

아무래도 자카리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자카리에게 황녀를 붙이려 하는 황제는 물론이고, 유부남을 생각하며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는 엘리제까지.

”어머나, 벌써 가시려고요?”

그리하여 이엘리는 낭랑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엘리제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소공께서는 금방 돌아오실 텐데요.”

“예? 그건……”

“왜냐하면 오늘 무도회의 모든 춤은 저와 추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솔직히 그런 약속 따위 한 적 없 지만, 이 정도 거짓말은 해도 상관 없을 터다.

무엇보다도 자카리는 그녀가 ‘오늘 나랑 모든 춤을 추자’라고 제안하면, 될 듯이 기뻐하며 받아들일 테니까.

“그러니까 '소공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라면, 제 옆에 계시는 게 제 일 빠를 거예요.”

어차피 네가 자카리에게 접근하려 한들, 자카리는 받아 주지 않을 거 라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괜히 넓은 무도회장을 돌아다녀서 힘 빼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이엘리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정곡을 찔렸는지,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며 낯을 붉혔다.

”……”

그래도 자카리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는지, 엘리제는 주춤주춤 이엘리쪽으로 다가왔다.

이엘리는 시큰둥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한숨을 삼키면서 엘리제를 이해해 보려 애썼다.

‘솔직히 로렌 백작 영애가 왜 저러는지…… 이해를 못 할 건 아니지…… ‘ 

로렌 백작 부인이 예전에 자랑스럽게 떠들어 댔던 말을 되새겨 본다. ‘사실은 저희 딸을 소공께 보내고 싶었다’고 했었나.

어머니의 가르침이 저런 식이니 딸 이 저런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내가 내 남편한테 부적절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까지 적당히 봐줘야 할 필요는 없지.’

이엘리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경고는 필요할 것 같다. 그녀는 엘리제를 돌아보았다.

“로렌 백작 영애.”

“네?”

“영애께서는 공작가의 외척이시자, 소공의 사촌 동생이시죠.”

그 말에 엘리제는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마주 본다. 이엘리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스스로가 어떻게 처신해야 적절할지 잘 아실 거라고 믿어요.”

“……그게 무슨 말씀 이신가요?”

“제 남편은 아내가 있는 사람임을 확실히 인지하고 계시라는 뜻이예요.”

순간 엘리제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 올랐다. 비록 이엘리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온기가 없었다.

“다, 당연히 알고 있어요! 레이디께서는 걱정이 많으신 것 같네요.”

“저도 그저 쓸데없는 걱정이었으면 하고 바라요.”

파르르 화를 내는 엘리제에게 그녀는 여유롭게 답했다. 그리고 비스듬히 고개를 꺾으며 말을 잇는다.

“다만 영애께서 제 남편께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내신 것을 보게 되어 서요.”

“그, 그야 저희는 사촌 관계이니까……!”

“단순히 친척끼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보낸 편지 라기에는 부적절하지 않았나 싶네요.”

칼 같은 대답에 엘리제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엘리는 차분한 눈동자 로 엘리제에게 되물었다.

“친지끼리의 친목을 위해서라 면…… 그 편지, 소공보다는 제게 보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건 사실이었다. 제국은 가정을 중요시하는 문화를 가졌다. 결혼한 사람은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다른 이성과 따로 연락하는 게 금기 시되었다.

게다가 제국은 사촌끼리 혼인이 가능했기에, 엘리제가 한 행동은 더욱 부적절했다. 자카리가 답신을 보내 지 않은 이유도 그거였다.

“그것이, 저는……”

“뭐, 영애께서 다른 의도가 없던 거라면 다행이지만요.”

엘리제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더 말을 섞어 봤자 제게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이엘리는 고개만 까닥였고, 엘리제는 홱 돌아섰다. 그 표정까지 로렌 백작 부인과 무척 닮았다.

”……”

로렌 백작가의 사람들은, 묘하게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디 헤센바이츠를 뵙습니다. 리체 론도입니다.”

“안녕하세요. 그럼 론도 후작님의?“

“저희 아버지세요.”

이엘리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예쁘장한 외모의 아가씨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마 자카리와 대관식 때 인사했던 후작의 딸인 것 같다. 이엘리도 마주 웃어 보였다.

“처음 뵙네요. 반가워요.”

“레이디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 로 렌 백작 영애께서 물러나시길 기다렸답니다.”

엘리제가 물러나기를 기다렸다고? 이엘리는 의아한 낯이 되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이런, 바로 오셨어도 됐을 텐데요.”

“아니예요. 사실 로렌 백작 영애는 조금 불편해서……”

그러나 론도 후작 영애는 정색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엘리는 그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그러고 보면 론도 후작 영애께서는 황제 폐하와 혼담이 오가신다고 들었는데……”

“아니예요,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답니다.”

이엘리의 물음에 후작 영애는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녀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호사가들이 제멋대로 떠들어 대는 것뿐이지요. 아무래도 폐하께서는 혼인 적령기이시니까요.”

사실 론도 후작 영애만큼 신분 면에서 황제와 어울리는 여인도 드물 다.

제국 유일의 공작가인 헤센바이츠에는 공녀가 없고, 고작 둘 뿐인 후작 가문 중에서 미혼 여성은 그녀 뿐이었으니까.

“솔직히 전, 폐하의 반려라는 자리를 별로 원하지도 않고요.”

“그러신가요?”

“네. 제국의 황후는 만민의 어머니 가 되어야 할 텐데, 제게는 과분한 자리예요.”

후작 영애는 생글생글 눈웃음을 지었다. 현 황제는 솔직히 남편감으로는 그리 적절하지 않다.

‘또한, 황제 폐하께서는 명백히 레이디 헤센바이츠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시는걸.’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둔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해 봐야 뭐하겠는가. 제 마음만 아플 뿐이었다.

게다가 황후의 지위는 그 권리만큼이나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위치다. 고생길이 훤히 보인다.

“그러고 보니, 마상 시합에 소공작님이 참가하신다고 들었어요.”

“아, 맞아요.”

“손수건은 당연히 드리실 거지요?”

눈을 반짝이며 후작 영애가 물었다. 이엘리는 순간 가방 안에 들어있은 손수건을 떠올렸다.

“그게, 주긴 줄 생각이지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꼬리를 흐렸다. 최선을 다해 수를 놓았고, 다림 질도 마쳤고, 향수 몇 방울까지 뿌 렸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모양이 처참했 기에, 손수건을 줄 용기가 생기지를 않는다.

“레이디께서 직접 수를 놓으셨을 테죠? 무척 기대되네요!”

“아뇨, 그런 건 기대하지 마세요……”

이엘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론도 영애는 이엘리가 그저 엄살을 부리는 것처럼 여겼다.

“에이, 괜찮으실 거예요. 어떤 걸 드려도 공작님께서는 좋아하실 텐데 요!”

물론 그건 맞지만. 그래도 이건 내 자존심 문제라고요. 차마 그렇게 항 변할 수는 없어서, 이엘리는 어색하 게 눈웃음을 쳤다.

때마침 론도 영애가 뭔가 생각난 것처럼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그보다 이번 마상 시합에서 폐하께서는 대리 기사로 카일 경을 내보 내신다고 해요.”

“카일 경이라 하면…… 친위대의 기사로군요?”

“맞아요.”

그렇게 말하며 론도 영애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리는 시큰둥한 얼굴이 되어 생각했다.

‘카일 경도 안 됐군.’

운이 좋아 우승하면 뭐하나, 아샤꽃가지를 바칠 권리는 폐하께 드려야 할 텐데. 그렇게 투덜대던 이엘리는 문득 황제가 했던 말을 다시 상기했다. 그러고 보니 그 꽃의 주 인은 황녀가 아니라…….

”……”

기분이 나빠져 버렸다.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그때, 어떤 남자가 이엘리에게 말을 걸었다.

“저, 레이디 헤센바이츠를 뵙습니다. 콜린 밀란 자작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엘리 헤센바이츠예요.”

이엘리는 사교용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마주 미소 지은 남자가 상냥하게 말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게 레이디와 담소를 나눌 약간의 시간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그 관심은, 차기 공작인 자카리에 대한 것도 포함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자카리와 제도 귀족들의 관계가 좋아져 나쁠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그때.

“밀란 자작. 그 시간, 제게 양보할 수는 없겠습니까?”

아니, 이 목소리는? 이엘리는 순간 얼굴을 한껏 찌푸렸고, 론도 영애는 경악했으며, 용기를 내어 말을 건 자작은 불쌍해 보일 정도로 긴장했다. 뒤를 돌아본 이엘리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렇게 다시 보네요, 레이디 헤센바이츠.”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진상이었다. 아니, 왜 자꾸 친한 척이야? 내가 너 싫다고 표현하지 않았나? 자작은 슬금슬금 물러났고, 황제는 매끄럽게 미소를 지었다.

“소공은 어디 가고 혼자 계십니까?”

“다른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게 어쩐 일이 신지요?”

이엘리는 질색하는 표정을 간신히 감추며 되물었다. 황제는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연다.

“서운하군요. 용건이 없으면 말도 걸어서는 안 됩니까?”

“……물론 그러한 뜻은 아니지만요.”

차마 정색할 수는 없어, 이엘리는 한 걸음 물러났다. 황제는 눈을 가 늘게 뜨면서 말을 이었다.

“아까 전, 로렌 백작 영애와 같이 계실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스토커도 아니고 처음부터 보고 있었냐! 기겁하는 이엘리와 달리 황제는 홀로 태연한 태도다.

“훌륭한 처신이더군요. 역시, 제가 아샤꽃가지를 바치기로 마음먹은 레이디이십니다.”

“글쎄요. 꽃가지를 바칠 마음을 가 지신다 한들, 실제로 바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지요.”

이엘리는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우승할지 아닐지도 모르지 않느냐’라는 완곡한 물음에, 황제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이엘리는 여전히 화사한 미소로 황제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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